16일 교육과학기술부와 서울대에 따르면, 지난 2월25일 서울대 공대 재료공학부 실험실에서 한 연구원이 폭발성 물질인 ‘아자이드’ 고체화합물을 처리하던 과정에서 폭발사고가 났다. 이 사고로 해당 연구원은 상반신 전체에 유리 파편이 박히는 부상을 당했고, 실험 기자재 일부가 파손됐다. 5월12일에는 농생대 실험실에서 한 대학원생이 박테리아 배양용액을 멸균 처리하다 삼각 유리플라스크가 파열되면서 화상을 입었다. 지난달 8일에는 학부생 두 명이 실험에 쓴 에탄올을 ‘산성 폐수’ 저장용기에 잘못 폐기하는 바람에 유해가스와 열이 발생했다. 다행히 다른 연구원이 바로 소방서에 신고해 상황은 조기에 수습됐다. 서울대 관계자는 “실험 폐수는 지정된 용기에 저장해야 하는데 학부생들이 잘 모르고 실수했다. 빨리 발견하지 못했다면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뻔했다”고 설명했다.

서울대에서 이런 실험실 사고는 낯선 일이 아니다. 1999년 9월 공대 원자핵공학과에서 발생한 대형 폭발사고는 대학원생 3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1명의 중상자를 내 대학 실험실 최악의 사고로 꼽힌다.

2000년 이후에도 반도체 공동연구소(06년 6월)와 생명과학동(07년 2월)에서 폭발사고가 나 연구자들이 화상을 입는 등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서울대 실험실에 ‘안전 경고등’이 켜졌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http://www.scieng.net/zero/view.php?id=adujob&no=654



이름
  천칠이(2002/09/18, Hit : 1846, Vote : 0
제목
 1999년 9월 18일...

<풍경>

   도서관을 향해 북쪽으로 뻗은 평평한 길은 자연대와 공대를 구분짓는 길과 만나면서 조그만 삼거리를 만든다. 그곳에서는 예전에 의예과 학생들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고 화학실험을 하던 대학원생들이 담배를 피며 담소를 나누던 광경도 볼 수 있었다. 겨울이 다가올 때면 매서운 바람을 참으며 담요을 두르고 책상에 앉아 투표를 독려하는 선거관리 학생들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는 곳이다.
    이 삼거리 남쪽에는 계단과 함께 잔디 비탈이 나있고 그 위로 커다란 철제 가건물을 볼 수가 있다. 기존에 있던 학교 건물과 같은 높이로 지어졌지만, 그냥 하나의 커다란 네모난 컨테이너 박스를 연상시키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그 앞으로 이런 공대 건물들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세 개의 추모비가 서 있다.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앞을 웃고 떠들며 지나다니고, 간혹 흘끔 그곳을 쳐다보고 가기도 한다. 건물들도 처음부터 그랬던 양 그 모습 그대로이지만, 3년 전 이맘때 있었던 이곳의 광경을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기억들>

    정확히 3년 전, 1999년 9월 18일의 새벽이 기억난다. 금요일 밤이었지만 다음 날 있을 무슨 회의를 위해 선배 두 명과 날을 새며 자료를 출력 중이었다. 마침 예상치 못한 가을비가 내린 탓에 돌아가는 길은 평탄치가 못했다. 우산 하나에 의지해서 세 명이 겨우겨우 정문까지 걸어내려갔고 어째어째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한 나는 비와 땀으로 온몸이 젖었음에도 불구하고 극도의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그냥 잠이 들었었다. 

    그 다음 날.

    나는 평소처럼 지나왔던 그곳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 광경으로 펼쳐져 있는 것을 보았다. 철제 가건물의 반 이상이 종이를 구겨놓은 것처럼 찌그러져 있었고 곳곳에는 유리 파편이 튀어 있었다. 면접을 보러온 듯한 한 고등학생과 학부형이 황급히 자리를 뜨는 모습이 보였고, 소방관, 경찰관, 기자, 응급의료진 등 많은 사람들이 주변을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잠시 도무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는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만 보고 있었다. 나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날 새벽, 빗속을 걸어내려 오면서 평소처럼 건물 안이 환하게 불을 밝힌 것을 보았고 사고 연구실 사람들도 우리처럼 또 날을 새며 일을 하는가보다 하고 덤덤이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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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명의 부상자가 있었다고 한다. 생명에 지장을 줄 만큼 심한 3도 화상이었으며 세 명은 모두 대학병원으로 옮겨졌다. 폭발사고였다. 사람들이 지진이 일어났다고 생각할 만큼 엄청난 폭발이었다. 그리고 그 세 명은 아마도 그 중심부에 있었던 모양이다. 여기저기서 사고에 대한 얘기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암반 발파용 알루미나 분말이 폭발했다는 말이 들렸다. TV에서도 종일 그 이야기들이 끊이지 않았고, 평소 연락이 없었던 사람들의 걱정에 답하느라 전화 통화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다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왔다. 모두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라고 했다. 
    한 친구가 Y 형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구급차에 실려갈 때까지만 해도 형은 의식이 있었다고 한다. 신발이 발에 눌러붙을 정도로 심한 화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Y 선배는 동료들에게 엄지손가락을 내어 올리며 괜찮다는 표현을 했다고 한다.
    신발이 눌러붙는 화상이라...

    시간이 흘렀다. 힘겹게 숨을 이어오던 T 형이 제일 먼저 끈을 놓았다. 곧이어  Y 형, 그리고 후배 H. 차례로 목숨을 잃은 소식이 전해졌다. 
    사고 발생 사흘 째였던가, 연구실 사람들과 함께 부의금을 모아 병원으로 향했다. 선후배들, 교수님들, 유족들. 나란히 마련된 분향소에는 수많은 조문객들이 차례차례 세 사람의 유족들을 조문하고 있었고 가족들은 오열했다. 친구와 함께 Y 형의 영정에 국화를 놓고 나올 때는 형의 어머님께서 형의 이름을 부르며 옆에 있던 친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소동이 있었다. 사람들이 겨우겨우 말려서 어머님을 떼어 놓았고 친구는 "내가 죽으면 우리 어머니도..."라면서 슬쩍 안경을 벗고 눈을 비볐다.

    대학원생들은 모두 영안실을 떠나지 않고 이런 저런 일을 유족들과 함께 도왔다. 다들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저녁 쯤인가 유족들과 교수님들의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얼핏 듣기로 사고 관련 경위에 대한 경찰 측의 조서가 문제가 된 모양이다. 작은 규모의 의견 충돌은 여기 저기서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듯했다. 여러 사람들이 나서서 말리는 모습을 간간이 볼 수 있었다. 
    구석 어딘가에 기대어 잠깐 잠이 든 사이에 세 사람의 영구는 이미 차에 오른 뒤였다. 잠시 병원에 마련된 곳에서 교수님들과 학생대표 등이 송별사를 하고 차는 다시 학교로 향했다. 사고가 난 건물 앞에서 다시 한번 제를 올리고 영구차는 세 사람이 영원히 몸을 누일 곳으로 떠났다. 그리고 얼마 뒤에 그 자리에는 세 개의 추모비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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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곧 추석이었다. 이래저래 무거운 마음으로 고향을 찾았고 집에서도 즐거운 소식은 있을 리 만무했다. 사람들은 짐짓 걱정스레 사고에 대해서 얘기를 주고 받았다. 나는 으례 그러했듯이 대학원 생활이 어쩌고 그쪽 연구실이 어떻고 우리 연구실은 어떻고 틀에 박힌 설명을 해줬다. 어머니께는 걱정이 하나 더 늘었다. 설마하니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목숨을 잃는 일까지 하는 줄은 생각지도 못하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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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고 대책이 마련되었고 삼풍이니, 성수대교니 하는 사건들 뒤로 오랜만에 "안전결핍증" 어쩌고 하는 얘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대학원생들의 안전을 위한 조치들이 하나 둘씩 취해졌다. 여기 저기에 소화전이 좀더 생기고, 무슨 샤워기 같은 것들이 붙고, 원생들 불러다가 창고 정리하고, 안전교육 강화하고 그런 일들이었다. 학부생들 중 몇몇이 실태조사를 한다고 설문지를 돌렸다. 후배들과 사고 및 대학원 문제에 대한 의견들을 나눴고 YBM에서 나온 기자한테 우연히 걸려서 친구와 함께 인터뷰도 했다. 아마도 그것이 변화의 전부였던 것 같다.
    겨울이 왔다. 박사 시험을 준비했고, 석사 논문을 위한 코드 계산, 그리고 논문작업, 병역특례 시험, 바쁘게 몇 개월이 흘렀고, 정신을 좀 차릴 때쯤에 난 박사과정 1년차가 되어 있었다. 

<며칠 전>

    사고 건물과 함께 추모비를 둘러 볼 기회가 있었다. 겉은 전과 다름없어 보였지만 그 안에서는 여전히 그 무렵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큰 규모의 실험이 많았고 언제나 교수님과 학생들이 분주히 그리고 열심히 무언가를 하던 곳이었다. 지금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다른 연구실로 옮겼고 남은 선배 한 명이 강원도 철원의 어느 폐교를 개조해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사고 건물도 많은 것들이 정리되어 휑하니 비어 있었다. 여기저기 창고처럼 물건이나 장비들이 군데군데 놓여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그들이 어떻게 살았었던가를 기억하고 있다.
    그들이 연구실 좁은 공간에서 교수님과 함께 밥을 해먹던 모습이나 늦도록 일을 끝내지 못하고 분주히 움직이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T 선배가 친절히 "space charge effect"로 전자빔을 만드는 어려움을 설명해줬던 것이나, Y 선배가 골 밑에서 내 훅슛을 블락했던 것, 그리고 과방에서 똘똘한 표정으로 리포트의 어려운 문제를 설명하던 후배 H의 얼굴, 나는 그런 것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추모비에는 동판으로 만든 고인들의 얼굴 아래로 "이러저러한 연구에 종사하고..."하는 글들이 새겨져 있다. 같은 과였던 나에게도 그런 글들은 도무지 와 닿지 않는다. 빗물을 맞으며 그들이 무슨 연구를 했던가 하는 하얀 글씨들이 씻기듯이, 세상에서 그들은 잠깐 세인의 주목을 받곤 하는 의인들처럼 잊혀져 갈 것이다.

    꽃이 피고 꽃이 지면서 계절이 가고 다시 계절이 오고, 그런 속에도 미싱은 잘도 돌아가고 있다. 삼거리 비탈진 잔디도 계절에 따라 파랗게 노랗게 변하고 사람들은 저마다 일상의 바퀴에 맞춰 길을 가고 있다. 새벽의 찬바람이 졸음을 깨우고, 밤을 지새고 졸음을 견디며 깨어있는 자들이 동터오는 새벽을 맞이하듯이, 한 다발 초라하게 비석 아래 놓여 있는 꽃다발이 길들어 가는 우리들의 기억을 깨우고, 깨어있는 우리들이 새로운 미래를 맞이할 수 있게 되리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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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전 그날처럼 오늘도 밤을 지새며.



임호랑 (2002-09-18 09:29:37) 
첨단과학기술전쟁에서 싸우다 스러진 이들이 왜 전사가 아니고, 왜 호국영령이 아니란 말인가?
김상현 (2002-09-18 09:33:16) 
씁쓸해지네요 글을 읽으니..
소요유 (2002-09-18 10:07:23) 
울적합니다. 한편으로 애처롭고, 한편으로 허무해지기도하고..... 뭐 그렇습니다.
배성원 (2002-09-18 14:56:20) 
당시 많은 대학원생들이 개죽음이라고 했습니다. 그 원생들, 학교는 다르지만 나중에 같이 일할 동료였는데...죽고나서 뭐가 있었나요? 저도 출장가면 그 건물 그 개조한 앞쪽으로 난 길로 항상 다니곤 했습니다. 왜 보통 공대식당 앞에서 택시 내리잖습니까? 거기서 원자핵공학과 모 교수님 실험실 가려면 그 길이 젤 빠르거든요. 지나가면서 얼굴도 마주친 적이 있고요..........
정문식
(2002-09-19 13:48:24)
임호랑님께 한표. 이들을 국가유공자로 지정하고 유가족들을 예우해야 하는 것 아닌가?
성백경 (2002-09-19 14:16:27) 
그날 토요일이었던 거 기억납니다. 그때 전 학부 2학년이었고 길 건너 맞은편 자연대 건물에서 땜질을 하고 있었죠.
성백경 (2002-09-19 14:20:23) 
정신이 없었는지 옆건물이 폭발하는데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저녁때 버스타고 나가면서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길래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집에 가서 뉴스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많이 놀랐었죠.
성백경 (2002-09-19 14:23:23) 
대학원생이 된 지금 그때 일이 더욱 슬프게 느껴집니다. 먼저 가신 분들께 진심으로 조의를 표합니다.
트리비어드 (2002-09-19 14:47:10) 
그 날 일시적으로 충격음이 있었습니다. 열심히 웹 서핑하던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놀랐죠. 하지만 단순히 전력 공급 문제인 줄 알았고 학교내에서 그런 끔찍한 일이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었죠.




Posted by 木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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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대로 아름답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습 그대로가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인생의 길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봄에 새잎 나는 것도 예쁘지만 여름에 무성한 것도 보기 좋고 가을에 알록달록 단풍지는 것도 보기 좋습니다. 머리가 희끗희끗 얼굴이 쪼글조글 이렇게 늙어가는 단풍도 너무 너무 예쁘다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또 떨어져서 가랑 잎이 되어 발아래 밟히는 그것도 좋습니다. 그러니 자신에게 주어진 모습 그대로가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인생의 길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이런 것이 열반입니다.



기분이 늘 우울해요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트위터로 보내기

정토 출판 2007.01.26 14395




    

저는 눈치를 많이 보는 편이고 거기다가 화가 나면 말을 못해요. 화를 내면 그 사람하고 관계가 나빠지는 것을 감당 못하거든요. 그리고 상대방에 따라서 제 기분이 많이 좌우돼요. 그 사람이 화를 내면 제가 안절부절못하고 그 사람이 기분이 좋으면 ‘다행이다’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첫 번째, 우울증은 몸의 컨디션과 관계가 있습니다. 잠을 잘 못자거나 소화가 안 되거나 아니면 변이 잘 나오지 않거나 할 때 심합니다. 그래서 변비약을 먹거나 굶거나 또는 관장을 하여 장이 잘 세척되면 증상이 좀 완화되기도 합니다. 두 번째로 우울증이 있다는 것은 지금 바깥 경계에 많이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내면에 자기가 잘났다하는 어떤 상을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어떤 사람이어야 한다든지 우리 아이는 어떻게 되어야 한다든지 하는 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상은 현실의 모습과는 늘 차이가 있습니다. 차이가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남편을, 자식을, 자기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증상이 생깁니다. 이게 바로 자기가 그려놓은 상에 그 사람을 끼워 맞추려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내가 나를 바꾸려고 해도 잘 안 바뀌는데 상대가 쉽게 바뀌겠어요? 그러니까 미워하게 되고 미워하는 게 지나치면 보기가 싫어집니다. 보기 싫어지는 것은 헤어지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가족관계이거나 헤어질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서로 안보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죽여 버리겠다는 생각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것과 살인은, 행위로 따지면 매우 큰 차이가 있지만 마음에서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살생 죄업을 참회하라하면 여러분은 ‘내가 언제 사람을 죽였나’하고 생각하는데 미워하는 것이 이렇듯 죽여 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의 행위가 내가 그려놓은 상과 차이가 크니까 늘 상대에 민감하게 대응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자기가 그려놓은 상과 실제의 자기의 차이가 커지니까 현실에 있는 내가 너무나 꼴 보기 싫은 거예요. 그럴 때 가장 소극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부끄럽다는 것인데 이것은 일종의 정신질환에 속합니다. 부끄러움이 심해지면 남을 만나지 않으려는 심리 현상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심하면 우울증 초기 증상이지요. 더 심해지면 자기가 싫어지고 죽어 버리고 싶어지지요. 그래서 자살을 하게 됩니다. 자기를 미워해서 자기를 죽여 버리는 살인 행위가 자살이지요.

일반적으로 우울증에 걸리면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납니다. 자기를 너무 높게 상정해서 생긴 것이므로, 하나는 자기가 못났다는 하는 피해 의식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가 잘났다하는 우월의식입니다. 이 피해망상과 과대망상은 늘 같이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이럴 때일수록 대인 관계를 넓히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자기에게 사로잡히는 데서 벗어날 수 있는데, 우울증에 빠지면 자꾸 대인 관계를 기피하게 되니까 증세가 점점 더 심해지죠. 수행이라는 것이 자기가 부처 되는 것인데 정신병은 자기 주체를 상실해 버린 것이니까 치료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그러니 옆에서 이것을 포용해서 도와줘야 하고 내면의 피해 의식이 어느 정도 사라져야 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본인은 자신이 별것 아니라는 것을 자각해야 됩니다.

그런데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또 열등의식에 사로잡힙니다. 자아를 높이 설정해 놓으니까 현실에 있는 내가 보기가 싫어서 열등의식이 되는 것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일단 이 허상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만 놔 버리면 부끄럽다든지 창피하다든지 하는 생각은 다 없어지게 됩니다. 이것을 치료하는 방법으로는 엎드려서 절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엎드려서 절을 하면서 자신이 길가에 핀 들풀 같은 하찮은 존재임을 알게 되면 자아 분열이 치료됩니다. 그리고 바쁜 자기 일거리가 있어서 육체노동을 많이 하고 피곤해서 곤하게 자면 금방 치료가 됩니다. 돈 버는 일이 아니더라도 자기 인생을 개척하고 애쓸 일이 있는 것이 좋습니다.


                                                       법보신문 886호 [2007-01-24]


Posted by 木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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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노모 부양문제로 갈등을 빚던 남매가 돌이킬 수 없는 사건에 휘말렸습니다. 오빠가 여동생에게 황산을 뿌려서 중태에 빠뜨린 뒤에 자신도 자살을 기도했습니다.

KNN 김동환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어제(10일) 오전 11시 40분쯤, 부산 괴정동의 주택가에서 62살 양 모 씨가 58살 여동생에게 황산이 든 물총을 쐈습니다.

달아나는 여동생을 다시 둔기로 내려친 양 씨는 본인도 황산을 마시고 중태에 빠졌습니다.

[인근주민 : 여자 고함소리가 어찌나 크게 나던지, 피가 철철 나면서 여자 한 명은 누워 있고 여기 형님은 아저씨를 말리고 있고….]

이 사건은 양 씨와 여동생이 80대 노모의 부양문제로 실랑이를 벌이다 발생했습니다.

최근 노령층이 늘어나면서 이처럼 노부모의 부양을 둘러싼 갈등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 되고 있습니다.

대개는 누가 부양을 할 것인지와 부양비를 나누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입니다.

[조미정/동부노인보호전문기관 상담팀장 : 노인의 가족 내의 역할이 많이 줄어들었어요. 그러면서 노인 부양에 대해서 회피하게 되고 노인 학대 등 다양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노모의 부양을 둘러싸고 돌이킬수 없는 끔찍한 사건을 겪게된 두 남매.

부모 봉양이 사회 문제가 되는 요즘 고령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씁쓸한 한 단면입니다.

(영상취재 : KNN 하호영)    


Posted by 木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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