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항아가 되라"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 어록 17선
페이스북조회 170 | 트위터노출 172,247 2014.04.03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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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매그놀리아' 세트장에서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 / 사진=텀블러]


1. 영화감독 지망생들에게 하는 조언 


The one thing I remember thinking initially when I was trying to make films, you always feel like—you got nervous that somebody else was right who was talking to you. Who was in a position of power, that their opinion somehow was right or better than yours. I could never stop to think that “No, it’s just different. You just think differently than I do and that’s okay. But I’m not wrong.” You can be filled with such fear. And it’s really easy to just get your heart broken and kind of beaten. You’re sort of attempting to make films… It’s a miracle any time one of them gets made. It’s a miracle. It’s a miracle every time a scene gets done. It’s never any less of a miracle or any less difficult… There just should be no fear. Just don’t give a fuck. That’s kinda the best thing to do.


첫 영화를 만들려고 할 때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게 기억난다. 이런저런 조언하는 누군가가 맞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했다. 권력의 위치에 있는 사람 의견이 뭔가 당신 의견보다 옳고 더 낫게 느껴질 것이다. 가만히 멈춰서서 "아냐, 그냥 다른 거야. 당신 생각이 내 생각과 다른 건 좋아. 하지만 내가 틀리진 않았어"라고 생각하진 못했다. 당신은 두려움으로 시달리게 되고. 마음이 무너지고 깨지기 쉽다. 여러분은 영화를 만드려 시도하고 있다. 영화 하나가 만들어지는 건 기적이다. 정말 기적이다. 한 신이 완성될 때마다 기적이다. 기적 아닌 게 없고, 그 어느 하나 어렵지 않은 게 없다.... 두려워하지 말아야한다. 그냥 씨발 조까라. 그게 가장 좋은 길이다. 





2. 영화 학교에 대해 


“My filmmaking education consisted of finding out what filmmakers I liked were watching, then seeing those films. I learned the technical stuff from books and magazines, and with the new technology you can watch entered movies accompanied by commentary from the director. You can learn more from John Sturges’ audio track on ‘Bad Day at Black Rock’ laserdisc than you can in 4 years of film school. Film school is a complete con, because the information is there if you want it.”


내 가 영화를 배운 방식은 좋아하는 감독들 영화를 발견하고 그걸 보는 것이다. 기술적인 측면은 책이나 잡지를 통해서 배웠다. 새로운 기술에 대해선, 영화에 딸려있는 감독 코멘터리를 참조했다. 영화학교 4년보다  존 스터지스의 '배드 데이 블랙 록' 오디오 코멘터리에서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다. 영화 학교는 완전 사기다. 왜냐면 당신이 필요로 하는 정보는 언제나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3. 시나리오상 감정묘사에 대해 

 

My first job is to be a really great writer to the actors… So many times you see so much description of what the character is supposed to be feeling and stuff, in screenplays, and it’s just a big mistake. It has to be done through dialogue and what they do. Are they gonna walk across the street? Then that’s a character trait, they’re making that decision. And so the scripts that I write for them are very clean of a lot of flowery explanation and what they’re supposed to be thinking… and I think the actors really appreciate that. It lets them do their job and enables them to just act.


내 첫번째 일은 배우들을 위해 정말 훌륭한 작가가 되는 것이다. 정말 많은 시나리오에서, 캐릭터가 이렇게 느껴야한다고 기술해놓은 걸 보게 되는데, 이건 큰 실수다. 감정은 대화나 행동을 통해 설명되야 한다. 그들이 거리를 걷고 있는가? 그럼 그게 그 캐릭터의 특징이다. 그런 결정을 한 거다. 따라서 내가 쓰는 시나리오는 화려한 설명이나 배우들이 뭘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내 생각에 배우들이 그 점을 고맙게 여기는 것 같다. 배우들이 자기 일을 할 수 있게 하고 그저 연기하는 걸 가능케 하니까.  

 



4. 좋은 배우와 나쁜 배우


But actors don’t scare me — you know what scares me? Bad actors scare me. A good actor is like watching a great musician, but having a bad actor terrifies me, because it means I’ve got to find something to say or something to do. And that’s really frustrating, because you want to be concentrating on everything, and instead you find yourself bogged down with helping someone know their lines or not bump into the furniture, and that’s when you want to strangle them. 


배우가 두렵진 않다. 뭐가 두려운지 아나? 나쁜 배우가 두렵다. 좋은 배우는 위대한 음악가를 보는 것 같다. 하지만 나쁜 배우는 겁난다. 왜냐면 뭔가를 말하고 해야한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건 정말 좌절스럽다. 왜냐면 감독은 모든 것에 신경써야 하는데, 이 배우가 대사를 이해하거나 가구에 부딪히지 않게 돕는데 매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정말 배우를 목조르고 싶다. 




5. 만들고 싶은 영화 


I want to make a movie that is true, real and dramatic. 


진실되고, 사실적이고, 드라마틱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 

 



6. 비평

 

How do I respond to criticism? Critically. I listen to all criticism critically. 


내가 어떻게 비평에 응답하냐고? 비판적으로. 난 모든 비평을 비판적으로 듣는다. 




7. 자신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선 

 

You have to be a brat in order to carve out your parameters, and you have to be a monster to anyone who gets in your way. But sometimes it's difficult to know when that's necessary and when you're just being a baby, throwing your rattle from the cage. 


여러분의 기준을 만들어내기 위해선 버르장머리없는 놈이 되야 한다. 당신을 방해하는 사람한테는 괴물이 되야 한다. 하지만 가끔은 언제 그런 게 필요한지, 언제 순순히 아기가 되서 꼬리를 우리 밖으로 내놓을지 알기가 어렵다.  




8. 반항


I'll rebel against powers and principalities, all the time. Always, I will. 


난 언제나 권력과 국가에 반항할 것이다. 언제나 그럴 것이다. 

  



9. 나이듦


As I have got older and become a father, there's less and less time for films.... I didn't have any desire I might have had 10 years ago to shoot every single word that I wrote. 


나이가 들고 아버지가 되면서, 점점 영화를 위한 시간이 줄어든다.... 10년 전에는 내가 쓴 단어 하나라도 그대로 찍고 싶었을 텐데, 이제는 그런 욕망이 없다. 

 



10. 쓰기 

 

I write from my stomach. 


난 배(마음)로부터 글을 쓴다.

 



11. 장면 삭제에 대해 


I don't miss scenes at all the way that I used to miss them when I was younger making a film. It's actually quite fun to get rid of them now. 


현재는 젊어서 영화 만들 때 신들을 놓치듯 신을 놓치진 않는다. 사실 이젠 신들을 삭제하는 게 꽤 재밌다. 

 



12. 직감 


I have a feeling, one of those gut feelings, that I'll make pretty good movies the rest of my life. And maybe I'll make some clunkers, maybe I'll make some winners, but I guess the way that I really feel is that 'Magnolia' is, for better or worse, the best movie I'll ever make, 


난 내가 남은 인생 동안 꽤 좋은 영화들을 만들거라는 어떤 느낌, 직감을 갖고 있다. 아마 실패작도 있고, 성공작도 있겠지만 '매그놀리아'는 내가 만든 최고의 영화가 될 것이다. 

 



13. 스티븐 스필버그 


I watch Steven Spielberg movies, and know. Those are fairly tales. I understand what he does. And I make a film on cancer and frogs - however I want that many spectators nevertheless! I find that is a good goal, and I consider it a weakness of mine that I haven't reached it yet. 


스 티븐 스필버그 영화를 보면, 그게 '동화'임을 안다. 스필버그를 이해한다. 대신 난 암이나 개구리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 하지만 난 많은 관객들이 내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 그게 좋은 목표라고 본다. 거기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게 내 약점이라 생각한다. 

 



14. 영화 관람

 

No matter how many times you do it, you don't get used to the sadness - for me at least - of coming to the end of a film 


몇 번이나 봤더라도, 영화가 끝나가는 슬픔에 (적어도 나는) 적응하지 못하겠다. 




15. 행복에 대해서 


I don't get a sense of American pride. I just get a sense that everyone is here, battling the same thing - that around the world everybody's after the same thing, just some minor piece of happiness each day.


난 미국적 프라이드를 느끼지 않는다. 그저 모든 사람이 같은 것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걸, 전세계 모든 사람들이 같은 것, 매일 약간의 행복을 얻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는 걸 느낄 뿐이다.   




16. Just do it


No, really. Just do it. You have some kind of weird reasons that are okay. 


아니다. 그냥 그걸 해라. 당신은 그걸 해야할 괴상한 이유를 갖고 있는 것뿐이고, 그 이유들은 괜찮다. 

 



17. 영화는 일단 좋아야 

 

Of course, I'm no dummy. But there's a trap you can fall into. If you set out to make a movie about oil and religion I'm not sure you wouldn't crash the car. Fuck! It's a movie first. You have to put on a good show first, I think.


물론 난 바보가 아니다. 하지만 당신이 빠질 수 있는 함정이 있다. 오일과 종교에 관한 영화를 만들더라도, 당신이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퍽! 영화가 먼저다. 먼저 재밌는 영화를 선보여야 한다. (메시지 전달이나 다른 목적을 이루기 전에)

Posted by 木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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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의 따뜻한 축구] 가끔은 그런 독일이 부럽다

출처다음스포츠 | 입력 2014.01.28 18:24 | 수정 2014.01.28 18:26

기사 내용

안톤 휘플러.

우리는 아버지뻘 되는 그를 항상 '토니'라고 불렀다.

토니. 토니는 프랑크푸르트팀 선수들의 장비담당이었다. 우리들의 땀내나는 유니폼들을 빨고 정리하고 축구화의 흙을 털어서 말끔하게 손질해주는 토니는, 말하자면 프랑크푸르트 구단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직원이었다. 언제나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독일 날씨 때문에 운동을 마친 선수들의 유니폼은 깨끗한 날이 아주 드물다. 훈련을 마치면 선수들은 흙 속에서 뒹굴다가 나온 듯한 옷들을 라커 바닥에다 팽개치듯 벗어놓고 샤워실로 달려간다. 토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것들을 주워서 세탁실로 가져갔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35년 전 그때도 토니는 늘 헤브작 웃는 바로 그 얼굴이었다. 처음 프랑크푸르트에 갔을 때 나는 아버지 같은 토니가 내 빨래거리를 정리하는게 영 익숙치가 않아서 한쪽으로 정리를 해두기도 했는데 토니는 그럴 것 없다고 신경쓰지 말라며 이 것은 '내 일!' 이라고 너무나 당당하게 얘기해서 상당히 자극이 되었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은 이렇게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가지는 당사자라야만 얘기할 자격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경기가 있는 날이면 토니는 운동장에 나가서 땅을 만져보고 뛰어보고 문질러 보고...하면서 상태를 완전히 파악한다. 그리고는 선수 하나하나에 맞춰서 축구화 뽕을 박는다.

축구화 바닥을 뿔 창이나 고무창으로 선택해야 하는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앞 뽕과 뒷 뽕이 서로 달라야 하는 선수, 높은 뽕과 낮은 뽕의 쓰임이 다른 날씨. 깔창이 높은선수 낮은걸 좋아하는 선수(심지어는 깔창을 모두 떼어내는 선수도 있다), 또 나처럼 아주 새 축구화보다는 몇 번 신은 축구화를 더 편하다고 하는 선수는 경기날에 맞춰서 적당히 낡은 것으로 아껴뒀다가 챙겨준다.

축구화가 느슨해야 하는지 꼭 끼어야 하는지, 스타킹은 발목이 조이는걸 좋아하는지 나처럼 조금 느슨해야 좋다고 하는지....자칫 시시콜콜하게 넘어갈 듯한 모든 것들이 최고의 경기력을 내야하는 프로선수들을 챙기는 토니로서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이렇게 꼼꼼하고 철저하게 준비한 토니는 각양각색 선수들에게 완벽하게 맞춰서 경기전 캐비넷마다 물품을 가지런히 정리를 해놓고 희열을 느낀다고 했다.

프로다. 프로는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러니 비오는 날씨에 선수가 자꾸 미끄러지면 토니는 억울해서 죽을상을 하며 자존심 상해했다. 그런 경우는 축구화가 날씨랑 맞지 않을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하하하.





토니를 우리는 정말 좋아했다. 당시 프랑크푸르트에는 뮨헨 월드컵을 우승한 국가대표스타들인 그라보브스키랑 휄첸바인, 그리고 니켈을 중심으로 한 핵심 그룹이 있었다. 보통의 선수들은 그들과 어울리는 것이 쉽게 허용되지 않았고 엄두를 내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프랑크푸르트 토박이들이고 축구라는 종목의 힘 때문에 축구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도 그들의 파워는 대단했다. 일거수일투족이 매일매일 언론의 기사감이었기 때문에 프랑크푸르트의 시민들은 선수들의 사생활을 모르는게 없이 꿰고 있었다. 그렇게 조금은 거만한 스타그룹도 나의 존재는 기꺼이 반겨줬다.

74년 뮨헨 월드컵을 우승하고 모든 것을 다 이룬 30대 중반의 노장선수들에게, 말 뛰듯 뛰는 차붐은 자신들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아주 요긴한 존재였을 것이고 골까지 넣어서 승리수당을 두둑히 챙기게 해주는 복 덩어리였으니 말 못하고 촌티가 풀풀나는 것쯤은 별 문제가 안됐던 것 같다.

내가 이발을 하러 가기로 예약이 되었을 때, 이 기라성 같은 멤버들이 점심을 함께 먹고 이발소까지 따라 가서 떠들고 거들며 즐거워 하는 모습들이 대문짝처럼 신문에 걸렸던 걸 기억해 보면 내 존재는 시작부터 꽤[아주?] 중요했었다.

이런 보이지 않는 구분이 엄격했던 팀에서 토니는 항상 우리들의 가장 중요한 멤버였다. 최고의 스타들과 허드렛일을 하는 장비담당이 어쩌면 어울리지 않을 듯 하지만 주말이면 가족들과 모두 모여서 식사를 하러 다닐 때도 토니는 항상 함께였다.

어느덧 하나씩 둘씩 은퇴를 했고 나도 레버쿠젠으로 떠났지만 토니는 항상 거기에 있었다. 토니가 일하는 동안 회장단은 수도 없이 바뀌었고 30명이 넘는 감독들이 그를 거쳐갔다고 했다. 프랑크푸르트팀 최고의 순간에도 있었고 곤두박질쳐서 바닥에 박히는 순간에도 함께 있었던 프랑크푸르트의 역사이기도 하다.

지난번 독일에 갔을 때 토니가 지팡이를 짚고 내 자리로 찾아왔다. '차, 사람들이 너가 왔다고 하길래!!"하면서 그 웃음 그대로를 머금고 나타났다. 하하하, 이 반가움을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그 날은 UEFA 경기가 있던 날이었고 음식과 음료가 무제한 제공되는, 우리들이 이용하는 라운지의 티켓은 하루 저녁에 100만원 정도 한다. 가끔 들르는 나야 항상 라운지를 이용하지만 프랑크푸르트에 사는 내 친구들은 은퇴한지가 20년이 훨씬 넘었는데도 프랑크푸르트구단은 수천만원하는 VIP연간 회원권에 해마다 지정석을 내준다. 그렇게 대접하고 대접받는 모습에 묘한 부러움을 느낄 때가 많다.





물론 우리들은 스타이고 프랑크푸르트 역사는 우리들을 잊을 수 없을 터이니 그렇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허드렛 일을 하던 토니에게도 똑같은 대접을 하는 독일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뿐이다. 나는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프랑크푸르트 회장단이 갑자기 고마워지는 순간이었다.

그 동안 수많은 회장단이 바뀌었지만 누구도 토니의 이름에 줄을 그어버리지 않고 존중해 줬다는 얘기다. 프랑크푸르트 라커에서 냄새나는 것들과 평생을 함께 보낸 그에게 프랑크푸르트가 평생 VIP 대우를 해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 독일이라는 나라가 확 좋아졌다.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날 경기 전 경기장 천정에 매달려있는 전광판에는 흑백 사진이 한 장 떴다. 며칠 전 세상을 뜬 87세의 KURTL의 추모사진이었다. 아직 프로가 없던 시절 직업이 경찰이었던 그는 당시 프랑크푸르트에서 가장 사랑받는 경찰 축구선수였다고 한다. 하지만 나도 아주 드물게 운동장에서 악수를 했던 기억밖에 없는 그를 운동장에 모인 젊은 친구들이 기억하고 알리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큰소리로 그를 향해 감사의 노래를 불렀다. 지붕이 덮힌 운동장을 울리는 관중들의 노래는 축구가 인생의 전부인 나에게 참 많은 것을 느끼게 했다.

가끔 지나간 것은 과장되게 아름답게 기억될 때도 있다. 그러면 좀 어떤가?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를 아름답게 기억하고 고마운 마음을 갖는 것은 아름답게 살아야 할 가치를 인정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표시가 아닐까. 그래서 독일이라는 사회가 가능한 많은 것들을 기억하고 고마워하도록 가르치는 게 아닌가 싶다.

차붐을 독일에서 아직도 기억하는 것 역시 이런 이유의 과장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을 우리 식 잣대를 들이대다 보니 엄청나게 대단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한마디로 내가 대단한게 아니라 그렇게 기억하려고 애쓰는 독일사회가 대단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토니를 기억하는 독일, 정말 훌륭하다고.



[차범근의 따뜻한 축구] 나의 '베프' 차두리는 짠돌이 (영상)

출처풋볼리스트 | 입력 2014.02.21 16:01 | 수정 2014.02.21 17:54

기사 내용

두리는 엄마한테 매주 10만원씩 생활비를 낸다.
혼자쓰기에는 너무 넓다고 할만큼 큰 새 집을 통으로 쓰면서 빨래 청소 식사까지 해결해준다.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되게 저렴한 하숙비다.





그런데 두리는 기회만 있으면 이 돈을 떼어 먹는다.
그러고는 엄마랑 싸운다.
얼마전 두리가 장기간 합숙을 나갔다가 돌아왔다.
괌에서 한 달, 그리고 일본에서 3주 정도였으니 꽤 오랫만에 온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내랑 두리의 계산이 상당히 복잡해진다.
거기다 두리가 기르는 고양이 두 마리의 밥도 안 사놓고 합숙을 가버려서, 밤중에 고양이 밥 사러 돌아다니느라 돈을 썼으니 계산은 더 꼬이고 복잡해졌다.

그동안 밀린 액수가 만만치 않았던지 두리는 청소를 한 달에 한 번만 해주고 한달에 10만원만 받으라 짜증이고, 엄마는 전기 수도 난방비가 얼만지 아냐고 목소리를 높인다.
결국 두리가 없는 동안의 생활비를 모두 탕감해주는 대신, 앞으로 매주 10만원씩만큼은 절대 떼어먹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면서 신경전이 끝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생활비 10만원를 내는 날이면 두리 지갑에는 왜 7만원이나 8만원밖에 없는 것일까?
식탁앞에서 벌이는 복잡한 돈 계산을 지켜보는 나는 항상 궁금했다. 이게 전부라며 7만원이나 8만원을 내놓고는 "내일 은행에서 찾아다 드릴게요!"하면서 넘어간다.
아내는 "너 그렇게 말해놓고 언제 갖다 준 적 있었어?" 하고 따지지만 나머지 돈을 받는 것은 나도 단 한번 본 적이 없다. 돈도 잘버는 놈이 좀 그렇다.

합숙을 다녀와서 모처럼 저녁을 먹게 되어 있던 지난 수요일 저녁에는 '돈을 아껴쓰라!'는, 엄마로부터 늘 듣는 잔소리가 예약되어있는 타이밍인데 그날 오후에 대표선수 명단이 발표되었다.
일순간 온 가족이 조용해 졌다. 생활처럼 사건사고를 달고 다니는 우리집 막내의 예리한 분석에 의하면 정말 심각한 상황이 닥치면 엄마가 싸늘하게 말이 없어진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다. 그날 이후 말이 없다.

어제 저녁 밥을 먹는데 두리가 훈련을 마치고 왔다. "축하한다!"고 악수를 해줬지만 나도 딱히 할 말은 없었다.
한마디로는 얘기하기 쉽지 않은 복잡한 마음이었다.

선발이 됐는데도 아무 소리가 없는 것이 신경쓰였는지 두리가 문자를 보냈다.
"아빠도 엄마도 기쁘셔요?"
그냥 기쁘다고 하기에는 뭔가 걱정스럽다.
그렇다고 걱정스러운 마음을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기에는 두리도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어른이다.
그래서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우리 사위한테서도 아무런 연락이 없다.
이미 십 년이 넘게 우리집 식구가 되었으니 지금 이 일이 우리한테 전화해서 축하해 줄 상황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는 얘기다.
어쩌면 본인도 우리와 같은 심정일 것이다.
뭔가 조금은 난감하고 부담스럽고 걱정스러운.
그러면서도 대견하고 두리가 고마운......

두리는 꼭 대표선수를 하고 싶어했다. 정말로 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한결같이 참 열심히 하는 것 같았다.
그 마음을 나도 아내도 그리고 우리 가족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물론 두리가 축구를 얼마나 좋아하는 지도 알고 있다.
더러 선배들이 두리한테 농담처럼 얘기한다고 했다. "야, 너는 이 힘든 운동을 왜 하냐?"고.
아마도 '부자 아빠가 있는데...'라는 뜻인 것 같다.





보기에 따라 두리는 아주 뛰어난 선수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축구를 잘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절실하다.
사람들은 갖가지 시선으로 두리를 바라보고 있다.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도 있고 미워하고 한심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내가 아빠로서 가장 고마운 것은 반듯한 축구선수, 열심히 인생을 사는 모범적인 인간이고 싶어하면서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가다듬으면서 사는 성숙함이다. 그런 삶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동안 두리는 차범근의 아들이라서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았다.
그런 보이지 않는 힘은 두리에게 자신감과 여유로운 마음을 가질수 있게해주기도 했다. 그래서 두리를 좋아해주는 많은 사람들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빡빡하게 인생을 사는 아빠때문에 두리는 축구를 하면서 참 많은 상처를 받고 또 불이익을 받기도 했다.
98년 월드컵을 겪을때에는 이미 정해졌던 대학을 못갈 뻔 하기도 했다.
중국에 있던 내가 소문을 듣고 부랴부랴 들어왔더니 정말 두리의 이름이 입학예정자 명단에 없었다. 누군가 한국축구에 발을 못붙이게 해야한다고 했다더니 정말이었다.
아빠로서 가장 마음아팠던 시기였다.

반대로 나는 두리때문에 상처를 받거나 욕을 먹어본 기억이 단 한 번도 없다.
스타의 아들로 풍요롭고 보호를 받으면서 자랐지만 두리는 아버지인 내가 손가락질을 받을만한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었다. 상황이 두리를 어렵게 몰고 가도 두리는 나이보다 지혜롭게 그것들을 극복해나갔다.

지난 남아공 월드컵때 16강 경기를 마치고 두리는 전세계에 중계되는 카메라 앞에서 정말 펑펑 울었다. 지금도 우리 가족들만 두리가 왜 그토록 서럽게 울었는지 알고 있을 뿐이다. 두리에게는 참 힘든 월드컵이었고 고맙게도 팬들은 두리를 진심으로 지켜줬다. 그 때 두리도 오범석이도 그 나이 아이들이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상처를 입었다. 그러니 어린애에 불과한 오범석이가 받을 상처 역시 두리나 나에게는 쉽지 않았다. 역지사지. 두리는 오범석이를 위로하고 걱정했다. 월드컵 후에도 서로 문자를 주고받는 걸 보니 둘 다 좋은 녀석들이다.

그런데 두리가 다시 그 길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족들은 축하해야 할 일인데도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모든 것은 내 탓이다. 이런 기억들을 더듬다 보면 두리에게 빚을 지고있는 나를 확인하곤한다.
그래서 두리를 보면 늘 마음이 쏴--!하다.
나처럼 빡빡하게 살지 않아도 정직하고 반듯하게 살수 있다는 것도 두리를 보면서 배웠다.

지난해 환갑을 앞두고 여기저기서 책을 내자고 연락이 왔다.
'나의 인생의 기둥이 되어주었던 60명'을 기억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잠시 해 본적이 있다.
내 인생 최고의 친구는 누굴까?
며칠을 생각했다.
결론은 두리였다.
물론 두리의 베프는 차범근이 아닐 것이다. 하하하.

이제 두리는 겁많고 착하기만 했던 아들이 아닌 내가 의지하는 존재로 컸다. 내 인생의 축복이다.
언제든지 내 편이 되어주고 끊임없이 나를 이해해주며 항상 나의 이상과 삶을 불평없이 지지해주는 아들이다.

차두리!
나의 베프 차두리 화이팅이다!

그리고 대표팀 수당받으면 엄마 생활비도 좀 올려드려라.
10만원이 뭐냐? 아, 짜다!

[차붐TV] 어느 부자의 흔한(?) 축구 토크(영상)


Posted by 木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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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입대 석 달 만에 20kg 강제 감량... 결국 사망"

[오마이뉴스 고상만 기자]

2011년 3월 11일 오후 3시 46분께였습니다. 군에 입대한 지 갓 70일을 넘긴 육군 이등병이 자대에서 첫 사격훈련을 하던 날이었습니다. 한 발, 한 발, 사격통제관으로부터 사격 지시를 받은 군인들의 총구에서 일제히 화염이 치솟았습니다. 당시 22세였던 손형주 이병 역시 사격훈련을 하던 사병 중 한 명이었습니다.

서른 번째 사격이 끝나고 이어 서른한 발째 사격이 이뤄지던 순간이었습니다. 갑자기 땅에 엎드려 사격 중이던 손형주 이병이 몸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누가 말릴 틈도 없었던 그때, 한 발의 총성이 허공을 갈랐습니다. 손형주 이병. 그가 서른한 발째 방아쇠를 당긴 곳은 표적지가 아닌 자신의 이마였습니다. 충격을 던진 손형주 이병 사망사건은 왜 일어난 것일까요. 그 가슴 아픈 진실을 고발합니다.

과학고 수재였던 손 이병은 왜 이마에 총을 쐈을까

2013년 12월 말이었습니다.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인 민주당 김광진 의원실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부산에 거주하는 고 손형주 이병의 어머니였습니다. 의원실에서 보좌관으로 일하는 제가 "어쩐 일이시냐"고 묻자 진한 눈물이 담긴 어머니 답변이 이어졌습니다.

"보좌관님. 너무 답답해서 전화했어요. 제 아들 형주가 군에서 죽은 지 올해로 3년째인데 또 그냥 지나가서요. 육군본부가 형주 순직 여부에 대해 올해는 꼭 심사하겠다고 약속하고도 아무 연락이 없으니 너무 고통스러워요. 왜 이렇게 약속을 어기는지…. 좀 도와주세요."

사연은 이렇습니다. 2011년 1월 3일, 그해 새해 연휴가 끝난 다음 날, 아들 손형주씨가 입대했습니다. 형주씨는 어려서부터 집안의 자랑이었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수재 소리를 듣던 아들은 학창시절 내내 1, 2등을 놓치지 않았고 부산 국제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후 서울의 한 대학에 진학해 2학년을 마친 후 의무복무를 마치고자 입대를 결정했습니다. 어머니는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고 말합니다. 

사실 손형주 이병에게는 매우 심각한 신체적 약점이 있었습니다. 이는 손 이병 사망 후 진행된 군 헌병대 조사에서도 확인된 사실입니다. 먼저 눈에 띈 문제는 손 이병의 과체중이었습니다. 손 이병은 키 174cm에 몸무게가 103kg가 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같은 손 이병의 신체적 조건을 대하는 군 당국의 방식은 매우 가혹했습니다. 손 이병의 과체중을 줄인다며 취한 조치가 문제였던 것입니다. 손 이병은 운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동적인 활동보다는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정적인 분위기에 더 익숙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군은 대상자의 신체적 조건에 맞는 어떤 프로그램을 통해 체계적인 체중 감량을 시도한 게 아니라 손 이병에게 '무작정 매일 뛰도록' 지시했습니다. 매일 6km씩 달리도록 했고, 이어 팔굽혀 펴기를 하라고 강제했습니다. 다른 일반 군인처럼 3km만 달려도 힘들 수밖에 없는 손 이병에게 지휘관은 오히려 살을 더 빨리 빼라며 그 두 배를 뛰라고 한 것입니다.

의도야 좋았을지 모르겠으나 당사자인 손 이병에게 이 모든 과정은 '극심한 고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손 이병이 겪은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확인하는 증언이 있었습니다. 이는 손 이병 사망 후 동료 군인들이 군 헌병대에 써준 진술서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손형주 이병은 군대에 들어와서 기초적인 근력이라든지 지구력이 다른 일반 사람들에 비해 약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과 같이 운동을 하면 항상 뒤처지곤 해서 점호 시간이나 체력 단련시간에 남들 다하는 팔굽혀 펴기도 잘 못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은 다 하는 것인데 손형주 이병의 경우 무척 힘들어 하는 것을 봤습니다."

입대 3개월 만에 20kg 체중 감량... 그건 가혹행위

▲  손 이병은 입대 후 14일 만에 몸무게가 13kg이나 급격히 빠졌다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가능할 수 없는 감량입니다.
ⓒ sxc
군 헌병대 조사 결과에 따르면 손 이병이 입대한 날로부터 사망 전일까지 복무한 시간은 총 3개월 6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기간 동안 손 이병의 몸무게는 20kg 감량됐습니다. 
특히 입대 후 14일 만에 몸무게가 13kg이나 급격히 빠졌다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가능할 수 없는 감량입니다. 군 헌병대 조사 결과에서도 이같은 몸무게 감량은 정상적인 다이어트 결과가 아니라 사실상의 '가혹행위'였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가혹행위 외에도 손 이병이 목숨을 끊게 된 데는 또 다른 배경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격 훈련이었습니다. 손 이병에게 있어 사격은 잘하고 싶어도 잘할 수 없는 '사실상 불가능한' 영역이었습니다. 손 이병의 시력이 사격 표적지 자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빴기 때문입니다. 

손 이병이 사망한 후 군 헌병대는 사격장에서 부서진 안경알을 수거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안경점에 가서 측정한 결과 손 이병의 좌·우측 시력 모두 교정 전 0.1 미만의 근시와 난시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실제로 손 이병 사망 후 발견된 사격훈련 수첩에는 '250m (표적지) 안 보임'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군부대 측은 손 이병에게 '사격 성적이 좋지 않다'며 '사격 저조자'로 선정, 이에 따른 얼차려 등을 가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 놀라운 사실은 손 이병이 신병교육을 받은 부대의 소대장이 <병영생활 기록>에 써놓은 내용에 담겨 있었습니다. 손 이병의 사격 성적이 저조했던 이유가 나쁜 시력 때문만 아니라 손 이병의 수전증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즉, 군 당국은 표적지 자체가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사격 시 손이 떨리는 수전증을 가진 손 이병에게 현역병 입대 조치를 했고, 이후 사격 성적이 좋지 않다며 이를 이유로 매번 얼차려 등의 조치를 해왔던 것입니다. 

결국 손 이병은 이런 이유들 때문에 자신의 이마를 향해 서른한 발째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혹자들은 '그 정도 이유로 왜 죽느냐'고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손 이병 입장에서는 자신이 겪는 모든 일들은 너무나 끔찍한 악몽이었을 것입니다. 

군 입대 전까지 손 이병은 그 누구에게도 '바보 취급'을 받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늘 자랑스러운 존재였으며 많은 이들로부터 한결같은 기대만 받았던 청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군 입대후 손 이병은 '바보'가 됐습니다. 흔한 말로 '고문관' 취급을 받으며 매일 얼차려나 받는 한심한 존재로 모멸감을 느껴야 했습니다. 

눈이 나쁜데도, 손이 떨리는 증세가 있는데도, 대한민국 병무청은 손 이병에게 현역 3급을 판정했습니다. 그리고 국방부는 입대한 손 이병에게 '뚱뚱하니 살을 빼라'며 매일 뛰라고 했고 팔굽혀 펴기를 강요했습니다. 그러면서 '많이 먹으면 살이 잘 안 빠진다'며 배식량도 조절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달리기 양을 두 배로 늘렸습니다. 손 이병이 매일 허기짐을 느끼는 데도 말입니다.

손 이병 사망 후 유족들은 군 헌병대에 진정서를 제출했습니다. 사망한 손 이병의 팔·다리에서 크고 작은 적자색 상처가 많이 발견됐습니다. 유족들은 이것이 가혹행위에 의한 상처인지를 조사해 달라고 했습니다. 군대에서 흔히 가해지는 '조인트 걷어차기'(워커발로 정강이 걷어차기) 상처가 아니냐는 의혹이었습니다. 그러자 군은 사실이 아니라며 상처가 난 이유를 해명했습니다. 그런데 군의 그 해명이 유족의 가슴을 또다시 찢어놨습니다. 

군 헌병대는 조사 결과 손 이병의 몸에 난 상처는 얼차려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즉, 사격을 못해 '사격 저조자'로 선정된 손 이병에게 지휘관이 얼차려를 줬는데 이 과정에서 체중이 많이 나가는 손 이병의 몸이 연병장에 튀어나온 돌 등에 부딪히면서 발생한 상처라는 것이었습니다. 군 헌병대 말처럼 과연 그렇게 부딪혔다고 해서 정말 그런 상처가 심하게 날 수 있는지 의문이지만, 헌병대의 해명만으로도 어머니의 심정은 말할 수 없는 비통함에 빠졌습니다. 

"보이지도 않는 걸 어떻게 맞힌단 말입니까. 이걸 못한다고 그 겨울에 입술이 부르트도록 달리게 하고 밥도 조금밖에 안 줬다고 합니다. 얼마나 '엎드려 뻗쳐'를 시켰으면 아이 몸이 그렇게 상처투성이랍니까. 억울합니다. 정말 억울합니다."

어머니의 울부짖음을 들으며 저 역시 분하고 억울했습니다. 왜 그래야 했습니까. 이게 정말 자살입니까.

"넌 사격하지 마"... 지휘관의 모멸과 조롱 

"그날 OO중대장이 형주한테 '넌 (자대배치 후) 사격해본 적 없으니 대충 쏴 버려'라고 비아냥거리듯 말하고 사격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사격이 끝난 후 OO중대장이 형주에게 '너는 더 이상 사격하지 마라'며 놀리듯 얘기했었습니다."(손 이병 사망후 동료 사병이 쓴 헌병대 진술서 일부)

손 이병이 죽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자신을 '바보' '고문관'으로 취급하는 지휘관의 모멸과 조롱 끝에 손 이병은 선택해서는 안 될 비극을 택했습니다. 실제로 지난해 군 헌병대가 유족에게 회신한 '민원 재조사 결과'에서도 이는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군 헌병대는 "소속 부대 지휘관들이 고인의 신체적인 면을 고려하지 않고 무리한 체력 단련을 요구하고, 비정상적인 사격 훈련과 내무 생활의 관리 소홀 등으로 육체적·정신적 스트레스가 가중됐다"고 하면서 손 이병에 대해 "정신과적 분석 결과에서도 무리한 체중 감량으로 인한 심한 스트레스와 사격 저조자로 선정되는 등으로 인한 심한 자괴감"이 사망 원인이라고 밝혔습니다. 

손 이병이 죽음에 이르게 된 과정을 알게 되며 저는 뜬금 없지만 '돌'을 떠올렸습니다. 하다 못해 저 하찮은 길가의 돌조차도 제각각 자기 특성에 맞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돌은 계단 대리석으로, 어떤 돌은 담장을 쌓거나 마당에 까는 자갈로 쓰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 군인은 '돌'보다도 못한 듯합니다. 뚱뚱하든 말랐든, 시력이 좋든 안 좋든, 수전증이 있든 말든 사격 훈련을 해야 하고, 못하면 얼차려와 망신을 주며, '고문관' 또는 '바보' 취급을 당합니다. 지난해 뇌종양을 앓던 신성민 상병의 사망 역시 그랬습니다. 군은 두통약이나 주며 꾀병이라고 치부했습니다. 그러다가 신 상병이 결국 사망하자 "군 입대 전부터 가지고 있던 병으로 신 상병이 죽었는데 왜 우리에게 책임을 따지냐"며 내심 억울해 했습니다.

군의 이런 태도를 너무 많이 보게 됩니다. "당신들이 나약하게 키워 남들 다하는 군 복무를 못 견디고 스스로 죽은 것인데, 왜 잘못도 없는 우리 군에게 그 책임을 묻느냐"며 오히려 당당합니다. 그런 시각으로 보면 군인은 사람도 아닙니다. 그저 한해 평균 27만 명씩 입대하는 '군인'일 뿐입니다. 

너무 심한 표현 아니냐고요? 그러면 묻겠습니다. 대한민국 육군 사병이 사망할 경우 그 시신을 담당하는 부서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장의과? 영령과? 모두 아닙니다. 다름 아닌 '군수참모부 물자과'입니다. 부모가 억울한 아들의 죽음에 항의하고자 시신 인수를 거부하면 그 아들의 시신을 육군이 관리하게 되는데, 군은 그 시신을 물자로 취급합니다. 

이 어처구니없는 사실을 알게 된 뒤 민주당 김광진 의원이 지난 2013년 국정감사에서 이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국방부장관과 육군참모총장에게 적어도 '이건 아니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해군이나 공군처럼 육군 역시 최소한 '인사과'가 사망한 군인의 시신을 관리하거나 아니면 예우에 맞게 '영현 관리과' 등을 신설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해가 바뀐 지금까지도 이에 대한 답은 없습니다. 이런 군대 인권, 정말 끔찍합니다.

손형주 이병 순직 처리 여부, 2월 12일 결정

어머니의 전화를 통해 기막힌 사연을 알게 된 뒤 바로 군 당국에 항의했습니다. 군 헌병대 조사에서도 여러 억울한 사실이 확인됐는데, 왜 이처럼 순직 처리 여부에 대한 심사가 미뤄지느냐며 따졌습니다. 2011년 3월에 사망했으니 벌써 내달이면 만 3년이 다 돼가는 이 일을 도대체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유족들의 심정을 생각한다면 이는 또 다른 고문입니다. 

지난 2월 초, 마침내 군 관계 부서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오는 12일 손형주 이병에 대한 순직 여부 심사가 잡혔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손 이병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 어머니가 기뻐했을까요. 아닙니다. 그토록 기대했던 순직 여부 심사 예정일을 듣자 어머니의 음성은 떨리고 불안해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만 3년 만에 잡힌 순직 여부 심사에서 손 이병의 죽음에 대해 군 당국이 자살이라며 '순직 기각' 결정을 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손형주 이병과 같은 억울한 군인의 죽음은 사실 너무나 많습니다. 매년 150여 명의 군인이 사망하는데, 2012년 기준으로 보면 그중 97명의 군인이 자살로 처리됐습니다. 그런데 이들 죽음에 대해 육군 심사 기준은 이해하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손형주 이병처럼 견딜 수 없는 가혹한 조건에서 절망으로 무너지면 육군은 자살이라며 기각 결정을 내리고 있습니다. 해군이나 공군은 순직 범위를 상대적으로 넓게 인정하지만 육군은 매우 강경한 입장입니다. 

그래서 많이 불안합니다. 기도해주십시오. 손형주 이병의 억울한 죽음이 짓밟히지 않도록 함께해주십시오. 누군가의 눈에는 보잘 것 없는 군인의 죽음일지 모르겠으나 손 이병의 어머니에게는 귀한 아들이었습니다. 국가가 그런 아들의 명예조차 책임지지 않는 것은 너무나도 억울한 일입니다. 그 아들을 살려 부모에게 돌려보내지 못했다면 그 아들의 명예라도 보장해줘야 정당한 것 아닐까요. 

국가가 잘못했다고 말해야 합니다. 손 이병에게 죽음보다 더 한 좌절감과 절망을 안겨줬고 끝내 자신의 이마를 향해 서른한 발째 방아쇠를 당기는 모진 마음을 갖게 한 국가의 관리 책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공부 잘하고 착했던 내 아들이 왜 이렇게 죽어야 하느냐"며 매일 밤 고통으로 울부짖는 어머니에게 국가가 "지켜드리지 못해 미안하다"며 좌절된 젊은 넋을 품어줘야 합니다. 

고 손형주 이병의 넋을 추모하며, 12일 예정된 심사에서 부디 그의 죽음이 '순직'으로 결정되기를 염원합니다. 함께해주십시오.


Posted by 木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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