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크시, Banksy

예술 스크랩 2012. 9. 24. 02:28

도시의 벽을 캔버스 삼아...제도권 예술의 벽 허물다

1.『뱅크시, 월 앤 피스』(뱅크시, 위즈덤 피플, 2009)
월가의 탐욕을 규탄하는 ‘좀비’들의 행진은 정치적인 시위가 현대미술적인 퍼포먼스로 대치된 흥미로운 현상이었다. 촌철살인의 구호와 익살스러운 포스터들, 별 대신 기업의 로고가 들어간 성조기, 녹아내려 붕괴하고 마는 ECONOMY라는 얼음 글자조각 등 재기 발랄한 시위도구들이 등장했다. 

1968년 학생혁명의 패배 이후 ‘전략’이라는 군사용어가 문화 활동에 적용되기 시작하면서 정치투쟁은 예술투쟁으로 대체됐다. 기성의 제도 자체보다는 그것을 움직이는 관념을 전복, 해체하는 것이 주 목표가 되었다. 더불어 기성문화를 대체할 수 있는 서브 컬처의 능동적인 힘이 주목받았다. 낙서화의 등장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생산성이 떨어지던 80년대 미국 미술에 낙서화가 장 미셸 바스키아의 등장은 새로운 돌파구처럼 보였다. 안타깝게도 이 ‘검은 피카소’는 제도권에 화려한 진입을 마친 순간 죽었다. 88년, 28세였다. 그가 살았다면 어떤 작업을 이어갔을까 하는 궁금증만 남기고. 

2000년대가 들어서면서 새로운 스타급 낙서화가가 등장했다. 그의 얼굴은 본 적이 없지만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이미 많이 보았다. 화염병 대신 꽃다발을 던지는 시위대, 벽에 기대서 실례를 하는 근엄한 영국 왕실근위병, 다이애나비 얼굴이 들어간 10파운드 화폐가 쏟아지는 현금지급기 등이 그의 작품이다. 그는 상식과 도덕이 지배하던 공간을 다른 이름으로 탈바꿈시킨다. 쓰레기통 주변에는 ‘피크닉 지역으로 지정됨’, 트라팔가 광장에는 ‘폭동지역으로 지정됨’이라는 푯말을 붙인다. 주류적인 공간 인식을 전복시키는 것이다. 분장을 하고 유명 미술관에 몰래 들어가 자기 그림을 슬쩍 걸어놓고 나오기도 한다. 뉴욕 MoMA에는 싸구려 할인 깡통 수프를 그린 그의 작품이 6일 동안 전시됐다. 돌에 유성펜으로 낙서를 한 원시시대 그림 같은 작품은 대영박물관에 8일 동안 전시되고 결국 그곳에 영구 소장됐다. 이 얼굴 없는 화가의 이름은 뱅크시(Banksy·37)다. 

최근에 그는 영화를 만들었다. ‘선물 가게를 지나서 출구(Exit through gift shop)’라는 긴 제목은 전시 관람 이후 기프트 숍을 지나야 출구로 연결되는 미술관의 구조가 현대미술의 상업적인 구조를 연상시킨다는 의미에서 붙여졌다. 현대미술에 관한 블랙유머 같은 영화는 정확하게는 ‘뱅크시 상황’을 다루고 있다. 내가 말하는 뱅크시 상황이란 비상업적일수록 열광하고, 벽에 그림을 그리면 벽째 떼어다 팔아버리는 놀라운 현대미술의 상업적 시스템에 직면한 비상업적 미술가의 처지를 의미한다. 

뱅크시는 거리의 예술가다. 허가받지 않은 도시의 빈 벽에 몰래 낙서를 한다. 어쨌든 낙서화는 불법이므로 그는 경찰의 체포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제 그의 낙서화들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관광상품이 되었다. 구글에서는 뱅크시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런던의 거리를 친절하게 안내하는 지도를 찾을 수 있다. 집주인들은 그의 낙서를 지우는 대신 투명 플라스틱 액자를 둘러 보호한다. 노출이 적을수록 호기심을 자극하고 주목을 받는 법. 영화 ‘선물 가게를 지나서 출구’에서도 낙서화가의 비합법성은 스타가 되는 지름길처럼 이용된다. 

2.뱅크시가 만든 영화 ‘선물가게를 지나서 출구’의 한 장면.두건을 쓰고 있는 사람이 뱅크시다. 이 영화는 스폰지하우스 광화문에서 9일 오전 11시와 오후 6시30분에 볼 수 있다. 사진 배급사 조제 제공

아이로니컬하게도 낙서화의 역사는 미술의 상업화와 관련이 있다. 1대 낙서화가 바스키아가 등장했던 80년대는 컬렉터들의 영향력이 본격화되던 시점이었다. 이들은 이전의 후원자들처럼 뒷짐을 지고 점잖게 미술관을 지원하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직접 갤러리를 찾아다니며 적극적으로 작품을 사들였다. 진보적이면서 동시에 보수적이었다. 흑인이 그린 낙서화라는 새로운 장르의 선택은 분명 진보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비디오·설치 미술 같은 새로운 매체가 아니라 벽에 그려진 것일지라도 그림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보수적이다. 벽에 그린 그림은 벽째 사버리면 된다. 낙서화는 상업미술과는 무관하게 시작했지만, 결국 소수의 돈 많은 백만장자의 수집품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지금까지 뱅크시는 잘 해 왔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부터다. 그도 어마어마한 식욕을 자랑하는 미술계의 상업적 시스템에서 각광받는 스타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홈페이지(www.banksy.co.uk)를 통해 전 세계에 작품을 알린다. 2006년에는 LA에서 성공적인 전시를 했다. 이 전시에서 가수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와 영화배우 앤젤리나 졸리가 그의 작품을 구매했다고 한다. 경매에서는 그의 작품은 2008년에 최고가 170만 달러에 팔렸다. ‘선물 가게를 지나서 출구’는 그가 현대미술의 구조를 영악하게 꿰뚫어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습을 보이지 않을수록 자신의 상품가치가 높아진다는 것, 또 허접하지 않게 효과적으로 모습을 슬쩍 드러내는 방법도 알고 있는 것 같다. 

그가 예술가로 오래 사는 방법은 바스키아를 롤모델로 삼지 않는 것이다. 그의 롤모델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 바스키아의 낙서화는 집단이 아니라 개인의 이야기를 전한다. 반면 뱅크시는 좀 더 나아갔다. 평화운동·환경운동과 관련 있는 사회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그에게 벽을 제공한 것은 도시에 빽빽한 건물을 지은 기성세대이며, 벽을 메시지 전달 수단이라고 가르친 것은 광고들이다. 기성세대가 지은 건물벽에 상품을 선전하는 자본주의적인 광고 대신 뱅크시류의 반자본주의적·평화운동적인 광고가 등장한 것이다. 기성미술에서는 없는 발상의 유쾌함과 표현의 신선함이 그에게 열광하는 이유다. 이를 유지하기 위해 그가 해야 할 일은 단순하다. 비주류의 순수성, ‘초심’을 지키는 것이다. 

『뱅크시, 월 앤 피스』(뱅크시, 위즈덤 피플, 2009)는 내가 지금까지 리뷰를 쓴 책 중 글자가 가장 적다. 정확하게는 뱅크시의 작품집이며 그의 단상이 조금 곁들어져 있는 책이다. 2005년까지의 작품이 수록돼 있다. 그가 던지는 블랙유머에 절로 즐거워진다. 뱅크시의 그림이 즐겁지 않다면 스스로를 한물간 세대라고 조금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조금 웃어야 한다. 알랭 드 보통은 “이해할 수 없는 대상 앞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세련된 자세는 웃는 것”이라고 했다. 한때 새로웠던 것이 낡은 것이 되는 일은 자연의 섭리이자 역사의 섭리다. 낡은 것은 웃으며 새로운 것에게 길을 양보하고 그 상황을 즐기는 도리밖에 없다. 원치 않는 나이를 자꾸 먹으며 조금씩 낡아가는 나의 눈에 날아와 박힌 뱅크시의 낙서. “나이를 먹는다고 대화의 질이 더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이진숙씨는 러시아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고 미술 작품에서 느낀 감동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다『. 미술의 빅뱅』의 저자.

이진숙 kmedich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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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벌이의 지겨움

아! 밥벌이의 지겨움!! 우리는 다들 끌어안고 울고 싶다. 배터리가 다 떨어지면 핸드폰은 꼬르륵 소리를 내면서 죽는다. 핸드폰이 죽는 소리는 가볍고 하찮다. 핸드폰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핸드폰이 죽을 때 내는 이 꼬르륵 소리는 대선사들의 오도송(悟道頌)보다도 더 절박하게 삶의 하찮음을 일깨운다. 핸드폰이 꼬르륵 죽어버리면 나는 이 세계와 단절된다. 거리에서, 핸드폰이 꼬르륵 죽어버리면, 나는 문득 이제 그만 살고 싶어진다. 내가 이 세상과 단절되는 소리가 이처럼 사소하다니, 꼬르륵......
 
모든 ‘먹는다’는 동작에는 비애가 있다. 모든 포유류는 어금니로 음식물을 으깨어 먹게 되어 있다. 지하철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자장면을 먹는 걸인의 동작과 고급 레스토랑에서 에이프런을 두르고 거위 간을 먹는 귀부인의 동작은 같다. 그래서 밥의 질감은 운명과도 같은 정서를 형성한다.
 
전 기밥통 속에서 밥이 익어가는 그 평화롭고 비린 향기에 나는 한평생 목이 메었다. 이 비애가 가족들을 한 울타리 안으로 불러 모으고 사람들은 거리로 내몰아 밥을 벌게 한다.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두 끼를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이것이 밥이다. 이것이 진저리나는 밥이라는 것이다.
 
밥벌이도 힘들지만, 벌어놓은 밥을 넘기기도 그에 못지않게 힘들다. 술이 덜 깬 아침에, 골은 깨어지고 속은 뒤집히는데, 다시 거리로 나아가기 위해 김나는 밥을 마주하고 있으면 밥의 슬픔은 절정을 이룬다. 이것을 넘겨야 다시 이것을 벌 수 있는데, 속이 쓰려서 이것을 넘길 수가 없다. 이것을 벌기위해서 이것을 넘길 수가 없도록 몸을 구부려야 한다면 대체 나는 왜 이것을 필사적으로 벌어야 하는가. 그러니 이것을 어찌하면 좋은가. 대책이 없는 것이다.
 
모든 밥벌이에는 낚시 바늘이 들어있다. 밥을 삼킬 때 우리는 낚시 바늘을 함께 삼킨다. 그래서 아가미가 꿰어져 밥 쪽으로 끌려간다. 저쪽 물가에 낚싯대를 들고 앉아서 나를 건져올리는 자가 누구인가. 그 자가 바로 나다. 이러니 빼도박도 못하고 오도가도 못한다. 밥 쪽으로 끌려가야만 또 다시 밥을 벌 수가 있다.
 
예수님이 인간의 밥벌이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을 나는 새를 보라. 씨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거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먹이시느니라.”라고 하셨다지만 나는 이 말을 믿지 못한다. 하나님이 새는 맨입에 먹여주실지 몰라도 인간은 맨입에 먹여주시지는 않는다.
 
봄에, 새잎 돋는 나무를 바라보면서 나는 늘 마음이 아팠다. 나무들은 이파리에 엽록소가 박혀 있어서 씨 뿌리지 않고 거두지도 않으면서 햇빛과 물을 합쳐서 밥을 빚어낸다. 자신의 생명 속에서 스스로 밥을 빚어내는 나무는 얼마나 복 받은 존재인가. 사람의 밥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굴러다닌다. 그래서 내 밥과 너의 밥이 뒤엉켜 있다. 핸드폰이 필요한 것이다. 엽록소가 없기 때문에 핸드폰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다들 핸드폰을 하나씩 차고 거리로 나아간다.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이 글을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밥벌이는 밑도 끝도 없다. 그러니 이 글에는 결론이 없어도 좋을 것이다. 나는 근로를 신성하다고 우겨대면서 자꾸만 사람들을 열심히 일하라고 몰아대는 이 근로감독관들의 세계를 증오한다. 나는 이른바 3D 업종으로부터 스스로 도망쳐서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인간들의 저 현명한 자기방어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근로감독관들아, 제발 인간을 향해서 열심히 일하라고 조져대지 말아 달라. 제발 이제는 좀 쉬라고 말해 달라. 이미 곤죽이 되도록 열심히 했다. 나는 밥벌이를 지겨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싶다. 친구들아,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각자 핸드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가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 - 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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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ㆍ특집
‘여의도 칼부림’ 김씨, “마지막은 악역으로…”

서울 중심가에서 칼부림 사건이 일어났다. 무엇이 그를 분노하게 만든 걸까. 사건 당시 실업자였던 그는 비정규직을 전전하며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세상에 대한 분노를 전 직장 동료에게 푼 것이다.

기사입력시간 [260호] 2012.09.13  09:28:19 송지혜 기자 | song@sisain.co.kr  



고시원 건물 입구에서 계단 열다섯 칸을 내려가자 깜깜한 지하방 일곱 개가 나왔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 위치한 고시원. 7㎡(약 2평) 남짓한 B06호에 ‘여의도 사건’ 피의자 김 아무개씨(30)가 살았다. 손바닥만 한 창문 두 개가 복도를 향해 나 있었다. 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중계기가 없어서인지, S통신사 휴대전화가 터지지 않았다.

김씨는 지난 3월부터 보증금 50만원, 월세 25만원을 주고 이곳에서 지냈다. 화장실조차 없는 방 안에는 고시원에서 제공한 낡은 매트리스와 책상, 냉장고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숟가락, 샴푸, 부탄가스 같은 생활용품이 책상 위에 있었다. 책장에는 <돈 걱정 없는 노후 30년>과 같은 재테크 서적이 있었다. 대출상품 영업을 할 때 쓰인 것으로 보이는 ‘○○대학교 동창회 명부’도 보였다.

그가 사용한 오래된 냉장고에는 ‘△△과도 700원’이라는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고시원으로 올라오는 길목에 위치한 ㅋ마트에서 과도 5개를 사 모은 것이었다. 김씨는 경찰 진술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옛 직장 동료들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세 달 전부터 죽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한두 달 전부터는 (동료들을) 죽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마다 과도를 사 모았다”라고 말했다. 경찰은 그가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숫돌에 칼을 갈았다고 전했다. 


   
ⓒ뉴시스
여의도 칼부림 사건의 피의자 김 아무개씨(30)가 현장검증을 하고 있다.


서울 여의도 한복판에서 칼부림 사건이 일어난 때는 지난 8월22일. 김씨는 자신이 근무하던 ㅎ신용평가정보 건물 앞에서 옛 동료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팀장 김 아무개씨(32)와 조 아무개씨(30)가 나오자 이들을 뒤따라가 수차례 찔렀다. 도주하면서 행인 안 아무개씨(32)와 김 아무개씨(31)에게도 칼을 휘둘러 중상을 입혔다. 피의자 김씨는 “행인들이 나를 쫓아오는 것처럼 느꼈다”라고 말했다.

범행 당시, 그의 주머니에는 현금 200원과 4000원이 충전된 교통카드가 들어 있었다. 생활비 등으로 진 카드빚은 4000만원에 이르렀다. 지난 3월 퇴직한 이후 몇 차례 취업을 시도했지만 신용불량자라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생계를 위해 노트북을 팔기도 했다.

김씨가 마지막으로 근무한 ㅈ은행 대출상품 위탁판매업 동료 박 아무개씨는 그를 ‘밥을 무척 잘 먹는 사람’으로 기억했다. 이따금 회식이라도 하는 날이면 밥 두세 공기를 매우 허겁지겁 먹어 며칠 굶은 사람 같았다고 한다. 그는 “김씨가 객지 생활을 오래한 탓인지, 그를 챙기는 사람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김씨는 혼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4년 전부터는 가족마저 연락이 끊겼다. 어머니와 마지막 통화를 한 지 1년이 넘은 것으로 알려졌다.

4개월여 전, 그는 동료 박씨와 마지막으로 통화하면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았다고 했다. “영업직이 맞지 않아 다른 데 취업을 할거다. 벌써 면접을 봤다. 4대 보험이 되는 일이다.” 하지만 김씨는 이후 어디에도 입사하지 못했다.

김씨는 서울에서 초·중·고를 졸업한 후 지방의 한 4년제 대학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재학 기간은 짧았다. 이듬해 중퇴한 뒤 군에 입대했다. 2005년 제대 후 곧바로 시작한 그의 첫 직장은 ㄱ신용정보였다. SK텔레콤 연체요금을 받아내는 전화 상담 업무였다. 2년 동안 비정규직으로 일했다. 직장 생활은 계약 기간 만료와 함께 끝났다. ㅅ보증보험으로 직장을 옮겼다. 연체 채권 상담 업무였다. 이 역시 2년 계약 기간이 끝나자 그만둬야 했다. 


1등부터 꼴등까지 실적 게시

이번 사건의 표적이 된 세 번째 직장 ㅎ신용평가정보에서 김씨는 또 SK텔레콤 미납 요금을 상담하는 일을 맡았다. 평소 가깝게 지낸 지인이자 당시 팀장으로 일하던 이 아무개씨의 소개로 입사했다. 2009년 10월, SK텔레콤 미납 업무가 ㅎ신용평가정보에 위탁되자 회사는 팀을 꾸려 김씨와 같은 업무를 하는 직원 12명을 뽑았다. 한 달여 뒤 직원을 추가로 채용해 30∼40명이 함께 근무했다.

ㅎ신용평가정보의 한 동료는 “미납 상담 업무에 경력이 있었던 데다 상담업계에서 보기 드문 남성이라는 점 때문에 김씨가 입사하면서 꿈을 크게 가졌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실적을 인정받아 입사 3개월 만에 부팀장으로 승진했다.

급여는 기본급 100여만 원에 추심 건당 받는 수수료를 더하는 것으로 책정됐다. 개인사업자로서 회사가 위임 계약한 형태였기 때문이다. 퇴근 직전에는 1등부터 꼴찌까지 실적 등수가 게시판에 붙여졌다. 팀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그룹 간 실적 경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앞서 말한 동료는 “실적이 안 좋은 직원은 자칫 다른 그룹원에게 피해를 줄까봐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일을 시작한 수개월 동안 평균 이상의 실적을 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다달이 150만∼200만원을 받았지만 그 기간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실적은 떨어졌다. 곧이어 실적이 안 좋으면 부팀장에서 물러나는 관행에 따라 김씨도 수개월 만에 팀원으로 돌아갔다.

김씨는 만 1년을 채우지 못하고 퇴사했다. 퇴사 직전, 동료 직원 30여 명에게 ‘잘 지내라. 그동안 고마웠다’며 온라인 쪽지를 보냈다고 한다. 김씨와 함께 일한 한 퇴직자는 “동료들 사이에 실적 때문에 따돌리는 경우는 없었다. 부팀장이라는 자리를 스스로 부담스러워했고, 실적 때문에 눈치를 본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인정받고 싶었던 꿈이 좌절된 데 따른 상실감이 컸던 것 아니냐는 말이다.


   
ⓒ시사IN 이명익
김씨가 최근까지 근무한 ㅈ은행 대출상품 위탁판매팀에 보낸 이력서. 비정규직을 전전한 경력을 볼 수 있다.


경찰에서 김씨는 피해자 김씨가 “팀장인데도 자신의 업무를 미뤄 화가 났다”라고 말했다. 동기인 피해자 조씨에 대해서는 “험담했다고 특정할 수 없지만 나쁜 말을 한 직원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았다”라고 말했다. 복수의 회사 관계자들은 “입사 초기에는 조씨가 김씨의 부하 직원이었으나 조씨가 팀장으로 승진하자 이에 앙심을 품은 것 아니냐”라는 의문을 품기도 했다.

ㅎ신용평가정보를 범죄 대상으로 삼은 이유에 대해 김씨는 “이곳을 그만두고 난 뒤 살기가 힘들어졌다”라고 진술했다. 실제로 그는 퇴사 이후 생활고에 시달렸다. 2011년 3월, 퇴사 5개월 만에 ㅈ은행 대출상품을 위탁 판매하는 회사에 취직했다. 기본급 없이 실적에 따라 급여가 지급됐다. 그러나 영업에 익숙하지 않았던 김씨는 1년 만에 일을 그만두었다. 퇴사하기 4개월 전부터는 회사에 아예 출근하지 않았다.

그의 직장동료 박씨는 “월급 200만원을 받기 위해서는 매달 대출상품 1억원가량의 판매를 성사시켜야 한다. 다달이 300만원을 받는 사람은 업계에서 10%가 안 된다. 업계 종사자 절반은 실적이 0%에 가깝다”라고 말했다. 김씨도 그 절반에 속했다. 대출상품을 팔아야 했던 그는 오히려 제2금융권에서 돈을 빌려 근근이 생활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일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은 지난 1월, 김씨는 자신의 블로그 제목을 ‘ㅈ은행 김OO입니다. 직장인 신용대출’에서 ‘The Pursuit of Happyness(행복을 찾아서)’로 바꿔 달았다. 블로그에 게시된 글은 없었다. 그가 사건을 저지르기 직전에 등록한 카카오톡 자기소개 문구는 ‘마지막은 악역으로…’였다.

그가 최근까지 근무한 ㅈ은행 대출상품 위탁판매팀에 보낸 입사지원서를 보면, ‘서로를 생각하고 위해주는, 웃음을 잃지 않는 가정에서 성장했다’ ‘남의 말을 듣는 것을 좋아하며 허물없이 지내는 것을 좋아하고… 고민을 잘 상담하는 편이다’ ‘사람 속에서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김씨는 행복과 즐거움을 찾지 못한 채 악역으로 치닫기를 선택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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