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록스와 애플, 그리고 창조신화 조회수 : 3,820, 2011-09-16 19:28:29

김영권 홈페이지홈페이지



ANNALS OF BUSINESS

CREATION MYTH

Xerox PARC, Apple, and the truth about innovation.
by Malcolm Gladwell




MAY 16, 2011

1979년 하순, 24세의 젊은 기업가가 실리콘밸리에 있는 제록스 PARC라는 연구센터를 방문한다. 이 기업가는 근처인 쿠퍼티노에서 조그마한 컴퓨터 회사를 공동 창립했고, 이름은 스티브 잡스였다.

제록스 PARC는 제록스의 혁신센터 역할을 했으며, 현재도 길다란 콘크리트 빌딩과 굉장한 테라스를 지닌 연구소로서 팔로알토 Coyote Hill Road 언덕 기슭에 남아 있다. 스탠포드 대학교의 후버(Hoover) 타워에서 북동쪽이고, 휼렛팩커드의 제멋대로 뻗어나간 캠퍼스의 북쪽에 위치한 이 연구소 주위에는 칩 디자인 기업과 소프트웨어 업체, 벤처자본 투자사, 하드웨어 업체들이 몰려 있다. 이런 광경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이곳이 세계 컴퓨터 업계의 중심이리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사실 70년대로 되돌아가보면, 동네 풍경과 실상은 거리가 멀었다. 제록스 뿐이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제록스는 세계에서 제일 거대한 컴퓨터 엔지니어/프로그래머들이 모인 연구소였으며, 그 후로 10년간 혁신과 발명에 있어서는 제록스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70년대 당시 미래를 짚어보라면 누구나 제록스를 거론할 때였다. 그 이유때문에 스티브 잡스가 친히 이 언덕까지 차를 몰고 왔던 것이다.

이미 애플은 미국에서 제일 떠오르는 기술 기업인 상태였고, 실리콘밸리 누구나 애플이 어떤지 알고 싶어 했다. 그래서 잡스는 제록스에게 제안을 한 가지 한다. 애플의 주식 공개를 1년 앞두고 애플 주식 수 십만 장을 제록스에게 매도(100만 달러 어치는 될 터였다)할 테니 제록스의 "기모노를 벗어달라"였다. 상당한 흥정이었다. 미친 짓이라 여기는 직원들도 있었지만 결국 제록스 스스로가 나서서 잡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당시 PARC의 한 학자는 오늘날 잡스가 가진 근엄한 디지탈 독재자의 이미지에 흥분제를 더한, "난폭한" 독재자였다고 회상했다. 잡스는 며칠간 제록스를 견학할 수 있었고, 결국은 제록스의 소중한 개인용 컴퓨터, 알토(Alto) 앞에 서게 됐다.

이 때 래리 테슬러(Larry Tesler)라는 엔지니어가 시연을 보여줬다. 그는 "마우스"의 도움을 받아 화면 상의 커서를 움직였다. 당시 전통적인 컴퓨터는 키보드 상으로 뭔가 명령을 타이핑해야 했었지만, 테즐러는 화면 상의 아이콘을 클릭할 뿐이었다. 그는 "윈도우(windows)"를 열었다가 닫으면서 태스크 간을 재빠르게 왔다 갔다 했다. 테슬러는 우아한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상에서 글을 작성하고, PARC 내 다른 사람들과 이메일을 주고 받았는데, 이 네트워크가 세계 최초의 이더넷(Ethernet) 네트워크였다. 한편 잡스도 애플에서 엔지니어를 한 명 따로 데리고 왔는데, 그 엔지니어 이름은 빌 앳킨슨(Bill Atkinson)이었다. 앳킨슨은 될 수 있는 한 가까이 알토 앞으로 접근해서는 코를 스크린에 갖다댔다. 테슬러는 잡스를 이렇게 기억했다. "잡스가 들어온 시간 내내 방을 휘젓고 다녔어요. 정말 기뻐하더군요. 그러다가 제가 화면상에서 뭘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쳐다보더니 방을 막 점프하면서 뛰어다녔어요. '왜 이걸로 아무 일도 안 하십니까? 이거 정말 대단해요. 혁명적이에요!'라고 외치면서 말이죠."

제록스는 1981년, 알토의 후계 기종을 팔기 시작했지만, 속도가 느렸고 힘이 별로 없어서 제록스는 결국 개인용컴퓨터 사업 자체에서 철수해버린다. 그동안 잡스는 애플에 되돌아와서 차세대 개인용 컴퓨터를 맡고 있던 팀에게 방향을 바꾸라고 명령내린다. 그도 화면 상에 윈도우와 메뉴가 떠 다니고, 마우스가 붙어 있기를 바랬다. 다름 아닌 매킨토시다. 아마도 실리콘밸리 역사상 제일 유명한 제품이 매킨토시였을지도 모른다. 몇 년 후 잡스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기회가 왔음을 제록스가 알고 있었더라면, 제록스는 IBM에 마이크로소프트를 더한 만큼의 회사가 됐을지도 모릅니다. 세계 최대급의 하이테크 기업이 됐겠죠."

제록스 PARC의 전설이다. 잡스는 야곱이오, 제록스는 에사오였다. 푼돈에 자기 권리를 팔아버린 성경 속의 에사오 말이다. 지난 30년간 이 전설은 역사적으로 입증이 됐다. 한 때 미국에서 제일 사랑받는 하이테크 업체였던 제록스는 지배적인 위치에서 물러나게 됐고, 이제는 애플이 올라섰으며, 팔로알토 제록스 연구실의 알토 시연장면은 진정한 혁신자와 패배자를 구별시켜주는 하나의 상징이 됐다. 하지만 이 모든 전설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다소 좀 복잡하다.

잡스가 PARC에서 되돌아오자, 잡스는 일단 딘 허비(Dean Hovey)를 만난다. 딘 허비는 IDEO로 알려지게 될 산업디자인 회사의 창립자 중 하나였다. 허비가 말하는 잡스는 이렇다. "잡스가 수요일인가 목요일인가 제록스 PARC로 갔어요. 저하고는 금요일 오후에 만났죠. 그에게 보여주고 싶은 아이디어가 몇 가지 있었는데, 잡스는 거의 두 가지 문장만 입 밖에 내더군요. '안 돼요. 안 돼. 안 돼. 안 돼. 마우스부터 만들어와요.' 생각했죠. 도대체 마우스라는 게 뭐지? 전혀 모르겠어서 잡스에게 물어봤더니 설명을 잡스가 했습니다. 그러면서 잡스가 이런 말도 덧붙였어요. '제록스가 만든 마우스는 만드는데 3천 달러가 들어가고 2주일 지나면 고장나버리니까, 어떻게 만들지 알려드리죠. 15달러 안쪽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하고, 몇 년은 얼마든지 쓸 수 있어야 하며, 청바지 안에 집어 넣을 수 있어야 해요.'



그래서 저는 바로 월그린(Walgreen, 생활용품, 잡화 판매 수퍼마켓)으로 갔어요. 지금도 같은 마운틴뷰 Grant and El Camino 모퉁이에 있습니다. 거기서 겨드랑이 냄세제거제를 몽땅 다 샀죠. 볼이 그 안에 들어 있거든요. 버터 담는 접시도 샀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우스의 시작이었죠."




필자는 팔로알토 중심가의 한 오래된 빌딩에서 허비와 인터뷰를 가졌다. 그 빌딩이 바로 그가 회사를 세운 곳이었으며, 현재 임차인에게 오전동안 옛날 사무실을 빌릴 수 있을지 물어봤다. 애플 마우스를 발명한 바로 그 장소에서 얘기를 들려주기 위해서였다. 이 방은 침실 정도 크기로서, 쿨리지(Coolidge) 대통령 시절(1923-29) 페인팅한 것 같은 방이었다. 북 캐롤라이나식 요가인가 요거트인가로 날씬하고 건강한 몸매를 가진 허비는 무너질듯한 의자에 불편하게 앉았다. "첫 번째 제작실은 말 그대로 지붕 위였어요." 그러면서 그는 창 밖에 있는 좁은 옥상을 가리켰다. 지금은 녹색 카페트로 가려져 있었다. "기획 위원회같은 곳에 말하지도 않았어요. 올라가서 대충 치우고 지붕 위에서 만들기로 했죠. 창 밖으로 나가서 말이죠."

허비는 커다란 플라스틱 가방을 가져왔다. 모눈종이에 그린 표와 여러가지 다른 크기의 플라스틱 마우스 껍데기, 기타줄, 장난감용 기차에서 뽑아 낸 바퀴, Ralph's 통조림병에서 떼어 낸 금속 뚜껑 등 당시 물건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허비는 뚜껑을 열어 자그마한 공의 형태를 가진 밀랍 모양의 둥근 물체를 잔뜩 보여줬다. "에폭시 수지로 만들었죠. 에폭시를 부은 다음에 바셀린을 바른 부드러운 철제 볼을 에폭시 수지 안에 넣었어요. 그러면 딱딱해지죠." 그는 뚜껑 밑에서 볼을 꺼낸 다음, 탁자 위에서 굴렸다. "마우스에 들어가는 볼과 같습니다."



어려운 부분은 서로 떨어지지 않도록 마우스 껍데기와 연결되어야 할 부분이었다. 그래야 볼의 움직임에 따라 정보를 화면상에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결장치에서 일어나는 마찰이 롤러볼과 탁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마찰보다 크다면, 마우스의 움직임을 전달할 수 없게 된다. 게다가 먼지가 더 쌓일 경우에도 마찬가지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제록스 PARC의 마우스는 볼 베어링이 롤러볼을 지지해주는 배열로 이뤄진 정교한 장치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제록스의 마우스 또한 볼 상단에서 마찰이 너무 많았고, 먼지와 때를 잘 해결하지 못했다.




허비는 일단 볼 베어링을 가지고 작업을 해 봤지만 성과가 나지 않았다. "이 때 '아하!'의 순간이 일어났죠." 손가락을 볼 사이드에 느슨하게 놓자, 표면에는 거의 닿지 않았던 것이다. "볼이 여기에서 굴러가죠. 빌딩이 워낙 오래 되어서 알아낸 듯 합니다. 바닥이 층이 아니에요. 그래서 갖고 움직여 보면서 깨달았죠. 굴려보고 싶다고요. 온갖 종류의 볼 베어링이 지지하는 구조는 원하지 않았어요. 거의 터치하지 않는 구조이기를 바랬죠."

손가락이 있던 자리, 그러니까 제일 마찰이 일어나지 않는 부위가 있던 것이다. 그 위치에서 마우스를 연결시키는 방식이었다. 각 옆의 중앙점이었다. "중앙점에서는 어떠한 힘도 작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굴러가죠."



허비는 자문료를 시간당 35달러로 했었다. 전체 프로젝트 비용은 아마 수 십만 달러가 들어갈 터였다. "원래는 애플에게 자문이 아니라 로열티를 요구할까 했었어요. 가령 개당 50센트 식으로요. 5만 개, 어쩌면 10만 개는 팔리리라고 봤으니까요." 그는 크게 웃었다. 예측이 틀렸기 때문이다. "스티브는 요령 있었습니다. 안된다고 말하더군요. 그래도 좀 요구했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좀 받았을 텐데요."

바로 여기서, 잡스의 방문에 따른 복잡한 구석이 생겨난다. 제록스 PARC의 전설에서, 잡스는 제록스로부터 개인용 컴퓨터를 훔쳐냈다. 하지만 놀랍게도 잡스가 허비에게 말한 바에 따르면, 잡스는 PARC에서 봤던 것을 다시 만들고 싶어하지 않았다. "아시다시피 버튼을 세 개로 하냐, 두 개로 하냐, 하나로 하냐의 논쟁이 있었습니다. 제록스 마우스 버튼은 세 개였죠. 그런데 한 번 알아보니까 마우스를 배우는 것 자체가 일이더군요. 그래서 최대한 단순하게 만들기로 했습니다. 버튼을 하나로 하자였죠. 꽤 중요한 결정이었어요."

그렇다면 잡스는 제록스로부터 마우스에 대한 아이디어를 가져왔다는 말일까? 꼭 그렇지도 않다. 제록스는 마우스 아이디어를 소유했던 적이 없다. PARC 연구자들은 원래, 제록스에서 15 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스탠포드 연구소(Stanford Research Institute)의 컴퓨터 과학자, 더글라스 엥겔바트(Douglas Engelbart)로부터 마우스를 가져왔었다. 엥겔바트는 60년대 중반, 별도의 기계 "동물"을 통해 화면상의 커서를 움직이겠다는 아이디어를 고안했다. 그의 마우스는 사각형에 부피가 컸으며, 롤러스케이트 바퀴와 비슷한 모양이었다. 만약 엥겔바트의 마우스와 제록스의 마우스, 애플의 마우스를 나란히 놓고 보면, 이 물건들이 똑같다고 여길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개념의 진화가 더 들어맞는다.




잡스의 상상력을 자극한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도 마찬가지이다. 제록스 PARC의 혁신은 전통적인 컴퓨터의 커맨드라인을 화면상의 아이콘으로 바꿨다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아이콘을 클릭했을 때 나타나는 팝업 메뉴는 사용자의 의도와 컴퓨터의 반응이 빚어낸 결과로 볼 수 있으며, 잡스의 소프트웨어 팀은 그래픽 인터페이스를 팝업 메뉴를 통해 크게 진전시켰다. 잡스는 "직접적인 조작(direct manipulation)"을 강조했다. 윈도우를 더 크게 만들고 싶으면, 구석을 클릭해서 더 크게 만드는 식이다. 윈도를 움직이고 싶으면 윈도를 잡아서 움직이는 식이기도 하다. 애플 디자이너들은 팝업 메뉴 외에도 메뉴바와 휴지통을 발명했다. 제록스 PARC의 단순화된 인터페이스와는 상당히 다른 기능들이다.

버튼 세 개와 한 개 사이의 직간접적인 차이, 300달러와 1,500달러의 차이, 볼베어링으로 만든 마우스와 자유로이 굴러가는 마우스의 차이가 과연 작은 차이일까? 제록스 PARC는 전문가의 사용을 염두에 뒀고, 애플은 일반 대중의 사용을 염두에 뒀다. PARC는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었을지 몰라도, 애플은 대중용 컴퓨터(popular computer)를 만들어냈다.



최근 군대의 학자, 아담스키(Dima Adamsky)의 논문 "군사혁신의 문화(The Culture of Military Innovation)"를 보면, 소위 군사의 혁명(RMA: Revolution in Military Affairs)이라 불리는 것에 대해 유사한 주장을 볼 수 있다. RMA는 정밀 유도 미사일이나 정찰용 드론, 실시간 명령과 통제 커뮤니케이션 등 디지탈 세대의 수단을 갖고 변모한 군대를 의미한다. 아담스키는 누가 RMA를 발명했는지 알아내기는 불가능하다고 간단하게 시작한다. 디지탈 기술을 군사용 기술로 어떻게 바꿔낼지 고안한 첫 번째 인물들은 사실 1970년대 소련군의 학자들이었다. 하지만 실제 하이테크 시스템을 군대에 적용시킨 최초의 나라는 미국이었으며, 실제로 사용한 국가는 이스라엘이었다. 1982년, 레바논 베카(Bekaa) 계곡에서 시리아 공군과 전투할 때 사용하는데, 보통은 베카벨리의 일방적 전투(Bekaa Valley turkey shoot)라 불리는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RMA 혁신이라 할 기술들을 모두 동원하여, 시리아의 지대공 미사일 포대 19곳을 파괴했고, 시리아 군 비행기 87대를 격추시켰지만, 이스라엘 측의 피해는 항공기 한 대 뿐이었다.

그런데 혁명은 한 가지가 아니라 세 가지다. 아담스키는 그 세 가지를 적절한 간격과 별도의 기술 및 환경으로 지적한다. 소련은 강력하고 중앙집중화된 군대 관료와 함께, 이론 분석의 오랜 전통 또한 갖고 있었다. 따라서 새로운 정보 시스템의 군사적인 의미를 제일 먼저 깨달았던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중앙 집중화된 관료들이 지닌 강력한 분석의 전통이 서로간의 연결에 익숙치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 미국은 탈-중앙집중적이고, 상향식 기업 문화를 갖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기술적인 해결책을 중요시 해왔다. 군대 자체가 하이테크 업체들과 긴밀한 연관을 갖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정밀 유도 미사일이나 차세대 명령 통제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을 발명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단 소련 스타일의 시스템 분석은 우선 사항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경우 이들의 군대 문화는 끊임 없이 상존하는 위협적인 배경과 함께 자라났기 때문에, 상당히 즉흥적이고 창조적이다. 다만 아담스키가 지적했듯, 위급하고 단기적인 "진화"용으로서의 군대이기 때문에 이론적인 부분은 약하다. 혁명에서는 누가 누구를 훔친 것이 아니다. 각자가 별다른 관점에서의 문제점을, 서로 별다른 퍼즐을 갖고 있다.

마우스의 역사를 보자. 엥겔하트는 소련식이었다. 그는 비전을 가졌으며 누구보다도 먼저 마우스를 알아봤지만 비전 자체에 막혀 있었다. 제록스 PARC에 대한 훌륭한 역사책, "Dealers of Lightning"(1999)를 쓴 힐칙(Matthew Hiltzik)에 따르면, "엥겔바트 스스로가 지정한 임무는 제품의 생산, 심지어 프로토타입의 제조도 아니었다. 끝없는 지식의 탐구였을 따름이다."였다. 즉, 제록스 PARC가 여기서의 미국이다. 뭔가 만들어내기는 한다는 얘기다. 70년대 내내 제록스에서 일했다가 3Com을 창립하기 위해 제록스를 떠났던 멧카프(Bob Metcalfe)의 말이다. "제록스는 완벽한 환경을 만들어냈습니다. 상하 구조가 전혀 없었어요. 우리가 쓸 툴을 우리가 만들었죠. 논문을 출판해야겠다 싶으면 프린터를 만들었습니다. 편집이 필요해서 컴퓨터도 만들었죠. 컴퓨터를 연결시켜보자 해서 네트워크도 고안했습니다. 예산이 굉장히 많았어요. 다른 곳과는 달리 가르칠 필요가 없었거든요. 연구만 하면 됐습니다. 정말 천국이었죠."

그러나 천국은 상용 제품을 만들기에 좋은 곳이 아니다. 멧카프의 말이다. "컴퓨터를 만들어내긴 했죠. 아름다웠습니다. 컴퓨터를 만들었으니 컴퓨터 언어와 디스플레이도 만들어야죠. 다 개발했습니다. 하지만 비용이 문제였어요. 16,000 달러가 들어갔으니까요. 제품으로 만들어도 3천 달러가 들어갔습니다." 즉, 실제 제품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즉흥성과 창조성이 필요할 일이었다. 3천 달러 짜리 마우스를 청바지 안에 들어가는 15달러 짜리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애플이 이스라엘 역할을 맡았다.

제록스는 IBM에 마이크로소프트를 합친 회사일 수가 없었다. 기술 언론인인 맥크라켄(Harry McCracken)의 말이다. "세계 최고의 기술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비자 시장에서 꼭 성공하리라는 보장이 없죠. 모두 달아요. 둘 다 성공한 회사는 거의 없습니다." 그는 네트워킹 전문 기업인 시스코 시스템을 예로 들었다. 올 봄, 시스코는 플립(Flip) 카메라 사업을 포기하고 수 억 달러를 날렸다. 40년 전 제록스도 마찬가지였다. 제록스는 세계 최고의 기업용 기술을 만든 곳이었다. 그렇다면 팔로알토의 연구소를 통해 제록스가 소비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었느냐는 질문이 더 공정할 테지만, 그 이야기는 자주 들리지 않는다.

스티브 잡스는 제록스 PARC를 방문했을 때 광학 엔지니어인 스타크웨더(Gary Starkweather)도 만났다. 스타크웨더는 활력이 넘치며 단단한 사람이었다. 커다란 손과 함께, 계산 방향이 실제로는 오른쪽에서 왼쪽인 것과 같은 별 것 아닌 일을 정말 어렵게 잘 포장하는 재능도 갖고 있었다. 으리으리한 Coyote Hill Road의 빌딩이 세워지기 전, 스타크웨더는 Foothill Expressway 맞은편에 있는 빌딩의 팀과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반 마일 정도 떨어진 거리였는데, 당시 도로 밑에는 케이블을 깔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스타크웨더는 두 빌딩 사이에서 레이저를 쏴서 어떻게든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을 만들었다. 당시 안개 낀 밤에 도로를 운전해 가다가 하늘을 보면, 빨간 색 빔이 하늘을 갈라놓는 장면을 볼 수 있었는데, 스타크웨더는 짓궂은 미소를 띄우며 한 운전자가 그 사이에 낀 곳으로 운전해야 했을 때 레이저를 닫아야 했다고 말한다.

스타크웨더의 전공은 레이저였다. 그는 뉴욕 웹스터(Webster)에 있는 동부 연구소에서 제록스를 다니기 시작했다. 제록스는 당시 사진 렌즈를 사용하여 인쇄된 종이를 스캔하여 복사본을 출력하는 기기를 만들었고, 여기에 스타크웨더는 아이디어를 하나 낸다. 컴퓨터에서 문서를 복사기로 직접 보내는 아이디어였다. 즉, 사진 렌즈를 사용하는 스캔을 생략하자는 아이디어였다. 그 해결방법은 레이저였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제록스의 기기를 프린터로 바꾸자는 얘기였는데, 상당히 급진적인 아이디어였다. 구텐베르크 이래로 출력기의 기능은 재-제작의 기능 뿐이었다. 특정 이미지나 종이를 출력하고 싶으면 물리적인 활자가 있거나, 대응하는 마크를 갖고 있어야 했다. 스타크웨더는 비트와 바이트로, 0과 1로 디지탈 이미지를 전환해서 곧바로 복사기로 보내고 싶었다. 적어도 이론상 출력 못할 것이 없는 아이디어였다. 스타크웨더의 말이다.

"어느 날 아침 깨어나서 생각했어요. 그냥 직접 출력하면 안 되나, 하고 말이죠. 하지만 상사에게 말하니, 그는 들어본 아이디어 중에 제일 어처구니 없다고 말했어요. 그냥 다른 일이나 좀 하지 그래, 라고 말하더군요. 레이저는 너무 비싸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잘 작동하지도 않았죠. 아무도 그런 일을 하기 원하지 않았고 컴퓨터의 힘도 약했어요. 그래도 천성 계속 생각해보기로 했습니다. 그가 분명 틀린 부분이 있으며, 나는 그 부분을 정말 좋아하니 이거 참 좌절스러웠죠. 그래서 저와 상사가 계속 고민을 했습니다. 1969년 하순인가 1970년 초인가 검정 커튼 뒤의 밀실에서 첫 실험을 했죠. 갖고 좀 놀았더니 안 멈추면 팀을 모조리 해고시키겠다고 위협하더군요.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포기할 것이냐, 아니면 다시 시도해서 성공할 것이냐였어요."

당시 스타크웨더는 제록스가 뉴욕에서 3천 마일 떨어진 팔로알토에 새로 연구소를 개설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당장 제록스의 수석 부사장에게 달려가서 자기를 새 연구소로 보내주지 않으면 IBM으로 이직해버리겠노라고 위협했다. 그래서 1971년 1월, 그의 바람대로 그는 연구소를 옮겼고, 열 달이 못 지나서 프로토타입까지 만들었다.

스타크웨더는 현재 은퇴했으며, 플로리다 올란도 북쪽에 살고 있으며, 인터뷰는 그의 집 정원 현관 안에 있는 피크닉용 탁자에서 이뤄졌다. 그는 하얀색 치노와 빛나는 검정 반소매 셔츠에 빈티지 자동차의 그림이 박힌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연구에서 만든 잡동사니가 들어간 두 개의 거대한 플라스틱 통을 가져와서 탁자에 풀어 놓았는데, 금속으로 된 8각형 디스크와 연구소 종이 위에 그린 스케치, 프린터 내부 부품용으로 만든 검정색 플라스틱 레이저 하우징 등이 들어 있었다. 그가 말을 이어갔다.

"웹스터 쪽 연구소에서는 반대가 여전히 강력했어요. 그쪽 사람들은 컴퓨터 프린팅에 미래가 없다고 봤죠. 'IBM이 그거 이미 하고 있는데 우리가 왜 해야 하나?'였어요. 게다가 경쟁 프로젝트가 두 개인가 세 개인가 별도로 있었죠. 저야 그 프로젝트들은 돈낭비의 농담거리였지만요. 한 그룹은 50명, 다른 그룹은 20명. 제 그룹은 2명이었습니다." 그는 사진을 꺼내들었다. 경쟁 프로젝트가 만드는 "광학 캐리지 프린터(optical carriage printer)"라 불리는 것이었는데, 디자인 잡지 광고에서 볼 법한 모듈화된 이탈리아 부엌 가구 정도의 크기였다. 그는 겸언쩍스럽게 웃었다. "믿을 수 없는 기기였죠. 10-인치 짜리 드럼을 갖고 있었는데, 이게 RPM이 5,000이었습니다. 수퍼 접시닦이같은 것이죠. 표면상에 글자를 인쇄하는데요. 한 열 대 팔았던가? 너무나 빨리 돌아가는 나머지 드럼이 빨리 나가고, 글자가 막 날라다니더라는 겁니다. 어떻게 글자를 놓을지 아는 사람이 여자분인데, 뉴욕 Troy에 딱 한 명 있었어요."

"글자가 날라다니는 프린터라고 표현했죠? 결정을 내렸습니다. 일부 글자에 세리프가 없는 헬베티카(Helvetica) 텍스트와 그래프가 그려진 모눈종이, 사진이나 복잡한 것이 들어가 있는 페이지 등 모두 합쳐서 6 페이지를 출력해야 했어요. 이 6 페이지를 무엇으로 출력하냐 결정내려야 했는데 제가 이길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프린트 못할 것은 없었거든요. 농담이십니까? 이것을 전부 다 비트로 바꾸면 출력 가능합니다. 이 다른 머신들은 곡선 하나 출력하는 것도 어려웠죠. 이 글자가 날라다니는 프린터 프로젝트들 다 취소됐습니다. 저만 남았죠." 그의 프로젝트는 제록스 9700이 된다. 세계 최초로 나온 고속의 낱장 레이저 프린터였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스타크웨더의 이야기는 역시 스티브 잡스의 방문으로 이어진다. 제록스의 관리가 얼마나 상상력이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스타크웨더는 자신의 레이저를 커튼 뒤에 숨겨야 했고, PARC로 오기 위해 싸워야 하기도 했다. 또한 프린터 프로젝트 경쟁으로 수모를 겪어야 했고 심지어 제록스 간부진은 계속 회의적이기도 했다. PARC의 창립자인 잭 골드만(Jack Goldman)은 웹스터 쪽 팀을 데려와서 개인적인 시연을 해야 했고, 그 이후, 스타크웨더와 골드만은 레이저 프린터를 재빠르게 판매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냈다. 7000이라 불린 제록스 복사기에 레이저를 얹자는 아이디어였다. 7000은 옛날 모델로서, 주위에 굴러다니는 7000이 대단히 많았다. 골드만은 심지어 고객도 준비해 뒀다. 로렌스 리버모어(Lawrence Livermore) 연구소가 제록스 머신을 살 준비를 하게 했는데 제록스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자 스타크웨더는 포토-식자공(photo-typesetter)이라 부르는 기기를 만들고 싶어했다. 카메라 사진을 바로 복사할 수 있는 기기였다. 하지만 제록스는 이마저도 안 된다고 했다. 스타크웨더의 말이다. "고성능 스캐너를 작업하고 싶었어요. 문서 말고 다른 것을 출력한다면 어떻게 할까? 이것이었죠. 가령 고해상도 스캐너를 만들면 유리판에도 출력할 수 있어요." 그는 상자 안을 뒤지더니 유리판을 하나 꺼냈다. 약 6인치쯤 되어보였으며, 아이들 얼굴 사진이 들어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반도체 산업용 "마스크"를 만드는 기법도 이와 같다고 한다. 패턴화된 스크린을 컴퓨터 칩 디자인 식각하는 데에 쓰기 때문이다. "'제록스에서는 '이제 인텔 시장에 진입해서 뭐 하려고?'라고 묻기 때문에 아무도 안 하려고 했어요. 자기가 정보산업에 있다는 인식조차 못 했다는 말이죠." 그는 유리판을 들었다. 작은 소녀 얼굴이 나타났다. "이 판의 사진은 사진이 아니라 복사에요. 사무실 서류 복사가 아닙니다. 갈 곳이 없었죠. 모든 제품을 계량화시켜서 결정내리는 스프레드쉬트 전문가에게 회사가 전염당했어요. 불행히도 그 척도는 창조성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인터뷰 며칠 후, 스타크웨더는 이메일을 하나 보내줬다. PARC에서의 경험에 대한 그의 의견이 들어 있었다. "레이저 프린터를 내놓으려고 온갖 일을 다 겪었지만 돌이켜보면 정말 즐거웠습니다. 기회는 어려움이라는 포장을 하고 들어오기도 하죠." 아마도 그는 제록스에서의 일을 너무 부정적으로 얘기했나 싶었던 모양이다. 제록스 간부진이었다면 죄의식이라도 느끼잖았을까? 사실 스타크웨더는 어려운 직원이었다. 그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 사실때문에 그는 뛰어난 혁신가가 될 수 있었다. 레이저에 대한 일을 그만 두라고 명령내렸을 때조차 그는 비밀리에 레이저 작업을 계속 했었다. 그는 수 천 가지 아이디어를 가진 고집스럽고 완고한 직원이어서, 아이디어들 중에서 좋은 아이디어 뽑아내기도 그리 녹록치 않았다. 제록스가 과연 로렌스 리버모어 연구소에게 구모델인 7000 기반의 레이저 프린터를 팔아야 할까? 제록스를 맹인들이 운영한 것이나 다름 없다는 내용의 책인 "Fumbling the Future: How Xerox Invented, Then Ignored, the First Personal Computer" (1988)에서 더글라스 스미스(Douglas Smith)와 로버트 알렉산더(Robert Alexander)는 사실 레이저 프린터 제안이 절망적으로 실용적이지 못했다고 썼다. "리버모어 연구소의 주문안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그 때문에 레이저 프린팅 사업을 새로 시작할 정도는 아니었다... 제록스가 레이저 프린터를 어떻게, 어디서 만들어야 할까? 누가 팔고 누가 서비스하는가? 누가 살 것이며 왜 사는가?" 스타크웨더와 제록스 PARC의 동료들은 이런 전략적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들은 창조적인 에너지를 거칠게 뿜을 뿐이었다.

심리학자인 딘 사이몬튼(Dean Simonton)은 재능있는 인물을 구분시켜주는 것은 살아남은 결과물이라고 주장한다. 바흐(Bach)와 잊혀진 그의 경쟁자들의 차이는 바흐가 히트의 승률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평범한 인물도 아이디어는 열 몇 가지 가질 수 있다. 반면 바흐는 일생동안 완전한 형태의 작곡을 천 여 가지 이상 만들었다. 천재가 천재인 이유는 식견과 아이디어, 이론과 즉흥적인 의견, 예기치 못한 일들을 모두 모아서 하나의 훌륭한 작품으로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이몬튼은 "물량의 확률 함수가 질이다"라고 썼다.

사이몬튼의 주장은 창조성과 효율성, 정돈성은 관계가 없다는 의미다. "성공을 더 많이 거둘수록 더 많은 실패도 일어난다." 즉, 아이디어가 다른 이들보다 많다면, 그만큼 나쁜 아이디어도 다른 이들보다 많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창조성을 실현하는 과정은 매우 어렵다. 고전이 된 롤링스톤스의 앨범, "Exile on Main Street"은 사실 시련의 연속이었다. 키스 리차즈(Keith Richards)는 새로 나온 회고록에서 밴드에 아이디어가 너무 많았다고 썼다. 그래서 평범한 곡들 가지고 싸워야 했다. "Head in the Toilet Blues"와 "Leather Jackets" "Windmill" "I Was Just a Country Boy" "Bent Green Needles" "Labour Pains" "Pommes de Terre"가 이 앨범 수록곡들인데, 마지막 곡에 대해 특히 리차즈가 미안해했다. "글쎄. 그 때 우리는 프랑스에 있었다."

리차즈는 "Brown Sugar"의 원곡을 기억하며 친구인 짐 디킨슨(Jim Dickinson)의 말을 인용했다.

"믹이 가사 쓰는 광경을 지켜봤다... 손을 움직이는 족족 빠르게 썼는데 이전에 절대 보지 못 했던 광경이었다. 리갈패드(메모지)에다가 가사를 쓰고 페이지를 넘겨서 또 쓰고 해서 3 페이지를 채운 다음, 페이지를 잘라냈다. 정말 놀라웠다. 그가 얼마나 많이 쓰는지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그의 쓰기를 멈추게 할 수 있을지 여러분도 궁금해 하실 것이다. 여러분이 텔레비전 앞에 모이는 동안 그는 틈틈이 가사를 많이 썼다." 리차즈는 자신이 분명 롤링스톤스의 크리에이티브를 맡고 있다 여겼다. (로큰롤 밴드에서만이다. 키스 리차즈같은 인물이 다른 쪽에서 자기 책임이라고 하는 광경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그는 드디어 자기가 맡은 임무 중에 제일 어려운 일이 믹 재거(Mick Jagger)의 창조력을 "끄기"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스타크웨더와 대화를 나눌수록, 그의 커리어 전체가 이 문제의 확장판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누군가 그를 "끄려고" 항상 노력했다는 이야기다. 누군가는 정말로 그를 꺼줘야 했다. 혁신자의 흥미가 기업의 이해관계와 언제나 합치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스타크웨더는 그 자체로서 좋은 아이디어를 많이 갖고 있었다. 하지만 제록스는 주주를 거느린 거대 기업이었으며 영엽부 인력도 거대하고 기업 소비자들도 많았다. 따라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면 기존에 존재하는 시스템 안에 그 아이디어가 얼마나 어울리는지부터 따져야 했다.

스타크웨더를 만류할 때, 제록스 간부들이 언제나 올바른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스타크웨더는 PARC로 가지 않았는가? 제록스에는 PARC가 있었다. 최고 간부들로부터 멀리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엔지니어가 자신의 꿈을 실현시킬만한 곳이었다. 사달라는 물품은 다 승인되고 하늘에 레이저를 쏴도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스타크웨더는 경쟁자들에 맞서 자신의 레이저 프린터를 내세워야 했고 그는 경쟁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그가 승리하자마자 제록스는 경쟁 프로젝트를 없애고 스타크웨더에게 허가 결재를 내려줬다. PARC에 처음 갔을 때에 대해 스타크웨더는 이렇게 말했다.

"비행기 타고 가서 제가 아는 것들에 대해 프리젠테이션을 했죠. 정말 좋아하더군요. 당시 그들은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고 있었어요. 화면상에 뜨는 모든 것을 종이에 어떻게 옮겨낼지를 연구중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거기 가서 제가 어떻게 출력할지를 보여준 겁니다. 정말 분위기가 좋았어요." 달리 말해서, 제록스가 레이저 프린터를 발명한 이유는 제록스가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큰 범위의 아이디어가 없으면, 작은 범위의 아이디어가 빛을 못 보게 마련이다. 혁신이 효율적이어야 하고 아이디어가 특별해야 한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것이야말로 비극이다. 진짜 보석은 스티브 잡스에게 바치는 꼴이다. 실제로 제록스에게 남은 것은 프린터 뿐이었다. 사실 실제 사례에서 볼 때,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빨리 포기하는 것은, 창조성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주거니 받거니의 거래가 아닐까 싶다. 전임 마이크로소프트 간부였던 나단 미어볼드(Nathan Myhrvold)의 말이다.

"다양한 분야의 영리한 인재를 많이 갖고 있다면 뭔가 좋은 것을 언제나 얻을 수야 있죠. 최고의 투자라고 할 수는 있겠습니다. 다만 성공의 척도로 따진다면 그 가치를 매겨야 합니다. 몇 번이나 실패해봤나, 몇 번이나 성공할 수 있었지만 실패했느냐의 기준으로 가치평가를 내린다면 별로 행복하지 않으실 겁니다. 혁신이란 다루기 힘든 것이에요. 당신에게 맞지 않는 아이디어가 있을 수 있습니다만, 게임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무엇을 흘리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잡아내느냐에요."

1990년대에 미어볼드는 1970년대 제록스 연구소의 사례를 따라 마이크로소프트 안에 연구소를 만들었다. PARC가 실패사례가 아닌 성공사례로 봤기 때문이다. 그의 말이다. "제록스는 사업과는 별개로 연구를 했습니다. 가령 누군가 화이자(Pfizer, 제약회사)에서 워드프로세서를 작성한다면 어떨까요? 행운이 있기를 바래야죠. 연구소라 하면 화이자의 워드프로세서 이상의 일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힘든 일이겠죠. 그런데 제록스의 사업모델은 종이를 내뱉는 큰 머신을 만들어서 파는 것입니다. 많은 돈을 벌어들였죠. 제록스가 PARC에서 발명한 것도 결국 그거였어요." 실제로 그랬다. 개리 스타크웨더가 만든 레이저 프린터는 수 십억 달러를 벌어들여 줬기 때문이다. 제록스 PARC의 모든 프로젝트에 돈을 대준 꼴이었다.

1988년, 스타크웨더는 제록스의 한 경쟁사 수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스카우트 제의였다. 몇 년 전에 만난 사람이기도 했다. "결정은 고통스러웠습니다. 1년만 더 있으면 제록스 경력 25년을 채울 수 있었거든요. 빌딩에 불을 지르지 않는 이상 제록스가 절 해고할 일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충분히 많이 해 줬죠. 물론 그것이 문제는 아니었죠. 끊임 없이 아이디어를 내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래, 이만하면 됐다 싶어서, 결국 떠났습니다."

새로운 회사에서도 그는 좋은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그곳 또한 대단히 창의적인 곳이었다. 그는 고위직으로서 결정을 내리는 지위였다. "기술자에서 관리자에 이르기까지 새롭고 흥미로운 것이라면 모두들 좋아했어요. 매일매일 정말 재밌었습니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았어요. 하루는 마케팅 책임자를 불러서 모든 정보를 달라고 했죠. 소비자가 우리 제품을 살 때 무슨 소프트웨어를 사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모두 다 알려달라고 했어요. 그래야 우리 머신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델을 그려볼 수 있으니까요. 그랬더니 절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전혀 모르겠습니다만.'" 왜이리 경직됐을까? 스타크웨더는 고해상도 디스플레이를 회사 컴퓨터에 붙여놓자고 제안했다. "실제로 붙여서 모델을 만들고 간부들에게 가져가서 제안을 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엑스포에서 이걸 전시해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세상을 지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랬더니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모르겠네요. 공간이 따로 없어요.' 그런 식이었습니다. 금광을 발견했다고 알렸더니 삽을 못 사주겠다는 답변과 비슷했죠."

그저 으쓱할 수밖에 없었고, 계속 그런 식이었다. 혁신자가 가자고 하면 회사는 멈추라고 했다. 제록스 PARC의 유일한 교훈이 있다. 어디선가 일어났던 일은 다른 데에서도 어김 없이 어떤 형태로건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개리 스타크웨더에게 삽을 못 사주겠다고 답했던 회사의 창립자가 누구였을까? 그 이름은 스티브 잡스였다.


Xerox PARC, Apple, and the Creation of the Mouse : The New Yorker

위민복님이 번역한 글입니다.


Posted by 木石
,

http://www.youtube.com/watch?v=sCdJ9bOOX5Q&playnext=1&list=PL7D9F1FC0C46777C7&feature=results_main

Posted by 木石
,

您拨打的用户已被暂停服务或忙

닌 뽀어 다더 용후 이뻬이 짠팅 후(ㅎ=F발음)우 훠 망

고객께서 전화하신 번호(상대방)는 휴면처리가 되언거나 바쁜 상태입니다.

 

对不起,您拨打的电话一关机。

뚜이뿌치, 닌 뽀어다더 띠엔화 이꽌찌.

죄송합니다. 전화하신 전화기가 꺼져있습니다.

 

您拨打的电话忙,请稍后再拨。

닌 뽀다더 띠엔화 마앙~, 칭쌰오호(우) 짜이뽀어.

전화하신 번호는 다른 용무 중(바쁘거나 전화 중)이오니, 잠시 후 다시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您拨叫的电话一停机。

닌 뽀어쨔오더 띠엔화 이티잉찌.

전화하신 번호는 정지된 번호입니다.

 

您拨叫的电话正在电话中。

닌 뽀어쨔오더 띠엔화 쩡쨔이 띠엔화쭁.

전화하신 번호가 지금 통화 중 입니다.

 

您拨叫的号码不在服务区。

닌 뽀어쨔오더 하오마 부짜이 푸(ㅍ=F발음)우취.

전화하신 번호는 서비스 지역에 있지 않습니다.

 

没有这种电话号码,请确认再拨。

메이요 쪄쫑 띠엔화 하오마, 칭 췌런 짜이 뽀어.

전화하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확인하시고 다시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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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구 저쩌구) busy    Please   redial   later

라고 말한 후..

중어로 뭐라고 뭐라고 합니다..    그리고 끊어지는데....

 

보통 중국말로 하고는 영어로 다시 반복합니다

그리고 표현 방법은 지역이나 통신사에 따라 약간씩 다르기도 합니다

busy가 나왔으면 아마

" Line is busy now. Please redial later." ( 지금 통화중이니 나중에 다시 전화 하십시오 )

 정도가 아닐까 짐작됩니다

 

뛰에부치... (어쩌구 저쩌구)   라면서 중국말이 나오던데...

 

상대방이 바빠서 못받는 건 아닙니다

line is busy는 통화중이라는 뜻입니다

"뚜이부치이" 영어로 sorry에 해당합니다

자주 들리는 말은,

"우우파 지에 퉁" (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

"메이 런 지에 띠엔화" (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 등 등


닝부터융구망 칭샤오샤(타?)이부어

중국어를 모르시면서 소리나는 대로 적은 거 같은데요

닌 뿌어더 융후 망 ( 지금 전화하신 번호는 통화중입니다 )

칭 샤오 허우 짜이 뿌어 ( 잠시 후 다시 전화 해 주십시오 )

 

글자 그대로는 위와 같습니다

그런데 가끔씩은 자동 응답이 정확하지 않은 경우도 봤습니다

즉, 통화중이 아니라 없는 전화 번호인데도 엉뚱하니 통화중이라고만 한다던지..

 

뚜이부치 : 죄송합니다

칭 샤오 허우 짜이 뽀 : 조금있다 다시 걸어주세요

닌 보 따더 용후 지금거신 전화는

이렇게 기본적으로 세가지는 매번 나오는 맨트이구요

중간에 그때 상황에 맞는 말만 집어넣어서 안내 맨트를 만듭니다

 

뚜이부치 닌 보 따더 용후 이꽌지 칭 샤오 허우 짜이 뽀

전화기 전원을 꺼놓은 상태입니다

 

뚜이부치 닌 보 따더 용후 쫜스 우파 지에통 칭 샤오 허우 짜이 뽀

신호가 잘 잡히지 않는 상태입니다

 

뚜이부치 닌 보 따더 용후 이팅지

요금을 내지 않아 정지 된 상태입니다

 

뚜이부치 닌 보 따더 덴화 호마스 콩호 칭 차 정허우 짜이 보

전화 번호를 잘못 입력했을때 나오는 맨트입니다

 

 

-------------------------------------

①您拨叫的电话正在通话中

고객이 전화를 받고 있습니다

[닌 뽀(어)찌아오 더 띠엔화 쩡짜이 통화쫑]

 

②您拨叫的电话忙,请稍后再拨

고객이 전화중이므로 잠시후 전화주시기 바랍니다

[닌 뽀(어)찌아오더 띠엔화 망, 칭 샤오호우 짜이뽀(어)]

 

③您拨叫的电话已关机

고객의 전원이 꺼져있습니다

[닌 뽀(어)찌아오더 띠엔화 이 꽌찌]

 

④请不要挂机,您拨打的电话正在通话中

고객이 전화를 받고 있으므로,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칭 부야오 꽈찌, 닌 뽀(어)다더 띠엔화 쩡짜이 통화쫑]

 

⑤请不要挂机,您拨打的用户正忙

고객이 부재중이오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칭 부야오 꽈지, 닌 뽀(어)다더 용후 쩡망~]

 

⑥您拨叫的电话无法接通 

고객의 전화와 연결이 안됩니다

[닌 뽀(어)찌아오더 띠엔화 우fa찌에통~]

 

⑦您拨打的电话不在服务区

고객의 전화기가 서비스 지역에 있지 않습니다

[닌 뽀(어)다더 띠엔화 부짜이 fu(foo)우취~]

 

1,2,4,5번은 상대방이 이미 통화를 하고 있을 때이고,

3,6번은 상대방의 전화기가 꺼져 있을 때이고,

6,7번은 상대방의 전화기가 서비스 지역이 아닌 곳에 있을 때

들리는 음성 서비스 입니다.

 

6번 같은 경우는 상대방의 전화기가 꺼져 있을 때와,

서비스 지역이 아닐 때 나오는 음성이므로 어떤 때인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전화를 거절하였을 경우,

1,2,6번의 음성 서비스가 연결 됩니다.

[그러므로 신호음이 들리다가 중간에 1,2,6번중 하나의 음성 서비스가 들리면

상대방이 전화를 거절한 것입니다]

 

다음카페 꾸미피어는 항상 당신을 사랑합니다.http://cafe.daum.net/ccumipia

우리 횐님들 항상 행복하고 즐거운 나날 되세요~~~!!!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木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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