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먹는다’는 동작에는 비애가 있다. 모든 포유류는 어금니로 음식물을 으깨어 먹게 되어 있다. 지하철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자장면을 먹는 걸인의 동작과 고급 레스토랑에서 에이프런을 두르고 거위 간을 먹는 귀부인의 동작은 같다. 그래서 밥의 질감은 운명과도 같은 정서를 형성한다.
 
전 기밥통 속에서 밥이 익어가는 그 평화롭고 비린 향기에 나는 한평생 목이 메었다. 이 비애가 가족들을 한 울타리 안으로 불러 모으고 사람들은 거리로 내몰아 밥을 벌게 한다.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두 끼를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이것이 밥이다. 이것이 진저리나는 밥이라는 것이다.
 
밥벌이도 힘들지만, 벌어놓은 밥을 넘기기도 그에 못지않게 힘들다. 술이 덜 깬 아침에, 골은 깨어지고 속은 뒤집히는데, 다시 거리로 나아가기 위해 김나는 밥을 마주하고 있으면 밥의 슬픔은 절정을 이룬다. 이것을 넘겨야 다시 이것을 벌 수 있는데, 속이 쓰려서 이것을 넘길 수가 없다. 이것을 벌기위해서 이것을 넘길 수가 없도록 몸을 구부려야 한다면 대체 나는 왜 이것을 필사적으로 벌어야 하는가. 그러니 이것을 어찌하면 좋은가. 대책이 없는 것이다.
 
모든 밥벌이에는 낚시 바늘이 들어있다. 밥을 삼킬 때 우리는 낚시 바늘을 함께 삼킨다. 그래서 아가미가 꿰어져 밥 쪽으로 끌려간다. 저쪽 물가에 낚싯대를 들고 앉아서 나를 건져올리는 자가 누구인가. 그 자가 바로 나다. 이러니 빼도박도 못하고 오도가도 못한다. 밥 쪽으로 끌려가야만 또 다시 밥을 벌 수가 있다.
 
예수님이 인간의 밥벌이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을 나는 새를 보라. 씨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거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먹이시느니라.”라고 하셨다지만 나는 이 말을 믿지 못한다. 하나님이 새는 맨입에 먹여주실지 몰라도 인간은 맨입에 먹여주시지는 않는다.
 
봄에, 새잎 돋는 나무를 바라보면서 나는 늘 마음이 아팠다. 나무들은 이파리에 엽록소가 박혀 있어서 씨 뿌리지 않고 거두지도 않으면서 햇빛과 물을 합쳐서 밥을 빚어낸다. 자신의 생명 속에서 스스로 밥을 빚어내는 나무는 얼마나 복 받은 존재인가. 사람의 밥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굴러다닌다. 그래서 내 밥과 너의 밥이 뒤엉켜 있다. 핸드폰이 필요한 것이다. 엽록소가 없기 때문에 핸드폰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다들 핸드폰을 하나씩 차고 거리로 나아간다.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이 글을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밥벌이는 밑도 끝도 없다. 그러니 이 글에는 결론이 없어도 좋을 것이다. 나는 근로를 신성하다고 우겨대면서 자꾸만 사람들을 열심히 일하라고 몰아대는 이 근로감독관들의 세계를 증오한다. 나는 이른바 3D 업종으로부터 스스로 도망쳐서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인간들의 저 현명한 자기방어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근로감독관들아, 제발 인간을 향해서 열심히 일하라고 조져대지 말아 달라. 제발 이제는 좀 쉬라고 말해 달라. 이미 곤죽이 되도록 열심히 했다. 나는 밥벌이를 지겨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싶다. 친구들아,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각자 핸드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가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 - 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