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찬욱·조영욱 감독, 50주년 기념 내한공연한 영화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코네를 만나다 -


진 정한 ‘레전드’와의 만남. 지난 5월16일부터 18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데뷔 50주년 기념 내한공연 <시네마 오케스트라>를 가진 엔니오 모리코네가 박찬욱 감독을 만났다. 최근 한국영화에 깊은 관심을 보여온 그가 방한하기 오래전부터 이러한 만남을 청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게다가 거기에는 박찬욱 감독의 절친이자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쥐> 등의 영화음악을 함께한 조영욱 음악감독도 함께해 더 의미가 컸다. 이 만남은 박찬욱, 조영욱 감독이 자신들이 준비한 선물을 꺼내놓으면서 시작됐다. 박찬욱 감독은 <박쥐> 블루레이 타이틀과 <파란만장> DVD, 조영욱 음악감독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쥐> O.S.T를 준비해왔다.

세르지오 레오네의 <석양의 무법자> <석양의 갱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는 물론 <언터처블> <미션> <시네마천국> 등을 작업한 엔니오 모리코네는 현재 한국의 중견 감독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기도 하다. 박찬욱 감독은 “그의 영화음악은 그야말로 독창적이고 충격적이었다”고 말하며 조영욱 음악감독은 “그 특유의 작곡법은 후배 음악감독들에게 수수께끼와도 같은 것이었다”고 회고한다.

이처럼 먼 아시아 후배들과의 만남에 한껏 고무된 엔니오 모리코네는 사람 좋은 이탈리아 할아버지처럼 시종일관 에너지 넘치는 모습으로 대화에 임했다. 어느덧 팔순이 넘은 1928년생의 그가 종종 벌떡 일어나 이야기를 하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하지만 ‘영화와 영화음악의 관계’, 그리고 ‘엔니오 모리코네가 함께했던 이탈리아 감독들’ 등 다양한 화제로 진행되던 대화는 부족한 시간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쉬움을 가득 안고 모두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고 격려하면서 이야기는 마무리됐다.

엔니오 모리코네_ 오, 너무 기쁘다. 이런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다니 우리 집까지 정말 소중하게 가져가겠다. 너무 고맙다. 사인을 해서 줬으면 더 좋았을 텐데. (웃음)

박찬욱_ 어제 첫날 공연은 어땠나?

엔니오 모리코네_ 어느 공연이건 아쉬움이 남는다. 지휘자라면 누구나 ‘더 잘할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을 거다. 영화는 나중에 편집이 가능하지만 공연은 실수가 있으면 그걸로 끝이다. 그래서 리허설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박찬욱_ 그래서 나는 연극 연출을 하진 않을 생각이다. (웃음) 아무튼 첫 번째 질문은 좀 유치하기도 한데, 지금껏 함께 작업한 감독 중 누가 가장 마음에 들었나. 워낙 유명한 전설적인 감독들과 방대하게 작업해서 그 개인적인 느낌이 궁금하다.

엔니오 모리코네_ 너 무 어려운 질문이다. (웃음) 딱 한명을 고르긴 너무 힘들고 아주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나와 한번 이상 함께한 사람들은 다 좋은 감독들이다. 함께 작업하면서 포기한 적도 있고 처음부터 안 맞는 경우도 꽤 되니까, 그런 경우는 뭔가 잘 통하기 때문에 두번 이상 하는 거다. 마찬가지로 감독이 먼저 나와 같이 못하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박찬욱_ 여기가 이탈리아나 유럽도 아니고 그냥 실명으로 얘기하셔도 괜찮을 것 같다. (웃음)

엔니오 모리코네_ 하하. 일단 나와 잘 맞았던 감독은 1961년에 나의 영화음악 데뷔작을 함께했던 루치아노 살치 감독인데 그 뒤로도 여러 편 함께했다. 그리고 역시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을 빼놓을 수 없다. 나는 영화음악 준비기간이 길기 때문에 그런 호흡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한다.

조영욱_ 워낙 작업 속도가 빠른데다 거의 들어오는 영화를 거절하는 법 없이 활동해왔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게 과연 어느 정도까지 사실인지 궁금하다. 그리고 한창때는 1년에 20편 넘게 작업한 적도 있는데 같은 음악감독 입장에서 경이롭기까지 하다. (웃음)

엔니오 모리코네_ 지금 내가 생각해도 믿기 힘들 정도의 속도로 작업하던 때가 있었다. 나 역시 그때 어떻게 작업했는지 모르겠다. (웃음) 음악을 좋아하고 일을 사랑하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일을 즉흥적으로 시작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함께 일하고 싶은 감독과는 보통 6개월 전부터 얘기를 한다. 나는 공부를 많이 하고 신중하게 작업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준비기간이 꽤 많이 필요하다. 물론 불현듯 영감을 받아서 써나갈 때도 있지만 보통 그렇게 치밀하게 준비해야 좋은 작품이 나온다. 그러고 보니 지금 작업하기로 얘기되고 있는 작품이 3편 정도 있는데 빨리 결정해야 한다. 그래야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다.


박찬욱_ 작업의 첫 단계가 궁금하다. 한편의 영화음악을 맡는 순간, 작업을 시작할 때 멜로디나 악기 편성 등 보통 어떤 지점에서 출발하게 되는지.

엔니오 모리코네_ 특별히 어떤 요소에서 출발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늘 종합적으로 생각하는 편이다. 준비하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조영욱_ 역시 유치한 질문인데(웃음), 요즘 음악감독들은 보통 미디나 컴퓨터로 작업하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작업하는가.

엔니오 모리코네_ 오직 손으로만 한다. 컴퓨터는 전혀 쓰지 않는다. 한땀 한땀 악보에다가 연필로 직접 그린다. 그런 다음에 피아노 등 악기를 쓴다. 오래된 사람으로서 컴퓨터 같은 걸 이용하기 싫은 것도 있고 그런 작업을 내 작업처럼 여기지 못하는 고집도 있다. 컴퓨터보다 악보를 보고 노트에 그리면서 하는 게 좋다. 그러면서 영감을 받는 경우가 많다. 그건 내가 음악감독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그래왔다. 한때 볼펜으로 한 적도 있지만 막 지워야 해서 연필로 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웃음) 물론 지우개로 지우는 게 아니고 하얀 도자기 찰흙 가루 같은 걸로 지운다. 실수도 많이 하는데다 특히 화음을 맞춰야 하는 부분에서는 쉴새없이 지웠다 썼다 해야 하니까.

박찬욱_ 음악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클래식 음악작곡과를 졸업했는데 영화음악가로서 그런 훈련과 바탕이 필수라고 보는지 아니면 록밴드에서 기타를 치다가도 음악감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엔니오 모리코네_ 음악이 아닌 영화음악으로 특화해 얘기하자면 음악 역사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지식이 있어야 좋은 곡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자신이 어떻게 음악을 시작했느냐와 상관없이 영화음악가가 되고자 한다면 그에 맞는 연구와 공부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영화음악은 단순한 작곡 실력 이전에 영화가 담고 있는 시대배경에 대한 인지도 필요하고 음악 외적인 공부도 많이 해야 하기 때문이다. 테크닉만으로는 영화음악을 할 수 없다. 영화음악가가 역사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는 건 나의 오랜 지론이다. 게다가 영화에는 음악 외에도 춤 등 여러 요소들이 담기기 때문에 그 모든 걸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도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음악가가 되려면 정말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더군다나 영화음악은 혼자 하는 개별 작업이 아니라 감독의 의견을 반영하면서 자신의 개성도 드러내며, 그렇게 서로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도 중요하다. 그러면서 영화도 살고 음악도 살아야 한다.

조영욱_ 1960 년대 초부터 영화음악가로 활동해왔는데, 1960년대의 유럽은 혁명도 있었고 사회적으로 다양하고 뜨거운 욕구가 분출되던 때였다. 당신은 그 중심에서 <알제리 전투>(1966)의 영화음악을 맡기도 했고 함께한 감독 중에는 베르톨루치, 파졸리니 같은 좌파 감독들이 많았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같은데, 자신의 정치적 성향도 그러했는지 궁금하다.

엔니오 모리코네_ 음, 사실 정치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아마도 그들이 좌파 감독이어서 그렇다기보다 나에게는 다들 훌륭한 감독들이었다. 내 음악에 전혀 터치하는 것도 없었고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좋은 환경을 만들어줬다. 나는 굳이 좌파쪽이었다기보다 중립적인 위치에서 작업했다.

박찬욱이 말하는 엔니오 모리코네

그 때문에 스파게티 웨스턴을 알게 됐지



엔 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을 처음 접한 것은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들을 통해서였다. 당시 극장에서 수도 없이 개봉했지만 정작 나는 극장에서 보진 못했다. 나중에 어떻게 알게 됐냐면 집에 LP 박스 세트로 해적판 <<영화음악 골든힛트>> 그런 전집이 있었다. (웃음) 들으면서도 별 감흥이 없었는데 그중에서 나에게 유일하게 흥미를 준 게 바로 모리코네의 음악이었다. 그렇게 모리코네의 음악을 먼저 접하면서 스파게티 웨스턴 장르를 알게 됐고 나중에 TV를 통해 세르지오 레오네의 영화들을 보면서 하나로 완성할 수 있었다. 긴 세월이 흘러 영화로 보게 되니까 얼마나 반갑던지. 보통 그런 식으로 나중에 접하게 되면 실망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실망은커녕 더 기가 막히게 좋았다. 그가 영화음악을 맡은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건 역시 <황야의 무법자>(1964)에서 휘파람 소리 가득한 <Titoli>다. 세련되고 그런 게 없는데도 너무나 독특하고 충격적이었다. 그와 함께한 세르지오 레오네의 영화들은 정말 다 좋은데 레오네 외의 감독들 중에서 고르라면 역시 엘리오 페트리의 <완전범죄>(Investigation of a Citizen Above Suspicion, 1970)다.

박찬욱_ 개인적으로 <완전범죄>(1970), <노동자 계급 천국에 가다>(1971) 등을 만든 엘리오 페트리 감독을 너무 좋아한다. 그 두편에서 영화음악을 맡았다. 그 역시 대표적인 좌파 감독이었는데 그와의 작업은 어땠나.

엔니오 모리코네_ 호흡이 잘 맞는 감독 중 하나였다. 1980년대 50대 초반의 나이로 세상을 뜬 게 너무 안타깝고 속상하다. 호흡도 호흡이지만 작품세계나 작업방식 등 아주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감독이다. 엘리오 페트리 감독이 이미 5, 6편의 작품을 만든 뒤 나에게 연락이 왔었다. 지금 하고 있는 작품의 영화음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작곡자들을 계속 바꾸었다며 내게 직접 편지를 썼었다. ‘당신이 이 영화로 내가 마지막 연락하는 음악감독이 됐으면 좋겠고, 이후 당신과 함께하게 될 여러 작품들의 첫 번째 작품이었으면 좋겠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 영화는 이후 바뀌지 않고 내가 쭉 했다. (웃음) 사실 처음부터 너무 어려운 걸 부탁해서 좀 피곤하고 힘들기도 했다. 한 영화 안에서 여러 장르의 음악이 복합적으로 작동하는 경우가 굉장히 힘든데 그런 경우였다.

박찬욱_ 역시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과의 작업이 궁금하다. 그와는 처음 어떻게 만나 작업하게 됐나? 그리고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당신의 얘기를 통해 듣고 싶다.


엔니오 모리코네_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다. 유치원과 초등학교도 같이 다닌 오랜 친구다. 그런데 나중에 성인이 되어 만났을 때, 나는 그를 한눈에 알아봤는데 그는 나를 몰라보더라. 이탈리아는 흔한 성씨라는 게 없기 때문에 레오네, 모리코네, 그렇게 이름만 딱 들어도 알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내가 “야, 너 이 자식, 나 기억 안 나?” 하고 따져 물었다. (웃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그는 작업하기 어려운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이 원하는 게 확실한 대신 일단 의견 교환과 일치가 이뤄지면 내 작업에 대해 특별히 반대하는 것 없이 쭉 갔다. 늘 원하는 대로 써보라고 할 정도로 항상 나에게 우선권을 줬다. 바꿔 말해 그는 빨리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못 됐다. ‘이거 어때? 저건 어때?’ 하고 늘 주변 사람들에게 의견을 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다가도 결국은 남의 조언을 다 듣고 좋은 것만 쏙쏙 뽑아서 꼭 자기가 처음 원한 대로 갔다. (웃음) 그리고 또 기억나는 독특한 일화는 <석양의 갱들>(1971) 때였는데 극장에 스크린과 관객이 있다면, 그는 그 사이에 앉아서 스크린을 보는 게 아니라 스크린을 등지고 관객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화가 아니라 관객의 호응을 보는 거다. 관객이 너무 좋아하니까 그도 무척 기뻐했다.

박찬욱_ 세르지오 레오네의 웨스턴영화들과 당신의 음악은 정서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그 정도로 깊은 교감을 나눈 사이지만 분명 갈등도 있었을 것 같은데 어떤가.

엔니오 모리코네_ <석양의 갱들>부터 그런 조짐이 좀 있었는데 결정적으로 <무숙자>(1973)를 하면서 도중에 갈등이 있었다. 나도 세르지오 레오네도 그 작품에 완전히 크레딧이 올라간 건 아닌데, 그가 그 작품을 통해서는 코믹한 쪽으로 가고 싶어 했다. 그런데 난 이전 그의 서부극들과 너무 정서가 달라서 좀 불편했고 그 역시 그런 불화를 불편해했다. 그래서 도중에 빠지게 됐고 둘 사이가 틀어졌거나 한 건 아니다. 그 다음에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를 함께했으니까.

조영욱_ 당 신의 영화음악은 ‘조’가 잘 바뀌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사실 영화음악은 다른 작곡에 비해 조를 자주 바꿔서 가는 게 일반적인 방식이다. 당신의 과거 인터뷰를 읽어본 적 있는데 영화음악도 ‘화성’을 간단하게 가는 게 좋다고 한 걸 본 적 있다. 이에 대한 지금 생각은 어떤가.

엔니오 모리코네_ 내 스타일이 그렇다기보다 영화에 맞게끔 변화를 준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어떨 땐 단순하게 가지만 또 어떨 땐 복잡하게 한다. 이렇게 가보고 싶다는 내 고집이 있을 때는 감독을 설득해서라도 함께 나가게끔 한다. 그 대신 처음부터 그런 얘기를 꺼내진 않는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시도도 못 하게끔 바꾸자고 할까봐. 어려워도 다 쓰고 난 다음 들려주고 다시 얘기한다. 이런 방식이 좀더 창조적이고 자기만족이 큰 것 같다. 안 그러면 지루하고 따분해서 영화음악 일을 계속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지금 이 나이에 생계 걱정을 하는 것도 아니고 언제든 일을 그만둬도 상관없지만 영화음악가로서 내 만족감이 중요하다. 계속 흡족하게 일하고 싶고 또한 계속 곡을 쓰고 싶다.

박찬욱_ 당 신의 얘기대로 음악은 완성해서 들려주기 전까지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 게다가 완성된 영화를 보고 작곡을 하는 게 아니라 그 정서나 느낌을 불완전하게 끌어안은 채로 작곡을 해야 한다. 말하자면 감독과 ‘이런 음악이면 좋겠다’고 대화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불분명한 작업인데, 당신 같은 위대한 영화음악가들은 감독과 과연 어떻게 소통하는지 궁금하다.

엔니오 모리코네_ 한 일화를 들려주는 게 알맞을 것 같다. 한번은 이탈리아에서 10명의 이름있는 작곡가들을 불러 미팅을 하면서 영상만 있는 한 영화를 보여주고 이에 맞는 영화음악을 똑같이 작곡해보라고 한 적 있다. 모두가 동등하게 감독과 각자 얘기할 시간도 주어졌고 서로 커닝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게 내용도 알고 단 한명의 감독과 대화를 나눈 것임에도 그 10명의 음악은 하나같이 다 달랐다. 결과적으로 10명의 작품 모두 좋았다. 취향은 달라도 정말 다 멋있었다. 그들 중에서 누구의 음악이 가장 좋았다고 말하기 힘든 정도였다. 어쩌면 그런 게 바로 영화음악이 어렵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당신이 말한 그런 불확실성 속에 놓인 영화음악가의 운명 같은 게 아닐까 싶다.

박찬욱_ 영화음악 작업을 하다 보면 어디서 시작해서 어떻게 끝내야 하나, 하는 것도 여전히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영화 전체의 인상이 달라지기도 하니까. 당신은 그런 고민을 어떻게 해결하나.

엔니오 모리코네_ 나 역시 어려운 문제다. 그런데 바꿔 말하면 어디서 시작하고 끝내야 할지 결정하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그보다 더한 어려운 문제들이 많다는 걸 알아야 한다. 가령 작곡가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 감독의 요구와 나의 방향 사이에서 만족스런 합일점을 찾는 것 등 내가 볼 때는 그보다 더한 어려운 문제들이 많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하다. (웃음)

박찬욱_ 그러면서 가장 허탈할 때는 음악감독과 마음이 잘 맞아서 아주 멋지게 시작과 끝도 맞추고 특정한 곡 역시 좋게 잘 작업했는데, 나중에 영화 전체적으로는 그걸 빼고 보니까 영화가 더 좋게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는 사실이다. (웃음)

엔니오 모리코네_ 하하. 아까 얘기한 대로 물론 나 역시 어디서 시작하고 끝내야 하는지 결정하는 게 늘 어려웠고, 당신이 얘기한 그런 고충을 느낄 때도 많았다. 충분히 이해한다. 나와 세르지오 레오네도 그러했지만 당신들 두 사람처럼 친구이기 때문에 좋은 점도 그런 것들이다. 감독과 영화음악가가 단순한 업무 관계 이상으로 그런 문제를 포함해서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 관계라는 것, 그것만큼 큰 힘이 되고 좋은 것도 없다. 두 사람이 앞으로도 멋진 영화를 계속 더 만들었으면 한다. (웃음)

조영욱이 말하는 엔니오 모리코네

<석양의 무법자> 음악, 실험성이 가득해



엔 니오 모리코네가 작업한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건 역시 <석양의 무법자>(1966)다. 사이키델릭 록을 떠올리게도 하는 사운드트랙인데 모리코네의 기타 사운드는 록음악에서 온 게 분명하다. 심지어 나중에는 역으로 여러 다른 록 뮤지션들에게도 영향을 끼친 것 같다. 그의 영화음악의 가장 큰 매력은 역시 간결함과 단순함이다. 그의 60년대 후반과 70년대, 그리고 80년대는 굉장히 많이 다르다. 60년대는 오히려 록음악에 가까울 정도로 실험성이 굉장히 강했는데 조성(調性)을 부정하는 현대음악의 무조주의적 성격도 많이 드러난다. 그러다 80년대 이후에는 그런 게 싹 사라졌다. 인터뷰에서 화성에 대해 물어봤던 건, 그가 과거 인터뷰에서 화성의 간결함이 주는 임팩트가 있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조 바꿈을 잘 안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디 마이너에서 시작하면 거기서 끝냈을 정도로 실제로 당시 그의 음악이 그랬다. 덧붙여 그의 정치관에 대해 물었던 이유도, 당시에는 사회적 분위기도 그렇고 함께 작업한 좌파 감독들의 면면이 그러하니 과연 그런 정치, 세계관에 깊이 발을 담그지 않고서 그런 오랜 기간의 작업은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묻고 싶었던 거다. 그렇게 실험성 가득했던 모리코네의 60년대가 너무 궁금했다.

(사진) 오계옥 klara@cine21.com

(정리) 주성철 kinoeyes@cine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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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란물 유포죄

잡동사니 2012. 1. 30. 17:53

음란물유포죄가 되어 처벌됩니다.

법정형은 아래 법조문대로 1년이하 징역 또는 1천만원이하 벌금형입니다.

실제 처벌수준은 기소유예처분이 일반적입니다.

음란물유포죄는 피해자가 고소를 하건 안하건 상관없이 제3자 신고.수사기관의 인지수사가 가능한 죄입니다. 보호법익이 통신망의 건전한 문화이기 때문에 합의할수 없는죄입니다.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제44조의7(불법정보의 유통금지 등) ① 누구든지 정보통신망을 통하여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정보를 유통하여서는 아니 된다.

1. 음란한 부호·문언·음향·화상 또는 영상을 배포·판매·임대하거나 공공연하게 전시하는 내용의 정보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제74조(벌칙) ①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2. 제44조의7제1항제1호를 위반하여 음란한 부호·문언·음향·화상 또는 영상을 배포·판매·임대하거나 공공연하게 전시한 자

 

여기까지가 질문내용에 대한 답변이고 만약 동영상 주인공이 명예훼손으로 고소까지하면 사이버 명예훼손죄도 추가됩니다. (어디서 캡쳐해오건 말건 상관없습니다. 그런 음란영상.사진은 허락없이 올린다는거 자체가 명예훼손행위가 됩니다.)

음란믈유포는 고소필요없이 수사기관의  인지수사가 가능하나 명예훼손은 (반의사불벌죄이긴 하지만) 현실적으로 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 수사가 됩니다.

명예훼손죄는 피해자와 합의할수 있는죄입니다.

 

음란물유포죄+명예훼손죄(합의안된경우)가 되면  100만원벌금이 일반적인 처벌수준입니다.

명예훼손죄가 합의되면 처벌이없고 음란물유포죄에 대해서만 처벌됩니다.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제70조(벌칙) ① 사람을 비방할 목적으로 정보통신망을 통하여 공공연하게 사실을 드러내어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③ 제1항과 제2항의 죄는 피해자가 구체적으로 밝힌 의사에 반하여 공소를 제기할 수 없다.

 

그리고 만약 동영상을 직접 촬영한 사람이 인터넷에 올리면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  13조 1항의 죄가 됩니다.

이죄가 되려면 피촬영자의 의사에 반해서 촬영했을 경우에만 성립됩니다.

만약 서로 합의하여 촬영한 후에 올린경우는 카메라이용촬영죄는 되지 않고 올린행위만 정통법 음란물유포죄로 처벌됩니다.

이죄가 되면 일반적으로 300만원 내외의 벌금형이 일반적입니다.

카메라이용촬영죄는 합의할수 있는 죄이기는 하나 합의해도 처벌수준이 낮아질뿐 처벌자체가 면해지는 죄가 아닙니다.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 제13조(카메라 등을 이용한 촬영) ① 카메라나 그 밖에 이와 유사한 기능을 갖춘 기계장치를 이용하여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의 신체를 그 의사에 반하여 촬영하거나 그 촬영물을 반포·판매·임대 또는 공공연하게 전시·상영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영리목적으로 올리면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  13조 2항의 죄가 됩니다.

이죄가 되면 300내외 벌금 또는 집행유예가 일반적입니다.

피해자가 명예훼손으로도 고소하면  합의되면 집행유예가 유력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실형(감옥가는거)이 선고될 확률이 높습니다.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 제13조(카메라 등을 이용한 촬영)② 영리를 목적으로 제1항의 촬영물을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2조 1항 1호의 정보통신망을 이용하여 유포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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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사회부 기자 “난 기사쓰는 기계였다”
반성문 쇄도 “우리 뉴스 봐도 가슴이 뛰질 않아” “시민 피하려 몰카 취재하기도”
조현호 기자 | chh@mediatoday.co.kr  


입력 : 2012-01-12  14:49:53   노출 : 2012.01.12  15:13:56

편파뉴스 책임자 퇴진 투쟁을 벌이기 시작한 MBC 기자들이 지난 1년 간 ‘내가 하루 한꼭지 인터뷰·촬영하는 기계처럼 느낀 적이 많았다’, ‘시민들의 눈을 피해 6mm와 몰래카메라로 취재하는 법도 논의했다’는 등 기자 스스로의 책임을 통감하는 반성문을 쏟아내고 있다.

MBC 기자회(회장 박성호) 비상대책위원회가 12일 발행한 특보2호에 실린 ‘지난 1년, MBC 기자는 반성한다’에는 현직 MBC 사회부 기자와 영상취재부 기자(카메라기자)가 쓴 반성의 글이 실렸다. 이 글은 모두 익명으로 게재했다.

사회부 기자는 자신이 지난 1년간 기자의 열정과 사명감이 사라졌다는 ‘섬뜩한’ 자기반성으로 글을 시작했다. 집회장소에 가도 현장의 열기와 공분을 전해야겠다는 사명감은 사라진채 ‘충돌이 있으면 리포트, 없으면 단신’이라는 생각을 하거나, ‘물대포를 쏠지 말지’가 더 궁금해했다는 것.

이어진 그의 자기반성은 자신을 ‘뜨거운 가슴’이 사라진 이미 기계가 돼버린 모습으로 표현했다.

“소외되고 낮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기자로서의 의무감도 새겨본지 오래됐습니다. 계절별로 유행하는 것들, 조심해야 할 것들에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기자로서 당연히 ‘왜?’라는 질문은 항상 달고 다녀야 하겠지만, 그 ‘왜’ 다음에는 늘 시시콜콜한 단어들이 덧붙었습니다. ‘왜 더울까?’, ‘왜 추울까?’, ‘왜 인기일까?’.”

   
지난해 11월 24일 방송된 MBC <뉴스데스크>

그는 “기자라는 직업을 택했고 또 선택받은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옳고 그름의 판단조차 기사에 반영하지 못한 적도 있다”며 급기야 “누군가가 시켜서, 어떻게든 ‘한 꼭지’ 해야 해서, 인터뷰와 촬영을 섭외하는 ‘기계’가 됐다고 느낀 적이 더 많다”고 고백했다.

이 사회부 기자는 “어떤 것들은 왜 이 기사는 나가지 않는지 궁금해 하면서도, 그 날 밤 뉴스데스크가 끝나면 애써 잊어버리려고 노력하기도 했다”며 “그렇게 서울대 법인화 갈등과 김문수 119 전화 논란 ‘등 등 등’을 전달하거나 혹은 전달하지 않았다”고 반성하면서 ‘섬뜩한’ 자신의 현재를 써내려갔다.

“어느 순간부터 뉴스데스크에 나가는 제 리포트를 보면서 더 이상 가슴이 뛰질 않습니다. 동료 선후배들과 함께 내가, 아니 우리가 만든 리포트를 사회부에서 당당히 가슴 펴고 지켜보며 통쾌함을 느꼈던 것이 도대체 언제 기억인지 가물가물합니다.”

그는 이어 “타사가 제작한 것들 우리는 안 한 것은 없는지, CCTV 풀된 기사 놓친 것은 없는지, 그런 것들에 조마조마하며 사회부에 앉아서 뉴스를 모니터한 기억이 더 많다”며 “입사 이후 계속 이렇지는 않았는데, 지난 1년 새 달라졌고, 1년 새 반성할 것들이 이렇게 많아졌다”고 강조했다. 그는 “굳이 반성문이라고 칭한 것은 ‘덤비고’, ‘개기고’, ‘따지지’ 못 하고 그냥 ‘흘러버린’ 점에 대한 수치심 때문”이라고 비통해했다.

그는 지난 1년 간 기자를 희망하는 후배들을 볼 때도 민망하고 부끄러웠다며 일화를 소개했다. 기자 지망생들이 “MBC는 왜 이렇게 사건사고 많이 해요”라고 물었을 때 그는 “‘시청률 때문이겠지’라며 제가 아닌 다른 누구를 대신 변명해 주듯 말했다”고 전했다.

이 사회부 기자는 “다시 당당하게 취재하고, 통쾌하게 리포트하고, 멋있게 남들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희망하며 “아시겠지만 저는 사회부 기자”라고 자신을 위안했다.

이와 함께 MBC 영상취재부 소속의 한 카메라 기자는 글에서 지난 1년간 자신이 좀비처럼 살았다고 반성했다.

그는 “해야 할 말을 못했고, 보여줘야 할것에 눈감았으며, 냉소와 무기력만이 남아 좀비처럼 내 영혼을 이끌고 다녔다”며 “그러는 사이 시민들은 등을 돌렸고, 권력은 활개를 쳤으며, 우리는 무딘 칼끝마저 겨누지 못 한채 침몰하는 MBC를 천천히 목도하고 있었다”고 개탄했다.

카메라기자는 “김재철 사장이 선임되면서부터, 이러한 비극은 충분히 예견 가능했지만 이리도 빨리 흔들릴 줄은 몰랐다”며 “장관 후보자의 부동산 투기의혹과 4대강 사업 논란, PD수첩 사과방송과 KBS 도청의혹 등, 정권에 부담이 될 만한 뉴스들은 알아서 큐시트에서 빠지기 시작했고, 이는 점점 더 심한 자기검열의 악순환으로 이어졌다”고 썼다.

이 기자는 “서울시장 선거와 내곡동 사저의혹 보도에선 노골적인 편들기를 보여주었고, 이때부터 시민들은 MBC에 가졌던 실낱같은 기대마저 거두기 시작했다”며 “그 대가는 참 아팠다”고 털어놓으며 그 아픈 ‘대가’를 소개했다.

“FTA 비준안이 국민적 관심사이던 지난해 11월 처음으로 나는 수많은 시민들의 공적이 되어있었다. 잠시만 한눈팔면 어김없이 카메라의 MBC로고가 찢겨져나갔고, 인터뷰는 번번이 거절당하기 일쑤였으며, 시민들의 눈을 피해 6mm와 몰래카메라로 취재하는 법을 동료들과 논의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난해 11월 24일 방송된 MBC <뉴스데스크>

그는 이어 “(무엇보다) 불신의 눈초리로 우리를 바라보던, 한때는 우리를 지지했던 수많은 시민들의 분노가 무엇보다 힘들었다”며 “이혼재판을 앞둔 부부의 탄식처럼,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까지 돼버렸을까’ 하는 자괴감이 스스로를 파고들었다”고 했다.

카메라 기자는 “국민을 배신한 MBC의 처참한 현실 앞에, 도저히 믿기지 않았고 믿을 수 없었던 ‘경멸’이 자리하고 있었다”며 “차갑기만 한 이러한 시선을 우리는 어떻게 거두게 할 것이며, 신뢰를 회복하기까지는 또 얼마나 많은 수모가 남아있는 것인가”라고 탄식했다.

그는 그래도 MBC에 드리운 어둠을 “새벽의 미명을 목전에 두고 있기에 지금의 어둠이 더 칠흑 같고 암담하게 느껴지는 것”이라며 “지난 1년간의 암흑기가 충분히 길고도 깊었기에, 서서히 시작되는 밝음의 기운이 더없이 반갑고 고맙기만 하다”고 그의 ‘희망’을 표현했다.


MBC기자 “요즘 우리뉴스 보면 여성잡지 같다고”
경제부 기자 “1분30초 떼우는 기자돼있었다” 반성…기자들 25일부터 제작거부
조현호 기자 | chh@mediatoday.co.kr  


입력 : 2012-01-21  15:47:12   노출 : 2012.01.21  16:37:46

MBC 기자들이 편파보도에 반발해 뉴스책임자 사퇴를 요구하며 오는 25일부터 전면적인 제작거부에 들어가기로 했다. 마이크를 놓기에 앞서 이들은 그동안의 자신 스스로의 뉴스를 되돌아보며 개탄하는 목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MBC의 한 경제부 기자는 최근 MBC 기자회(회장 박성호) 비상대책위원회에 보내온 글을 통해 과거 한 후배의 말을 소개했다.

“그 아이템 선배가 먼저 하겠다고 하신 건 아니죠? 제 친구가 요즘 MBC뉴스 보고 있으면 여성 잡지 보는 것 같대요.”

이 기자는 “뉴스를 함께 보다 장난처럼 가볍게 던진 후배의 말이 제 마음엔 한동안 무겁게 내려앉았다”며 “자의인지 타의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시청자들이 우리 뉴스를 외면하고 조소하는 사이, 저는 주어진 1분 30초를 그저 ‘때우는’ 경제부 기자가 되어 있었다”고 탄식했다.

   
지난해 12월 18일 방송된 MBC <뉴스데스크>

MBC 9시 <뉴스데스크> 에는 그동안 민감한 정치와 사회 현안이 우리 뉴스의 큐시트(메인뉴스에 방송될 뉴스목록)에서 사라진 대신, 그 빈자리는 ‘생활 친화적’ 이라는 경제 뉴스로 적잖이 채워져왔다. 이를 두고 이 기자는 “‘방송되어야 할 것’이 방송되지 않았다는 말은, 뒤집어보면 ‘방송에 안 나가도 될 것’이 방송됐다는 의미”라고 평가했다.

제작과정에서 기자들의 판단과 소통도 수차례 묵살됐다. 이 경제부 기자는 “기자의 판단과 보고보다는 통신사(연합뉴스·뉴시스 등) 기사의 한 줄에 더 무게감이 실렸고, ‘편집부의 주문’이라는 말에 더 이상의 대화는 이어지기 어려웠다”고 전했다.

무엇보다 그는 “일방적인 지시에 따라 쓴 기사에도, 좋지 않은 평가가 나오면 그 책임을 일선 기자에게 떠넘기는 분위기”도 참기 어려웠지만, “‘경제부는 먹고, 입고, 타는 것으로 아이템을 찾아줬으면 좋겠다’는 한 선배의 말씀을 전해 듣고는 씁쓸한 마음 감출 길 없었다”고 괴로워했다.

그는 자신이 ‘경제부 기자’의 모습에 충실했는지 돌아보니 ‘FTA’와 ‘4대강’ 등 굵직굵직한 경제 현안에 대한 보도자료가 쏟아져 나올 때마다, ‘불편한’ 뉴스거리를 찾아보려고 노력했는지 자문하게 됐다고 반성했다.

“‘이게 왜 뉴스가 되지?’라는 의문을 ‘그냥 하고 오늘만 넘기자’는 무사안일로 손쉽게 대체하지는 않았는지 되물어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 또한 우리 뉴스의 신뢰도 추락을 방조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이런 임무 방기를 해온 데 대해 이 기자는 △기업을 비판하는 기사를 썼더니 “MBC는 만만한 게 기업이라서 우리만 조져”라며 뜬금없는 항의를 해 오는 홍보 담당자들의 말이 듣기 싫어서 △하루 종일 취재하고 기사 쓰고 편집을 끝낸 뒤 찾아오는 공허함이 반복되는 게 무서워서였다고 기재했다.

그는 “뉴스데스크에서 자신의 이름으 로 기사를 끝맺음하는 사람들이 적어도 동일한 수치심은 느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쉽고 보기 편한 뉴스가 시청자들의 눈을 잠시 붙잡아둘 순 있어도 마음을 붙잡아둘 순 없다는 단순한 사실을 깨닫는 데 걸린 시간, 이제,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라고 되물었다.

   
지난해 12월 17일 방송된 MBC <뉴스데스크>
Posted by 木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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