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연수원의 현실.jpg

필명숨김
2012.01.25 09:00:48

지난 19일 경기 일산 사법연수원에서 1년차 연수생들이 강의실앞 벤치에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다. 연수생들의 가슴에 최근 학업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동기생을 추도하는 검정 리본이 달려 있다. /정지윤기자

사법시험 합격자 연 1,000여명 시대가 열린 지 5년. ‘사시 합격=판·검사’라는 등식은 사라진 지 오래다. 주변의 선망과 찬사를 즐길 여유는 없다. 300등내 임관이란 좁은 문을 뚫기 위한 무한경쟁만 있을 뿐. 시험 벌레로 내몰리는 사법연수원생의 실태와 연수원 교육의 개선 방향을 살펴본다.

사법연수생 1년차 이모씨(32). 보름 전인 지난 11일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자신의 아파트 10층에서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2학기 시험을 한 주 앞두고서다. 고교 때는 전국 수석도 했던 그다.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4년 공부 끝에 모두가 선망하는 사법시험에 합격했지만 정작 마지막 관문에서 그는 손을 놓아버렸다.

“같은 내용을 대여섯번 읽어도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땀이 나서 기록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이씨가 평소 가족들에게 남긴 얘기다.

사법연수원은 전쟁터다. 사시 합격자 1,000명 시대를 맞으면서부터다. 일가 친척이나 친구들은 사시에 합격했다면 당연히 판·검사 되는 줄 알고 있다.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연수원 2년간의 성적에 따라 180등까지 판사, 300등까지 검사가 된다. 예전에는 임관이 안돼도 변호사로 개업하면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안정이 보장됐다. 요즘엔 ‘백수 변호사’가 흔한 풍경이다. 300위 안에 들기 위한 경쟁이 필사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고3 수험생은 저리 가라다. 고3들은 그나마 친구들과 동병상련의 정이라도 나눈다. 연수원은 아니다. 바로 눈 앞의 동기생들에 앞서야 ‘벼슬’을 할 수 있다.

사법연수생은 아침 6~7시 기상, 오전 10시~오후 5시30분 수업, 저녁 식사후 도서관행이라는 꽉 짜여진 일과를 되풀이한다. 대부분이 새벽 2~3시까지 책상에 붙어 있다.

“사시는 예선이고 연수원이 본선”이란 자조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중간에라도 끼기 위해서는 고시 공부할 때의 2~3배는 해야 한다. 연수생들은 ‘정상적으로 공부하면 하위권’ ‘열심히 하면 중위권’이라고 한다. 현재 연수원 2년차(36기) 1등은 여성. 그녀는 매일 새벽 5시까지 공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잠을 거의 안자는 셈이다. 1주일에 한번 일요일에 시체처럼 몰아서 잔다. 이렇게 독종, 별종처럼 해야 상위권에 낄 수 있다.

‘독종’들끼리의 경쟁은 더 치열하다. 검사보다는 판사, 지방보다는 서울에 가기 위해서다. 군미필 남자들은 군법무관을 갈지, 공익법무관을 갈지도 경쟁이다. 판·검사에 임용되려면 군법무관 출신이 한결 유리하기 때문이다.

학업 스트레스가 가장 심한 때는 1년차 1학기. 왕년에 전교 1등 안해본 적이 없고, 사시 합격을 이뤄냈다는 자부심에 꽉 차 있는 1,000명이 스타트라인에 함께 서 있는 때다. 비슷한 실력자들을 한 곳에 가둬놓고 경쟁을 시키기 때문에 스트레스는 한계에 다다른다.

1년차 박모씨(30·여)는 “1학기 평가가 끝나고 주임교수에게 ‘넌 왜 그렇게 처지느냐’는 얘길 들었다. 태어나서 처음 들어본 말이었다. 충격이 엄청났다”고 말했다. 그는 “남들 공부하는 시간에 나만 뒤처질까봐 불안해서 아프지도 못한다”고 했다.


아무래도 ‘만학도’보다는 ‘소년 등과생’, 남자보다는 나이 어린 여성들이 학습 적응에서 한참 앞서 나간다. ‘연수생 70%는 우울증 환자일 것’이라는 믿거나말거나식 얘기도 공공연하다.

연수생들의 경쟁 부담감은 가족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최근 상을 당한 한 연수생은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가족들이 기말고사를 치르는 아들의 처지를 생각해 연락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발인 전날에야 영정 앞에 회한의 절을 올릴 수 있었다.

고시촌 생활부터 경쟁에 시달려온 연수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만성위염 같은 잔병을 앓고 있다. 비타민은 기본이고 몸에 좋다는 보약 한두 종류는 누구나 복용한다. 구 소련 KGB가 개발했다는 각성제가 잠을 쫓는데 효과가 있어 누구누구가 먹고 있다는 소문도 돈다. 회식은 기피대상 1호다. 한 자리에 앉아봤자 이런저런 핑계로 술을 안 마시는 동료가 있는데 나만 마시면 손해라는 인식 때문이다.

1년차 김모씨(27)는 “교수가 바뀔 때마다 자기 소개서를 쓰는데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가겠다’고 쓴 동료들을 보면 소름이 돋는다”고 말했다. 그는 “연수생 사이 우스갯소리 중 법조인에게 가장 중한 처벌은 ‘사법연수원 1년형에 처한다’는 말이 있다”고 했다.

〈김동은·강병한·임현주기자〉

[사법연수원 25時] 법조인생 걸린 평가 ‘2년 고행’

사법연수원은 국내 유일의 법조인 양성기관이다. 사법시험 합격자를 교육시킨다. 대법원 산하조직으로 1971년 문을 열었다. 서울 서초동에서 2001년 말 일산으로 옮겨왔다.

사법연수원은 2년 과정으로 총 4학기로 운용된다. 3개 학기는 연수원 내에서 강의와 평가가 이뤄지고, 2년차 상반기(3번째 학기) 때에는 ‘검사 시보’ 등의 이름으로 법원, 검찰 등으로 실무수습을 나간다.

연수원에서는 원칙적으로 석차를 내지 않는다. 본인의 학점만 통보해 준다. 그러나 자신의 성적 위치를 알 수 있도록 연수생 성적을 100명 단위로 끊어서 200등은 평점이 몇 점, 500등은 얼마인지 게시판에 공고해준다. 내 성적이 3.5점인데 100등의 평점이 3.7, 200등이 3.3점이라면 나는 150등 정도이겠구나 하는 식이다.

연수생 숫자가 많다보니 연수원 생활은 반(班)·조(組) 위주로 운용된다. 한 반 60여명, 한 조에 20여명씩이다. 동료 연수생들 간 분위기는 1990년대와는 확연히 다르다고 한다. 경 쟁이 치열해지면서 다른 반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반원과도 말 안하고 지내는 연수생이 속출할 정도다. 연수원 반 배정은 성적, 성별, 출신학교 등을 고려해 연수원측에서 정한다. 각 조별로 지도교수가 있다. 현직 중견 판·검사들이다.

연수원에는 기숙사가 있다. 정원은 400명이다. 연수생이 2,000여명이기 때문에 모두 다 기숙사에 들어갈 수는 없다. 가까운 일산에 집이 있거나 기혼자 중 일부를 제외하고는 연수생 대부분은 인근 오피스텔에 방을 구해 지낸다. 연수원은 ‘토털 아날로그 시스템’이다. 뭐든지 손으로 써야 한다. 숙제도, 리포트도, 필기도, 시험도 다 수(手)작업이다.

〈이인숙기자 sook97@kyunghyang.com

[사법연수원 25時] 한과목 8시간 ‘공포의 시험’ 두차례

사법연수원 수료의 가장 큰 고비는 공포의 ‘8시간 시험’이다. 2학기(1년차 2번째 학기)와 4학기에 치러진다. 민사 판결문, 형사 판결문, 검찰 공소장 작성 시험 등이다. 과목당 8시간씩 본다.

시험은 얇은 책 한권 분량의 사건 기록을 나눠주면서 시작된다. 연수원 교수들이 만들어낸 가상의 사건이 시험 문제다. 사건은 복잡하기로 ‘악명’이 높다. 10여명의 등장인물이 얽히고 설켜 있다. 연수생들은 ‘신 시티’(sin city·온갖 추잡하고 끔찍한 사건들이 벌어지는 범죄 도시를 그린 소설·영화 제목)라고 부른다. 등장인물들에 대한 적용 죄목만 10가지를 훌쩍 넘는다.

올 초 연수원을 마친 서울중앙지법의 한 예비판사는 “기록을 다 읽는 데만 꼬박 3~4시간이 걸린다. 중간에 메모하고 8절지에 개요를 그려가며 사건을 정리한다. 아차 실수하면 엉뚱한 방향으로 가게 된다”고 말했다.

시험시간은 오전 10시~오후 6시. 식사 시간은 없다. 12시가 되면 연수원측에서 “건강을 위해 점심을 꼭 챙겨 먹으라”는 안내방송을 하지만 실천하는 사람은 없다. 아예 점심을 굶거나, 한 손으로 기록을 넘기며 미리 준비해온 연양갱·바나나·방울토마토·김밥 등을 집어 먹는다.

화장실을 가기 위한 별도 휴식시간도 없다. 한 번에 한 명씩, 교실에 걸린 화장실 열쇠를 들고 번갈아가며 다녀온다. 지정된 화장실 앞에는 공익근무요원이 지켜 서있다.

판결문은 손으로 직접 쓴다. 보통 A4용지 20~30페이지를 써야 한다. 채점은 감점 방식. 쉼표 하나, 마침표 하나 잘못 찍으면 점수가 깎인다. 판결문 양식에 얼마나 맞게 쓰느냐가 중요하다. 사건 개요가 복잡하고, 꼼꼼한 기록작성 능력이 요구되기 때문에 기억력 좋은 나이 어린 여성 연수생의 성적이 좋다. 시간 때문에 판결문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 2학기 시험은 10일동안 진행된다. 8시간 시험 다음 날엔 좀 쉬운 시험을 보고, 그 다음날 다시 8시간 마라톤 시험을 보는 식이다.

4학기 시험의 경우 5과목을 하루 걸러 한 과목씩, 총 10일간에 걸쳐 실시된다. 성적 반영은 법원과 검찰이 조금 다르다. 법무부는 마지막 4학기 성적에 2배 가중치를 둔다. ‘8시간 시험’ 비중이 크기 때문에 연수생들의 심리적·육체적 부담은 만만치 않다. 한 예비판사는 “시험이 끝났을 때는 5㎏이 빠지고 거의 탈진 지경이었다”고 술회했다.

〈이영경기자 samemind@kyunghyang.com

[사법연수원 25時]中. “절반이상 선행학습…3천만원 과외도”

고3 수험생과 사법연수원생은 닮은 꼴이다. 고3에게 국·영·수가 있다면 연수원생에게는 ‘민·형·검’이 있다. 민사재판 실무·형사재판 실무·검찰 실무를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수능 과목이 아닌 시간에 고3생들이 자듯, 연수생들 또한 성적 평가와 무관한 특강 시간에는 부족한 잠을 청한다. 이수 학점이 낮은 강의 시간에는 다른 공부를 하는 것도 고3과 똑같다.

“훌륭한 외부 강사를 모셔와 특강을 열어도 연수생들 반 이상은 잔다. 강사에게 민망할 정도다. 눈 앞의 이익에만 급급하면 안된다고 얘기하지만 먹혀들지 않는다.”

사법연수원 교수를 지낸 한 부장판사는 “연수생들이 정신적·육체적으로 피폐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매년 수업내용이 똑같은 과목은 연수원 앞 복사집을 찾으면 된다. 진도도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복사집 아저씨가 시간표에 맞춰서 그때그때 예년 숙제와 모범답을 복사해놓는다. 임대차·근저당·매매계약 등의 숙제는 복사집 아저씨 자료를 받아 이름과 액수만 바꿔 내면 끝난다.

초·중·고에 유행하는 ‘선행학습’에 연수원도 예외는 아니다. 연수원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미리 학원을 다니고 과외를 받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올 연수생들 절반 이상이 선행학습을 받았을 것이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이달 중순 2차시험 합격자가 발표되자마자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는 당장 4곳의 학원이 사법연수원 예비과정을 개설했다. 25일 교육내용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ㅂ학원 관계자는 “사법연수원에서 배우는 것과 똑같다”고 밝혔다. 예비 합격자 시절부터 내년 3월 연수원에 들어갈 때까지 주요 과목을 떼는 식이다.

이런 학원은 한 과목 코스 강의가 60만원선. 효과가 있기로는 연수원 출신 군법무관이 하는 한 회당 30만원짜리 강의가 정평이 나 있다. 연수원 커리큘럼 그대로 한다고 해서 제법 입소문이 퍼져 있다. 몇 과목 제대로 들으면 강의료만 3천만원이 훌쩍 넘는다는 전언이다.

1년차 박모씨(29·여)는 “이런 강의는 돈 있는 애들이 비밀리에 모여서 하는 거라 외부에 드러나지 않는다. 연수원 교육과정을 미리 실습시켜 줘 효과가 있다고 한다”고 말했다.


1980~90년대에 인기를 끌었던 노동법연구회, 인권법학회, 사회보장법학회 등은 연수생들을 유혹하는 스터디그룹이지만 마음뿐, 발길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게 현실이다.

지난 1학기 체육대회 때는 축구시합에서 몇몇 반이 초반에 탈락하자 공부하기 위해 일부러 떨어졌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다른 반 학생들의 불만이 쏟아졌다. 연수원측은 결국 패자부활전을 만들어 탈락한 반도 계속 시합을 하도록 했다. 1년차 김모씨(28)는 “단 한명이라도 그 시간에 공부를 한다면 나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경쟁 속에서도 동문 챙기기는 계속된다. 요즘엔 외국어고 출신들끼리 은밀히 뭉치는 게 두드러진다. 연수원 교수를 지낸 ㅇ판사는 “외고출신끼리 자기들만의 모임을 만들어 서로 밀어줘 사시 성적은 별로인데 연수원 성적은 쑥쑥 올라가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김용석·임현주·강병한기자 kimys@kyunghyang.com

[사법연수원 25時] ‘공부시간 벌기’ 휴학 속출

사법연수원 휴학생이 매년 늘어나고 있다. 사법시험 합격자 1,000명 시대를 연 2001년 20명이던 휴학생은 지난해 46명으로 급증했다.

휴학의 가장 큰 이유는 건강문제. 연수원 관계자는 “살인적인 학습량과 성적 스트레스로 병을 얻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하지만 다른 연수생들은 공부 시간을 1년 벌기 위해 휴학한 것이 아니냐며 곱지 않은 시선이다. 모 사립 명문대학을 수석졸업한 한 여학생도 지난해 원하는 성적이 나오지 않자 휴학한 것으로 알려졌다.

성적 끌어올리기를 위한 휴학을 막으려고 연수원측은 갖가지 묘수를 짜내고 있다. 한때 연수원은 복학생에게는 최고 성적을 B+로 제한했다. 판·검사 임관이 가능한 300등 이내 성적을 유지하려는 얌체 휴학을 막기 위해서다. 복학생들 시험은 별도로 채점하는 방식도 시도했다.

그래도 늘어나는 휴학생을 막지 못하자 연수원은 휴학을 하려면 ‘장기간 휴식’이 필요하다는 의사진단서를 제출토록 하고 휴학 이전에 치른 시험에는 재응시할 수 없도록 했다. 이 때문인지 올해는 휴학생이 10월 현재 28명으로 증가세가 조금 주춤해졌다.

아예 연수원 입학을 미루는 입학유예자도 속출하고 있다. 휴학 요건이 까다로워지면서 입학을 1년 미루고 충분한 준비시간을 갖기 위해서다. 입학유예자는 2003년 63명(6.95%)에서 2004년 83명(8.23%), 지난해 106명(10.59%)으로 갈수록 늘고 있다.

입학유예자는 대학을 갓 졸업했거나 대학 3~4학년 재학중 합격한 ‘소년 등과생’이 주종을 이룬다. 이들은 연수원에 먼저 들어간 고교·대학 선배·친구들을 통해 연수원 교육과정을 미리 귀띔받고 1년간 꾸준히 선행학습을 한다.

〈조현철기자 cho1972@kyunghyang.com

[사법연수원 25時]시험 2주전부터 ‘질문중지’

사법연수원 운영의 철칙은 형평성이다. 수업 내용은 물론 진도도 16개반이 똑같다.

학기 초 시간표가 나오면 진도도 ‘○월 ○일 강의는 ○쪽까지’로 일괄 정해진다. 교수 16명이 돌아가면서 수업 준비를 한 뒤 수업 전 다같이 모여 수업내용을 조율한다.

연수원측은 예측가능한 모든 오해와 시비를 없애기 위해 뭐든지 ‘똑같이’ 하고 있다. 연수생들이 1~2점 차를 놓고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게 ‘질문중지기간’이다. 시험 전 2주일가량은 모든 강의에서 교수들에게 일절 질문을 할 수 없다. 어느 교수가 시험문제를 출제했는지 알게 되면 그 교수에게 질문이 집중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교수가 답변하는 과정에서 다른 반에서는 하지 않았던 말을 하게 되면 그 반 학생들만 시험에 유리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시험문제가 출제된 뒤 이뤄지는 마지막 강의는 아예 화상으로 이뤄진다. 교수 1명이 화상중계시스템이 설치된 교실에 들어가 수업을 진행하면 나머지 15개반에 동시 중계되는 방식이다.

드물지만 형평성 시비로 재시험이 치러지는 경우도 왕왕 있다. 지난해 ‘수사절차론’ 과목에선 어느 반에서 감독 교수가 ‘오픈북 테스트’로 잘못 알고 법전을 나눠 준 게 화근이 됐다. 연수원장이 사과문을 내고 담당교수가 사과한 끝에 결국 재시험을 봤다.

〈이인숙기자 sook97@kyunghyang.com

[사법연수원 25時]下. 거세지는 ‘변화’ 요구

26일 경기 일산 사법연수원 도서관에서 연수생들이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있다. 도서관 한켠에는 법의 공정한 적용을 의미하는 저울을 든 정의의 여신상이 세워져있다. /정지윤기자

사법연수원 1년차 염모씨(35). 연수생 치고는 늦은 나이다. 염씨는 판·검사 임관에 큰 욕심이 없다. 그에게 연수원 수료는 변호사 자격증을 딴다는 의미 정도다. 연수원 분위기는 다르다. 한 학기가 지나면서 임관을 포기한 연수생도 있지만 아직 70~80%는 임관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임관 경쟁에서 벗어나는 연수생은 ‘이방인’ 취급을 받는다. 염씨는 “교수와 동기생 외에는 만나는 사람이 없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야가 좁아지고 비슷해진다”고 말했다.

사법연수생의 가치는 판·검사 임관으로 판가름나는 게 현실이다. 연수원 전체가 성적 경쟁에 휩쓸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누군가 한 학기동안 교수들이 별도로 나눠준 프린트물(부교재)만 쭉 쌓아놓으니 법전 10권 높이로 3줄이 세워지더라는 얘기도 있다. 공부에 쫓기다보니 TV 뉴스나 신문을 멀리하게 되고 시사에 먹통이다. 인성이나 교양은 한가한 이야기다. 시스템 자체가 판박이 법조인을 양산하게끔 짜여져 있는 셈이다.

지금의 사법연수원 교육에 손 볼 부분이 적지 않다는 점에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성적지상주의, 직역별 서열주의, 판·검사 일변도의 커리큘럼 등 현 연수원 교육과정과 문화에 대해 지적되는 문제점은 한 둘이 아니다. 연수원 이상원 교수는 “연수원 시절엔 지식습득뿐 아니라 각계 각층의 국민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가진 인성을 키우라는 것이 연수생에게 월급을 주는 국민의 바람일 것”이라고 말했다.

처방은 10인10색이다. 교수와 연수생간에 다르고, 연수생간에도 성적·나이 등에 따라 견해가 크게 엇갈린다.

가장 자주 제기되는 문제점은 연수원이 지나치게 법원 중심적으로 운영된다는 것이다. 올해 연수원을 마친 한 변호사는 “법원 엘리트주의가 심하다. 지도교수에 대한 절대복종은 불문율이다. 수업시간에 차렷 경례를 한다. 수업이 끝나면 꼭 박수치고…. 권위주의적이고 획일적인 분위기”라고 지적했다.

현재 판·검사로 진출하는 연수생은 전체의 30% 정도. 나머지 70%는 다른 직역에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는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 상당수 연수생들의 주장이다.

연수원 교수 출신 주명수 변호사는 “변호사가 될 사람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민사판결문 쓰는 것을 중점으로 가르친다. 차라리 변호사 과목을 늘려 실무에 필요한 것을 가르치는 것이 연수생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학계에서도 판사·검사·변호사 교육을 따로 시키자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건국대 임지봉 교수는 “직역별로 희망자를 나누고 별도 교육을 하게 되면 경쟁도 완화되고 국가가 모든 법조인을 길러내는 현행 방식의 문제점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판·검사 임관을 가르는 성적 반영비율을 낮추자는 목소리도 높다. 이상원 교수는 “연수원 성적 반영비율을 50%로 줄이면 연수생들이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500등까지 1차로 추려낸 뒤 대법원과 법무부가 이들을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평가하는 방법도 고려해 볼 만하다”고 말했다.

1년차 자치회장 김다숙씨(45·여)는 최근 자살한 동기생을 추모하는 글에서 “우리 의식 속에 진정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이 뒤바뀌어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고, 이에 대해 말하기 시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동은·강병한·임현주기자 dek@kyunghyang.com

[사법연수원 25時]사법연수원생 어떤 대우 받나


사법연수원생들은 5급 공무원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 연수원 1학년은 5급 공무원 1호봉에 해당하는 월 1백40만4천8백원을 받는다. 2학년은 5급 공무원 2호봉인 월 1백46만7천9백원이다.

실제로 연수원생들 손에 쥐는 돈은 월 90만원 정도다. 세금을 내야 하고 동기회, 향우회, 대학 모임·각종 동아리 회비로 빠져나가는 돈이 많기 때문이다. 연수생들은 보통 1인당 4~5개의 모임에 소속되어 있다.

일부 여성 연수생들은 월급 90만원을 잘 쪼개서 적금을 드는 등 알뜰하게 돈을 모은다. 그러나 대다수 남성 연수원생들은 ‘적자’ 신세다. 이들은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거나 부모의 도움을 받는다. 연수원 1년차 김모씨(27)는 “씀씀이가 사회인들처럼 커져 연수원 졸업때는 2천만~3천만원의 빚을 진 선배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연수원을 마치고 판·검사에 임용되면 3급 공무원 대우를 받는다. 행정고시 합격자가 5급으로 시작하는 것에 비하면 출발부터 크게 앞서 나가는 셈이다.

연수원 졸업 후 진로는 예전보다 다양화되는 추세다. 요즘에는 판·검사 못지 않게 대형 로펌도 인기다. 20대 젊은 연수생들은 대형 로펌을 선호한다. 1학년 말이 되면 성적이 좋거나 영어·제2외국어가 특출난 연수원생들에게 대형 로펌이 먼저 접근해온다. 임관 성적 안에 든 연수생들은 대부분 대형 로펌의 전화를 받는다. 한해 평균 100여명의 원생이 이른바 10대 로펌에 스카우트된다.

지난 2월 연수원을 수료한 35기 895명 중 비법조 직역에 진출한 원생은 138명이다. 국가기관에 68명, 일반기업에 47명이 취업했다. 민주노총에 3명, 전국금속노련에도 2명이 진출했다. 국선전담변호사를 선택한 연수생도 5명이다.

Posted by 木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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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이 청춘에게 고함] 경제 성장 넘어 새로운 삶으로!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2-01-20 오후 7:55:30

고전적인 교양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에서 괴테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매일 반드시 실천해야 할 것으로 몇 가지를 꼽았다. 날마다 좋은 음악을 듣고, 좋은 시 한편을 읽고, 훌륭한 그림을 하나 보고 그리고 가능하다면, 이치에 맞는 말 몇 마디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젊 었을 적에 이 구절을 처음 대했을 때, "이치에 맞는 말 몇 마디"라는 표현에 한참 시선이 머물러 있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18세기 독일 사회의 '후진성'이라는 현실 앞에서 괴테가 느꼈을 좌절, 고통, 외로움을 짐작해 보았다. 적어도 내게는 괴테의 그 표현은 위선적이고, 기만적이며, 기회주의적인 거짓 언어가 넘치는 사회 속에서 오래 고통을 느껴온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것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괴테는 나의 동시대인이었다.

되돌아보면, 우리 세대가 영위해 온 삶은 거짓 언어의 숲 속에서 끝없이 헤매는 방황의 연속이었다. 전쟁 직후 먼지가 풀풀 나는 황량한 길바닥이었지만, 거기서 아무것도 모르고 뛰어다니며 놀던 철없는 어린 시절은 매우 행복했다. 그러나 중학교 1학년이 끝나가던 어느 날, 이 행복의 시간은 결정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날 종례 시간에 담임선생님은 우리에게 신신당부 간곡히 말씀하셨다. "어느 정부든 자기 국민에게 나쁜 짓을 하는 정부가 있을 리 없다. 내일 투표는 ○○○에게 찍도록 부모님들께 잘 말씀드려라." 그리고 이튿날 오후부터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저녁 무렵 성난 사람들이 파출소를 불태우고, 엄청난 시위대가 거리를 뒤덮었다. 밤이 되자 어둠 속에서 총탄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정부가 자신의 국민을 향하여 최초로 총격을 가한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1960년 3월 15일, 자유당 정부에 의한 대규모 부정 선거에 항의하여 궐기한 내 고향 마산 사람들이 겪은 일이다.

이상하게도, 3·15에 대한 내 기억 속에 언제나 가장 뚜렷하게 남아있는 것은 그때 담임선생님이 하셨던 거짓말이다. 물론 선생님은 자신이 원해서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평범한 교사가 상부의 지시를 고분고분 따르지 않을 도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제자들 앞에서 교활한 논리로 거짓말을 실제로 함으로써 선생님은 결국 신용을 잃었고, 우리들은 벌써 어린 나이에 스승을 존경할 수 없는 불쌍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가장 끔찍한 것은 그러한 거짓말의 궁극적인 결과였다. 즉, 우리들 중에서 그 이후 자신의 인생행로에서 거짓 언어의 일상화를 당연지사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더 끔찍한 장면에 마주쳤다. 초여름 어느 날 가뭄 때문에 고생하는 농촌을 돕기 위해서 우리들은 각자 양동이 따위를 들고 교외로 대열을 지어서 가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난데없이 출현한 군용 지프차에서 내린 뚱뚱한 육군 장교가 우리들 곁에서 걷고 계시던 선생님을 불러 세워 놓고는 느닷없이 지휘봉으로 마구 구타를 하는 것이었다. 학생들의 어지러운 대열이 그의 비위에 거슬렸던 것이다. 5·16 쿠데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시절, 지역 계엄사령부 최고 책임자였다.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의 명분은 국가를 새로이 세운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제자들이 보는 면전에서 스승을 구타하는 방법으로, "나라에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키고자" 하였다.

이 일로 해서 나는 그 이후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군사 정권이 하는 말을 믿지 않게 되었다. 군인들에 의한 통치는 기본적으로 몰상식, 무교양, 극단적인 무례에 토대를 둔 것임을 그들 자신이 명확히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 제로 군사 통치 하에서 내게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그 강압적 통치 방식 이외에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몰상식한 짓들을 보고 살아야 하는 데서 오는 고통이었다. 예를 들어, 군대 시절에 나는 오로지 대통령의 눈을 즐겁게 하려는 목적으로 봄도 되기 전에 길가의 개나리꽃들을 활짝 피우기 위해서 꽃나무와 병사들을 괴롭히는 장면을 반복해서 보아야 했다. 지방 도시에서 전국체육대회가 열리면, 그날 대통령이 지나가기로 되어있는 길가에는 새벽부터 뿌리 없는 생나무들이 급히 심어졌다가 며칠 후에는 대개 말라 죽어버렸다.

무엇보다도 참을 수 없는 것은 이른바 장발 단속이었다. 멀쩡한 젊은이들의 머리칼이 국가 기관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길거리에서 함부로 잘리는, 터무니없는 만행이 오래 계속되었다. 장발 단속은 어떠한 법률에 의거한 것도 아니었다. 단순히 최고 권력자의 개인적인 취향을 거슬린다는 게 이유의 전부였다.

내가 1970년대 중반 어느 지방 대학일자리를 얻어 근무하던 때, 학생들의 부탁으로 저명한 작가 한 분을 초청하여 문학 강연회를 연 적이 있었다. 그 분은 내가 대학 시절부터 깊이 흠모해왔던 이 나라 최고의 작가 중 한 사람이었다. 두어 시간 동안 문학과 역사와 정치에 관한 강연을 들으면서 학생들과 나는 모처럼 진지한 사색의 즐거움을 누렸다.

그런 강연회 끝에 저녁 식사를 위해 시내로 나와 같이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분이 보이지 않았다. 살펴보니 길 건너편에서 경찰의 장발 단속에 걸려들어 그 분이 '닭장'에 막 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그 분은 몇 해 동안 미국에 머물다가 막 귀국한 때였다. 그래서 그런지 당시 세계적인 유행대로 장발이었다.

나는 이 돌발적인 사태에 당황하여 다급히 경찰관들에게 쫓아가 간곡히 부탁하고, 설명하였다. 그리하여 그 분을 '닭장'으로부터 가까스로 구출할 수 있었다. 그날 저녁 그 분과 나는 근처의 음식점으로 들어가기는 했으나 밥을 먹지 못했다. 작가는 창백한 얼굴로 침묵하고 있었으나 말할 수 없는 모욕과 수치로 온몸을 떨고 있었다.

박 정희 시대는 누추하고 야만적인 시대였다. 작가는 불온한 글로 인해 탄압을 받거나 감옥에 갈 수도 있다. 그것은 작가로서 명예일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전제 권력은 그렇게 탄압함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그 작가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나라의 최고 작가가 장발 단속에 걸려 '닭장차'에 실린다는 것은 실로 누추하기 짝이 없는 모욕적인, 가장 야만적인 형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날 내가 경험한 일은 일선 경찰에 의해 별 생각 없이 자행된 사소한 사건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 일은 박정희 시대의 본질을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극히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박정희 시대란, 적어도 내가 이해하는 한, 비극적인 시대는 결코 아니었다. 비극이란 원래 위대한 정신의 위대한 몰락에 관계하여 일어나는 인간적 드라마이 다. 박정희 시대는 '위대성'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치졸하고 천박한 정신이 지배하는 시대였을 뿐이다. 그것은 '잘 살아보세'라는 유치한 노래를 밤낮으로 틀어놓고, '새마을운동'으로 농촌을 살린다면서 토착적 민중 문화를 가차 없이 파괴하고, 민중의 지속 가능한 삶의 근본 토대인 농민 공동체를 급속히 해체시켰다.

그리고 이 농민 문화의 파괴와 공동체의 해체는 경제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경제 성장'이라고 하면 모든 것이 허용되는 사회, '경제 성장'이라는 명분 앞에서는 역사도 문화도 전통도 헌신짝처럼 내던질 준비가 되어있는 사회, 그리하여 깊이도 영혼도 없는 사회, 다시 말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한국 사회의 기본 성격이 박정희 시대를 통해서 굳건히 정립된 것이다.

1979년 10월 어느 새벽, 잠에서 덜 깬 상태에서 대통령이 죽었다는 소식을 이웃집 사람에게서 들었다. 순간적이지만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결국 죽음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구나 하는 허망한 느낌에 돌연히 휩싸였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선생님이 군인으로부터 구타당하던 것을 본 이후, 학생, 군인, 교원으로 쭉 살아오면서 나는 한순간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군대 생활을 하는 동안은 말할 것도 없지만, 대학의 교사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감시받고 있다는 느낌에서 헤어날 수 없었고, 글을 쓸 때도, 글이 발표되고 나서도 늘 막연한 불안과 자기혐오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제는 해방이다", 독재자 박정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날, 나는 종일 들뜬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1980년 5월 이후, 절망의 날들이 계속되었다. 그 상황에서 기꺼이 감옥으로, 공장으로, 야학 교사의 길로 가는 학생들을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보면서, 나는 무엇이 어디서부터 근본적으로 뒤틀리기 시작했는가를 천천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한동안 어렵게 구한 외국의 서적과 잡지들을 들여다보다가 아무래도 책들을 좀 자유롭게 볼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미국 뉴욕주립대학 대학원의 입학 허가를 얻었다. 그런데 미국에 도착하여 공부하기 시작한 지 몇 달도 안 되었을 때, 나는 어떤 충격적인 경험을 했다.

그것은 따지고 보면 단순한 경험이었다. 내가 입학하여 공부하기 시작한 그 대학에는 교수와 대학원생을 위한 여러 개의 훌륭한 도서관이 있었는데 대개 내가 이용한 도서관은 인문·사회 분야 책들이 많은 중앙도서관이었다. 그 도서관의 규칙에 의하면 대학원생에 대한 도서 대여 기한은 6개월이었다.

나 는 도서관에 따라 다른 규칙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한 번은 법과 대학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별로 읽지도 않고 가지고 있다가 어느 날 문득 살펴보니 대여 기한이 한 달밖에 안 되고, 그 규정에 따르면 이미 내가 열흘 이상 기한을 넘겼다는 것을 발견했다. 더욱 놀란 것은 기한이 넘으면 하루 10달러씩 벌금을 부과하기로 돼 있다는 규정이었다.

부랴부랴 법과 대학 도서관에 반납을 하러 가서 설명을 했다. 처음 이 대학에 와서 공부하기 시작한 학생인지라 이 도서관의 규칙이 중앙도서관과 다른 것을 몰랐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은 내 잘못이지만, 이런 실수로 학생 신분으로 100달러가 넘는 벌금을 물어야 하는 것은 좀 과하다고 생각한다고 얘기를 했다.

얘기를 듣고 있던 젊은 여자 직원이 잠시 기다리라 하고는 뒤에 앉아 있는 할머니 사서(司書)에게로 가서 내 얘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할머니가 내게로 와서는 방금 젊은 직원에게 한 얘기를 다시 자기에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얘기를 들은 그 할머니 사서는, 설명을 들으니 일리가 있지만, 그렇다고 규칙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니 자기 재량으로 벌금을 하루 10달러가 아니라 하루 1달러로 계산하여 모두 10달러로 하여 받겠으니 괜찮겠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그러겠다고, 고맙다고 말하고 벌금을 그 자리에서 물고 나왔다.

도 서관에서 나와서 곰곰 생각해보았다. 만일 한국의 대학에서라면 이런 경우 어떤 장면이 벌어졌을까. 나는 그동안 내가 재직했던 대학들과 그 도서관 풍경들을 머리에 그려보았다. 그리고 내가 얻은 결론은 한국에서는 이런 모습이 절대로 재현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한국에서는 대학이든 어디든 실무자에게 주어진 재량권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규정을 곧이곧대로 지키든가 아니면 서류 조작 따위를 통해서 처음부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것처럼 조작할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아마 변함없는 현실일 것이다.

공공 기관이든 사기업이든 한국의 조직에서는 현장에 가장 가까이 있는 실무자에게 현장 사정에 따라 유연하게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모든 결정은 고위층, 상층부에서 이루어지고 실무자급은 이 결정을 합리화하기 위한 기술적 보완 책무가 있을 뿐이다. 그러기에 말도 안 되는 온갖 일들이 국책 사업이니 뭐니 하면서 횡행하는데도 불구하고, 중하위직 공무원, 관련 분야 연구자, 학자들은 이의 제기를 하지 못하고, 다만 그 말도 안 되는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억지논리를 개발하는 데 고통스럽게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철저한 상명하복의 위계 구조에 의해 움직이는 군대 조직의 논리가 군사 정권 시절을 통해서 이 사회의 온갖 영역에 침투해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고도 경제 성장기의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시된 덕목은 효율성, 생산성이었고, 그러한 것에 대한 집착이 강해지는 것만큼 공공 조직이나 기업 어느 쪽을 막론하고 제일의 원리로 확고하게 굳어진 것은 군대식 논리였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노예의 논리가 이 사회의 지배 원리가 되어온 것이다.

노예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그때 필요한 기술은 끊임없는 거짓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진실을 찾으려는 힘은 퇴화하고,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고립되고 조소를 당하며, 때로는 냉소 혹은 저주의 대상이 될 뿐이다.

나는 지금도 그날 미국 대학의 도서관에서 할머니 사서가 보여준 당당한 모습, 자유로운 모습 앞에서 내가 한 사람의 한국인으로 내심 기가 죽었던 것을 가끔 회상한다. 되돌아보면 한국에서의 우리들의 생은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진실 속에서의 삶'이라는 느낌이 희박한 것이었다.

아이들이 즐겁게 놀지 못하고, 건강한 성장기를 박탈당하고, 청년들이 활기를 잃고, 기껏해야 7급 공무원이나 '정규직' 을 몽상할 뿐인 사회는 미래가 없는 사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는 여전히 왜 그동안의 엄청난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미래가 없는 사회가 돼버렸는지 그 뿌리를 찾아보려는 근본적인 탐구가 없이 늘 드러난 피상적인 증상들을 어떻게 하면 완화시킬 수 있을지 임시 처방을 궁리하는 데만 급급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치에 맞지도 않는 말들이 이 나라의 언술 공간을 늘 횡행하고 있을 뿐이다.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된 게 아니라, '경제 성장' 바로 그것이 문제라는 사실을 정직하게 대면하는 게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 화석 연료 시대가 조만간 종식될 것이 분명한 이 시대에 이제 우리는 경제 성장이라는 시대착오적인 논리로는 한걸음도 더 나아갈 수가 없다는 진실을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미래로 갈 수 있는 출구는 거기에서만 열릴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내가 요즘 한국에서도 이제는 녹색당이 필요하다는 젊은이들에 공감하여 그들을 돕는 일에 가담하고 있는 것은 '경제 성장'을 넘은 세상에 대한 상상력만이 우리들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Posted by 木石
,

[하니Only] 허재현 기자 기자블로그 기자메일
등록 : 20120116 10:26 | 수정 : 20120116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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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영화 ‘부러진 화살’ 실제 주인공 김명호 전 교수
“4년형 억울하지 않아…실제로는 재판부가 나에게 혼쭐 난것”

» ‘석궁’ 사건을 다룬 영화 ‘부러진 화살’의 실제 주인공 김명호 전 교수.
“판사에게 석궁을 쏘았다.” 

 2007년 1월15일 저녁, 김명호(55) 전 성균관대 교수(수학과)의 판사 공격 사건이 언론에 일제히 보도됐다. 아무리 억울해도 그렇지 사람을 활로 쏘다니. 언론은 “석궁테러”라는 수식어를 달아 연일 속보경쟁을 벌였다. 김 교수는 부당해고에 맞서 싸우던 피해자에서 한순간에 엽기 테러범으로 전락했다. 대법원은 이례적으로 전국법원장 회의를 열어 “사법부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재판을 하기도 전에 이미 징역형이 내려진 듯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알려진 것과 다른 사실들이 드러났다. 먼저 김 교수가 아파트 복도에서 쐈다며 박홍우 당시 서울고법 민사2부 판사(현 의정부지방법원 법원장)가 경찰에 맡긴 화살이 사라졌다. 경찰은 뚜렷한 이유를 대지 못했다. 게다가 증거로 제시된 박 판사의 혈흔이 이상했다. 박 판사가 입고 있었던 조끼와 양복, 속옷에 모두 묻어 있는 피가 유독 와이셔츠에는 묻어 있지 않았다. 박 판사는 당시 속옷 상의, 내복 상의, 와이셔츠, 조끼, 양복 상의 순으로 옷을 입고 있었다. 증거 조작 의혹이 제기됐다.

 궁지에 몰리게 된 건 김 교수가 아니라 박 판사였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2008년 1월28일 3차 공판에서 김 교수 쪽의 혈흔감정 요청을 거절했고, 대법원은 2008년 6월12일 김 교수에게 징역 4년형의 판결을 확정했다.

 재판이 불공정하게 진행됐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김 교수는 별 수 없이 4년형을 살아야 했다. 그는 2011년 1월23일 새벽 출소했다.

 사회적 관심에서 멀어지는가 싶던 ‘석궁사건’이 영화 <부러진 화살>의 19일 개봉을 앞두고 다시 조명을 받고 있다. <한겨레>는 김 전 교수를 지난 4일 만났다. 인터뷰는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의 한 찻집에서 이뤄졌다.

 

 그는 만나자마자 “나를 더 이상 억울한 사람처럼 그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김명호가 억울하다? 이런 식으로 쓰지 마세요. 절대로. 저는 (석궁사건 재판이 얼마나 부당했는지) 이미 (재판과정을 통해) 적나라하게 밝혔기 때문에 만족해요. <부러진 화살> 영화에서 안성기가 마지막에 웃잖아요. 저도 그런 심정이었어요. 내가 막 당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재판부가 나에게 혼쭐이 난겁니다.” 





 실제 김 전 교수는 재판 내내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재판정에서 판사에게 “재판을 똑바로 하지 않는다”고 호통쳤다. 재판부가 김 교수의 증거신청을 터무니 없는 이유로 기각하는 등 상식 이하의 판단을 계속할 때마다 방청객들은 분노했다. 급기야 2008년 3월 대법원에서 열린 석궁사건 항소심 재판에서는 판사들에게 계란을 던지는 방청객도 있었다. 김 전 교수는 ‘재판과정을 지켜본 시민들은 오히려 사법부가 테러를 가하고 있다고 생각’할 거라고 믿는 듯 했다. 김 전 교수는 자신의 누리집 (http://seokgung.org/) 에 석궁사건 재판 과정을 상세히 공개하고 있다.

 먼저 석궁사건을 묻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2007.1.15) 박홍우 판사 집에 석궁을 들고 간 이유가 뭡니까. 

 “그냥 겁주려고 했습니다. 판사들이 그렇게 법을 묵살하면서 (시민에게) 재판 테러를 하는 경우 너희도 죽을 수 있다는 경고를 하고 싶었어요. 교수 지위 확인소송에서, 법대로 판결하지 않고 권력자의 편에서 판결을 내린 것을 경고하고 싶었습니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김명호 전 성균관대 교수(수학과)는 1995년 대학 본고사 수학문제가 틀렸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학교 쪽과 관계가 틀어진 뒤 이듬해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김 전 교수는 1995년 10월 법원에 교수 지위확인 소송을 냈으나 당시 법원은 ‘교수 임용은 대학의 자유재량’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국에서 응용수학 관련 연구원으로 활동하던 그는 2005년 1월 사립학교법 개정으로 재임용을 거부당한 교원이더라도 교원소청심사위원회에 재심청구를 하거나 법원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되자 3월에 귀국해 다시 교수 지위 확인소송을 냈다. 그러나 법원은 2007년 1월 다시 대학의 손을 들어줬다.

  김 전 교수는 이 판결이 잘못 됐다고 주장했다. 1977년 교수 재임용 관련 판결문에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재임용이 예정된 걸로 본다’라고 돼있는데 87년에 법률해석을 변경해서 ‘재임용은 학교자유 재량이다’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전 판결을 뒤집으려면 법원조직법 제7조 1항의 3에 의해 전원합의체를 거쳐야 해요.(그는 법원조직법 항목을 줄줄이 외웠다. 인터뷰 내내 법원판례 번호 등을 외워서 답했다.) 그런데 이 87년 판례는 전원합의체가 아니었거든요. 제가 2005년에 재판을 받으면서 이걸 지적해 이용훈 대법원장 앞으로 공개질의서를 보냈더니 이렇게 답하더라고요. “77년도 판례는 한양대 교수가 사고로 죽으면서 손해배상을 다툰 것이고 87년건은 재임용건이라 사건명이 다르다.” 하지만 두 건 다 사립학교법에 대한 해석을 다룬다는 점은 같아요. 더 웃기는 것은 77년도 판례가 (인쇄물로 된) 판례집 총람에는 요지가 나오는데 대법원 홈페이지에서는 요지가 사라졌어요. 이런 사법부의 잘못된 판결에 교수라는 사람들이 400여명씩이나 당하고서도 아무런 저항이 없어요. 다 바보같이 당한 거예요.“

   

 -그래도 판사의 집을 찾아가 위협한 것은 정당하지 않아 보입니다.

 “박홍우 판사의 판결이 있기까지 1년6개월동안 합법적인 모든 수단을 활용해 나의 의견을 피력해봤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청와대, 교육과학기술부, 대법원에 진정서와 탄원서를 넣었어요.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1년 가까이 휴일만 빼고 매일 1인 시위도 했어요. 그런데 박 판사는 나에게 판결테러를 가해 사회적으로 생매장시켰습니다. 그럼 뭘 더 할 수 있었겠어요. 국민저항권 차원의 정당방위였습니다. 나로서는 최수의 수단이었어요. 후회 없습니다.”

 

 -정말 석궁을 쏘지 않았습니까.

 “안쐈어요. 그냥 순진하게 겁을 줄 생각으로, 석궁을 들고 대체 이렇게 판결한 이유가 뭐냐면서 다가갔는데 너무 가까이 가는 바람에 박홍우 판사가 내 석궁활대를 잡은 거에요. 쏠 생각도 없었어요. 쏠 생각 있었다면 당연히 멀리서 조준해 쏘고 말았겠지 그걸 들고 그 앞으로 다가갔겠어요?”

 

 -그럼 박홍우 판사가 화살에 맞아 입은 상처와 혈흔은 뭔가요. 조작됐다는 건가요.

 “그렇게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죠. 석궁전문가도 석궁으로 생길 수 있는 상처가 아니라고 얘기했고. 경찰의 석궁 실험에서도 활을 쏘면 15cm 뚫고 지나가게 나왔는데, 대체 그 상처가 어디서 낫겠어요. 자해밖에 없어요. 그래서 혈흔 감정을 해보자고 했는데 재판부는 내 주장을 묵살했어요. 그래서 내가 1심 법정에서 ‘세상에 이런 개판 재판이 없다’고 소리쳤어요.”

 (박홍우 판사는 2007년 8월22일 1심 7차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몸을 일으켜세울 무렵에 화살 하나를 잡았다”며 “화살은 부러져 있었다”고 진술했다. 출동한 119 대원이 쓴 ‘구급활동일지 평가 소견란’에는 상처 크기가 ‘지름 0.5cm 정도 창상 有’라고 돼있다. <한겨레>는 박 판사의 해명을 들어보려고 했으나 박 판사는 인터뷰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 박홍우 판사가 재판부에 제출한 증거. 박 판사가 입고있던 옷가지에 박 판사의 혈흔이 묻어 있으나 중간에 껴입은 와이셔츠에는 혈흔이 없다. (자료사진)
 

 김 전 교수는 사법부에 하고 싶은 말을 쏟아냈다. 그는 우리 사법부에 강한 불신을 드러내며 법원장을 선거로 뽑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놈’들은 법을 안 지켜요. 법원이 최후의 정의의 보루? 이런 것과는 구만리라고 해야 되나. 한 마디로 ‘개소리’입니다. 제가 석궁사건으로 국민들에게 얘기하고 싶었던 건 판사들이 법을 안지키는 게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지금도 국민의 눈과 귀가 닿지 않는 곳에서 석궁조작 사건 같은 게 벌어지고 있다는 거예요. 석궁사건은 단지 초등학생도 알기 쉽게 증거조작이 일어난 것 뿐이지 다른 사건들에서는 교묘하게 일어나고 있어요. 판사, 검사 모두 사법고시에 붙는 순간 ‘법을 위반할 자격증’을 얻었다고 생각해요.”

 “헌법재판관과 법원장, 대법관, 검찰총장 등을 모두 선거로 뽑아야 해요. 그거 외에는 방법이 없어요. 도가니법처럼 법 100개 만들면 뭐합니까. 지키지 않는데. 국민이 사법부를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선거가 유일합니다.”

 

 그렇다고 김 전 교수가 법 회의론자는 아니다.

 “법은 최소한의 상식입니다. 2005년부터 제가 법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논리가 딱딱 맞고 모순이 없는 거예요. 딱 한 가지만 빼고. 판사들이 법을 위반하면서 소송을 진행하면 이걸 막을 방법이 없어요. 명백히 법을 어긴 판사를 검찰에 고발해도 다 막아주고.”

 김 전 교수는 이 말을 꺼내면서 “절대 기사에 주장했다고 표현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주장은 틀릴 수도 있고 맞을 수도 있는 것이지만 이건 사실이기 때문에 지적했다고 표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든 판사가 다 그런 건 아니잖아요.

 “춘천교도소에 있을 때 교도소 건물에 석면을 사용했다고 고발했어요. 그 사건을 담당한 전상범 판사는 사건을 파악하기 위해 세 번이나 교도소를 방문했어요. 결국 판사이동으로 사건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는데 제가 승복할 수 있는 유일한 판사였어요. 내가 불합리한 판결을 받았다고 해서 모든 판사들을 욕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해 듣기로는 판사 중 5%정도만 괜찮다고 하더라구요. 근데 그런 판사들은 서울 근처에 오지도 못합니다.”

 

 그는 판사들에 대한 비난을 이어갔다.

 “이상훈 대법관도 웃기는 사람이에요. 원래 내 교수확인지위 소송 서울고법 민사재판이 이상훈 판사 담당이었어요. 그런데 법대로 판결했다가는 내가 이기니까, 그래서 문제 생길 것 같으니까 내가 2005년 10월18일 재판을 접수했는데도 4개월동안 놀고 있다가 2006년 2월 다른 곳으로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수석부장이 되어) 도망가버렸어요. 그러다 2006년 론스타 경영진 문제 처리하려고 4인 회동하고 그랬죠.”

 이상훈 대법관은 2006년 법원의 론스타 경영진에 대한 잇딴 영장기각을 놓고 검찰이 반발하던 상황에서 서울중앙지법 민병훈 영장전담판사와 함께 박영수 당시 대검 중수부장과 채동욱 대검 수사기획관을 비밀리에 만나 ‘부적절한 만남’ 논란을 빚었다. 재판 업무중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소송 관계자를 법정 이외의 장소에서 만나선 안된다는 법정윤리조항 등을 어겼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 대법관은 지난 달 정봉주 전 의원의 징역 1년형을 확정판결하기도 했다.

 

» 김명호 전 교수

 김 교수에게는 좌와 우가 없다. 그는 스스로를 좌도 우도 아닌 합리주의자라고 소개했다. 법에 따라 올바른 행동을 하는 판사는 좋은 판사고, 그렇지 않은 판사는 나쁜 판사라고 생각한다. 김 전 교수는 최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와 관련해 소신발언을 해 주목받고 있는 판사들에 대해서도 거센 비판을 이어갔다. 

 “한미FTA니 뭐니 떠드는 판사들도 다 쓰레기라고 봐요. 판사들이 지금도 법으로 충분히 막을 수 있어요. 우리 헌법 119조에 “국가는 국민경제의 성장과 적정한 소득 분배 유지를 위해 시장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돼 있어요. 한-미FTA 조약은 국내법과 같지요. 한미FTA는 독소조항 ISD(투자자소송제도) 때문에 헌법을 위반하는 조약이지요. 그럼 판사들이 위헌법률심판제청을 하면 돼요. 그건 안하고 판사들이 집단행동을 합니다.” 

 김 전 교수는 이어 한-미FTA 관련 소신 발언으로 에스엔에스(SNS) 상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얻은 이정렬 판사를 콕 집어 비판했다.

 “이정렬 판사도 위선자입니다. 한-미FTA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있어서 칭찬받는데 이 판사는 내 교수확인지위소송에서 박홍우 판사랑 같이 재판했던 사람입니다. 박 판사가 말도 안되는 판결할 때 끽 소리 안하고, 법원에 와서는 법원의 잣대로 해야 한다고 말하던 사람입니다.” (김명호 전 교수 교수확인지위 소송 고등법원 판사는 이우철, 이정렬, 박홍우 등 3명이다)

[영화 ‘부러진 화살’ 예고편] 

 -박홍우 판사가 정봉주 전 의원에게 징역 1년형 판결한 2심 판사여서 다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박 판사가 석궁사건을 겪으면서 법원이 해야 할 더러운 판결에 다 개입하게 된 것 같아요. 왜냐면 우리 나라 법원은 명판결을 내려 공로를 인정받아 승진하는 판사가 없거든. 다 윗사람 눈치를 잘 봐야 승진을 합니다. 사회적 논란이 되는 판결은 그래서 안 맡으려 하죠. 서울 고법 같은 데는 80% 이상이 서울대 출신 판사들인데 나머지 비서울대 출신에게 논란이 되는 판결을 맡겨요. 그 사람들에게는 이게 승진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서울대 출신도 가끔 사회적 논란이 되는 재판을 맡는데 박 판사는 석궁사건 거치면서 법원의 조작 판결로 은혜를 입은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박 판사는 (서울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더러운 사건을 맡는 겁니다. 문국현 유죄판결을 끌어내 그에게 정치 사망 선고 내린 것도 박 판사에요. 그렇게 정봉주 전 의원 판결까지 맡게 된 것 같아요.”

 (박홍우 판사는 현재 의정부지방법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정봉주 전 의원 판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박홍우 판사를 비롯해 이상훈 대법관까지 안기부 엑스파일 판례를 뒤집어 판결했습니다. 정 전 의원이 비비케이 관련 폭로가 사실임을 입증하지 못했으므로 유죄라는 건데 대법원은 엑스파일 내용이 사실임을 입증하지 못한 책임을 노회찬에게 지울 수 없다고 판결했었습니다. 1964년 미국에서 있었던 뉴욕타임즈 대 설리반 사건이라는 판례를 그대로 따른 것인데 이번에 이걸 뒤집어버렸어요. 무슨 변학도식 ‘니 죄를 니가 알렸다’인가요? 국민의 입을 봉쇄하려는 수작이에요. 긴급조치 시대로 가겠다는 거지.”

 

 -4년동안 감옥에서 지냈는데 힘들지 않았나요. 영화에선 감옥에서 강간당하는 장면도 나오던데요.

 “강간은 아니지만 성추행 비슷한 걸 당했어요. 2010년 춘천교도소로 이감했을 때 알몸 검신을 당했어요. 2008년 없어진 제도인데 당한 겁니다. 나는 거부했지만 거의 강제로 옷을 벗기다시피 해서 당했어요. 그 뒤 징벌방에 가게 됐어요. 징벌방에는 늘 못된 방장놈들이 있는데 그들이 알아서 괴롭힙니다. 그럼 교도관은 손 하나 대지 않고 맘에 안드는 사람들을 괴롭힐 수 있어요. 내가 강간을 당한 건 아니지만 2009년 원주교도소에 있었을 때 누가 강간당하는 걸 목격하기도 했어요. 해당 교도소는 강간범을 이감시켜버린 뒤 조사도 제대로 안했어요. 교도소 비리가 왜 바깥으로 안나오는지 아세요? 교도관들이 수형자들의 편지를 전부 뜯어보기 때문입니다.”

»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김명호 전 교수. 사진 제공 김명호 전 성균관대 교수
 -마지막으로 더 하고 싶은 얘기 있습니까.

 “국민들이 판사들을 모시려고 해선 안돼요. 그러니까 저놈들이 어깨에 힘주고 다니는 겁니다. 내가 1심 때 김용호 판사에게 김용호씨라고 말했다가 3일 감치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헌법 제1조 2항에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돼있어요. 헌법 제7조에는 공무원은 국민의 봉사자라고 돼 있어요. 우리는 판사에게 재판권을 위임시킨 것에 불과합니다. 판사는 법의 입에 불과한 국민의 머슴이라는 인식을 해야 합니다. 이 말좀 꼭 써주세요. 양승태 대법원장이 (지난 2일) ‘원색적 법관 비난에 단호히 대처 하겠다’고 하던데 양 대법원장과 공개 법리 논쟁하고 싶어요. 양 대법원장이 원하는 사람들 다 끌고 와도 좋아요. 나는 박훈 변호사 한명이면 됩니다. (양 대법원장은) 개소리좀 그만하라 그러세요.”

 

 김 전 교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의 법원에게는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재심 청구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차라리 법원장을 선거로 뽑는 운동을 통해 사법부를 개혁하는 게 더 빠른 방법이라고 했다.

 지난 11일 김 교수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오늘 뭐했냐고 묻자, 한 언론과 인터뷰를 마친 뒤 정지영 감독(부러진 화살) 과 술을 마실 생각이라고 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언론과 인터뷰 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가 곧 발간할 책에 억울하게 성균관대에서 쫓겨난 사건과 이후 석궁 사건 재판과정, 우리 사회 온갖 썩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실명을 숨기지 않고 모두 담아냈다고 했다. 우리 사회 부조리를 겨눈 화살이 다시 한번 장전된 것이다.

  “내 책에는 욕을 많이 써놨어요. 교수라는 사람이 교양도 없이 욕한다고 할 수 있는데, 분노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안읽어도 좋아요. 우리 사회는 개판입니다.”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Posted by 木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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