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근의 따뜻한 축구] 가끔은 그런 독일이 부럽다

출처다음스포츠 | 입력 2014.01.28 18:24 | 수정 2014.01.28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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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휘플러.

우리는 아버지뻘 되는 그를 항상 '토니'라고 불렀다.

토니. 토니는 프랑크푸르트팀 선수들의 장비담당이었다. 우리들의 땀내나는 유니폼들을 빨고 정리하고 축구화의 흙을 털어서 말끔하게 손질해주는 토니는, 말하자면 프랑크푸르트 구단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직원이었다. 언제나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독일 날씨 때문에 운동을 마친 선수들의 유니폼은 깨끗한 날이 아주 드물다. 훈련을 마치면 선수들은 흙 속에서 뒹굴다가 나온 듯한 옷들을 라커 바닥에다 팽개치듯 벗어놓고 샤워실로 달려간다. 토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것들을 주워서 세탁실로 가져갔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35년 전 그때도 토니는 늘 헤브작 웃는 바로 그 얼굴이었다. 처음 프랑크푸르트에 갔을 때 나는 아버지 같은 토니가 내 빨래거리를 정리하는게 영 익숙치가 않아서 한쪽으로 정리를 해두기도 했는데 토니는 그럴 것 없다고 신경쓰지 말라며 이 것은 '내 일!' 이라고 너무나 당당하게 얘기해서 상당히 자극이 되었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은 이렇게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가지는 당사자라야만 얘기할 자격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경기가 있는 날이면 토니는 운동장에 나가서 땅을 만져보고 뛰어보고 문질러 보고...하면서 상태를 완전히 파악한다. 그리고는 선수 하나하나에 맞춰서 축구화 뽕을 박는다.

축구화 바닥을 뿔 창이나 고무창으로 선택해야 하는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앞 뽕과 뒷 뽕이 서로 달라야 하는 선수, 높은 뽕과 낮은 뽕의 쓰임이 다른 날씨. 깔창이 높은선수 낮은걸 좋아하는 선수(심지어는 깔창을 모두 떼어내는 선수도 있다), 또 나처럼 아주 새 축구화보다는 몇 번 신은 축구화를 더 편하다고 하는 선수는 경기날에 맞춰서 적당히 낡은 것으로 아껴뒀다가 챙겨준다.

축구화가 느슨해야 하는지 꼭 끼어야 하는지, 스타킹은 발목이 조이는걸 좋아하는지 나처럼 조금 느슨해야 좋다고 하는지....자칫 시시콜콜하게 넘어갈 듯한 모든 것들이 최고의 경기력을 내야하는 프로선수들을 챙기는 토니로서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이렇게 꼼꼼하고 철저하게 준비한 토니는 각양각색 선수들에게 완벽하게 맞춰서 경기전 캐비넷마다 물품을 가지런히 정리를 해놓고 희열을 느낀다고 했다.

프로다. 프로는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러니 비오는 날씨에 선수가 자꾸 미끄러지면 토니는 억울해서 죽을상을 하며 자존심 상해했다. 그런 경우는 축구화가 날씨랑 맞지 않을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하하하.





토니를 우리는 정말 좋아했다. 당시 프랑크푸르트에는 뮨헨 월드컵을 우승한 국가대표스타들인 그라보브스키랑 휄첸바인, 그리고 니켈을 중심으로 한 핵심 그룹이 있었다. 보통의 선수들은 그들과 어울리는 것이 쉽게 허용되지 않았고 엄두를 내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프랑크푸르트 토박이들이고 축구라는 종목의 힘 때문에 축구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도 그들의 파워는 대단했다. 일거수일투족이 매일매일 언론의 기사감이었기 때문에 프랑크푸르트의 시민들은 선수들의 사생활을 모르는게 없이 꿰고 있었다. 그렇게 조금은 거만한 스타그룹도 나의 존재는 기꺼이 반겨줬다.

74년 뮨헨 월드컵을 우승하고 모든 것을 다 이룬 30대 중반의 노장선수들에게, 말 뛰듯 뛰는 차붐은 자신들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아주 요긴한 존재였을 것이고 골까지 넣어서 승리수당을 두둑히 챙기게 해주는 복 덩어리였으니 말 못하고 촌티가 풀풀나는 것쯤은 별 문제가 안됐던 것 같다.

내가 이발을 하러 가기로 예약이 되었을 때, 이 기라성 같은 멤버들이 점심을 함께 먹고 이발소까지 따라 가서 떠들고 거들며 즐거워 하는 모습들이 대문짝처럼 신문에 걸렸던 걸 기억해 보면 내 존재는 시작부터 꽤[아주?] 중요했었다.

이런 보이지 않는 구분이 엄격했던 팀에서 토니는 항상 우리들의 가장 중요한 멤버였다. 최고의 스타들과 허드렛일을 하는 장비담당이 어쩌면 어울리지 않을 듯 하지만 주말이면 가족들과 모두 모여서 식사를 하러 다닐 때도 토니는 항상 함께였다.

어느덧 하나씩 둘씩 은퇴를 했고 나도 레버쿠젠으로 떠났지만 토니는 항상 거기에 있었다. 토니가 일하는 동안 회장단은 수도 없이 바뀌었고 30명이 넘는 감독들이 그를 거쳐갔다고 했다. 프랑크푸르트팀 최고의 순간에도 있었고 곤두박질쳐서 바닥에 박히는 순간에도 함께 있었던 프랑크푸르트의 역사이기도 하다.

지난번 독일에 갔을 때 토니가 지팡이를 짚고 내 자리로 찾아왔다. '차, 사람들이 너가 왔다고 하길래!!"하면서 그 웃음 그대로를 머금고 나타났다. 하하하, 이 반가움을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그 날은 UEFA 경기가 있던 날이었고 음식과 음료가 무제한 제공되는, 우리들이 이용하는 라운지의 티켓은 하루 저녁에 100만원 정도 한다. 가끔 들르는 나야 항상 라운지를 이용하지만 프랑크푸르트에 사는 내 친구들은 은퇴한지가 20년이 훨씬 넘었는데도 프랑크푸르트구단은 수천만원하는 VIP연간 회원권에 해마다 지정석을 내준다. 그렇게 대접하고 대접받는 모습에 묘한 부러움을 느낄 때가 많다.





물론 우리들은 스타이고 프랑크푸르트 역사는 우리들을 잊을 수 없을 터이니 그렇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허드렛 일을 하던 토니에게도 똑같은 대접을 하는 독일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뿐이다. 나는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프랑크푸르트 회장단이 갑자기 고마워지는 순간이었다.

그 동안 수많은 회장단이 바뀌었지만 누구도 토니의 이름에 줄을 그어버리지 않고 존중해 줬다는 얘기다. 프랑크푸르트 라커에서 냄새나는 것들과 평생을 함께 보낸 그에게 프랑크푸르트가 평생 VIP 대우를 해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 독일이라는 나라가 확 좋아졌다.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날 경기 전 경기장 천정에 매달려있는 전광판에는 흑백 사진이 한 장 떴다. 며칠 전 세상을 뜬 87세의 KURTL의 추모사진이었다. 아직 프로가 없던 시절 직업이 경찰이었던 그는 당시 프랑크푸르트에서 가장 사랑받는 경찰 축구선수였다고 한다. 하지만 나도 아주 드물게 운동장에서 악수를 했던 기억밖에 없는 그를 운동장에 모인 젊은 친구들이 기억하고 알리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큰소리로 그를 향해 감사의 노래를 불렀다. 지붕이 덮힌 운동장을 울리는 관중들의 노래는 축구가 인생의 전부인 나에게 참 많은 것을 느끼게 했다.

가끔 지나간 것은 과장되게 아름답게 기억될 때도 있다. 그러면 좀 어떤가?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를 아름답게 기억하고 고마운 마음을 갖는 것은 아름답게 살아야 할 가치를 인정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표시가 아닐까. 그래서 독일이라는 사회가 가능한 많은 것들을 기억하고 고마워하도록 가르치는 게 아닌가 싶다.

차붐을 독일에서 아직도 기억하는 것 역시 이런 이유의 과장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을 우리 식 잣대를 들이대다 보니 엄청나게 대단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한마디로 내가 대단한게 아니라 그렇게 기억하려고 애쓰는 독일사회가 대단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토니를 기억하는 독일, 정말 훌륭하다고.



[차범근의 따뜻한 축구] 나의 '베프' 차두리는 짠돌이 (영상)

출처풋볼리스트 | 입력 2014.02.21 16:01 | 수정 2014.02.21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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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리는 엄마한테 매주 10만원씩 생활비를 낸다.
혼자쓰기에는 너무 넓다고 할만큼 큰 새 집을 통으로 쓰면서 빨래 청소 식사까지 해결해준다.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되게 저렴한 하숙비다.





그런데 두리는 기회만 있으면 이 돈을 떼어 먹는다.
그러고는 엄마랑 싸운다.
얼마전 두리가 장기간 합숙을 나갔다가 돌아왔다.
괌에서 한 달, 그리고 일본에서 3주 정도였으니 꽤 오랫만에 온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내랑 두리의 계산이 상당히 복잡해진다.
거기다 두리가 기르는 고양이 두 마리의 밥도 안 사놓고 합숙을 가버려서, 밤중에 고양이 밥 사러 돌아다니느라 돈을 썼으니 계산은 더 꼬이고 복잡해졌다.

그동안 밀린 액수가 만만치 않았던지 두리는 청소를 한 달에 한 번만 해주고 한달에 10만원만 받으라 짜증이고, 엄마는 전기 수도 난방비가 얼만지 아냐고 목소리를 높인다.
결국 두리가 없는 동안의 생활비를 모두 탕감해주는 대신, 앞으로 매주 10만원씩만큼은 절대 떼어먹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면서 신경전이 끝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생활비 10만원를 내는 날이면 두리 지갑에는 왜 7만원이나 8만원밖에 없는 것일까?
식탁앞에서 벌이는 복잡한 돈 계산을 지켜보는 나는 항상 궁금했다. 이게 전부라며 7만원이나 8만원을 내놓고는 "내일 은행에서 찾아다 드릴게요!"하면서 넘어간다.
아내는 "너 그렇게 말해놓고 언제 갖다 준 적 있었어?" 하고 따지지만 나머지 돈을 받는 것은 나도 단 한번 본 적이 없다. 돈도 잘버는 놈이 좀 그렇다.

합숙을 다녀와서 모처럼 저녁을 먹게 되어 있던 지난 수요일 저녁에는 '돈을 아껴쓰라!'는, 엄마로부터 늘 듣는 잔소리가 예약되어있는 타이밍인데 그날 오후에 대표선수 명단이 발표되었다.
일순간 온 가족이 조용해 졌다. 생활처럼 사건사고를 달고 다니는 우리집 막내의 예리한 분석에 의하면 정말 심각한 상황이 닥치면 엄마가 싸늘하게 말이 없어진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다. 그날 이후 말이 없다.

어제 저녁 밥을 먹는데 두리가 훈련을 마치고 왔다. "축하한다!"고 악수를 해줬지만 나도 딱히 할 말은 없었다.
한마디로는 얘기하기 쉽지 않은 복잡한 마음이었다.

선발이 됐는데도 아무 소리가 없는 것이 신경쓰였는지 두리가 문자를 보냈다.
"아빠도 엄마도 기쁘셔요?"
그냥 기쁘다고 하기에는 뭔가 걱정스럽다.
그렇다고 걱정스러운 마음을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기에는 두리도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어른이다.
그래서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우리 사위한테서도 아무런 연락이 없다.
이미 십 년이 넘게 우리집 식구가 되었으니 지금 이 일이 우리한테 전화해서 축하해 줄 상황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는 얘기다.
어쩌면 본인도 우리와 같은 심정일 것이다.
뭔가 조금은 난감하고 부담스럽고 걱정스러운.
그러면서도 대견하고 두리가 고마운......

두리는 꼭 대표선수를 하고 싶어했다. 정말로 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한결같이 참 열심히 하는 것 같았다.
그 마음을 나도 아내도 그리고 우리 가족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물론 두리가 축구를 얼마나 좋아하는 지도 알고 있다.
더러 선배들이 두리한테 농담처럼 얘기한다고 했다. "야, 너는 이 힘든 운동을 왜 하냐?"고.
아마도 '부자 아빠가 있는데...'라는 뜻인 것 같다.





보기에 따라 두리는 아주 뛰어난 선수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축구를 잘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절실하다.
사람들은 갖가지 시선으로 두리를 바라보고 있다.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도 있고 미워하고 한심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내가 아빠로서 가장 고마운 것은 반듯한 축구선수, 열심히 인생을 사는 모범적인 인간이고 싶어하면서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가다듬으면서 사는 성숙함이다. 그런 삶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동안 두리는 차범근의 아들이라서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았다.
그런 보이지 않는 힘은 두리에게 자신감과 여유로운 마음을 가질수 있게해주기도 했다. 그래서 두리를 좋아해주는 많은 사람들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빡빡하게 인생을 사는 아빠때문에 두리는 축구를 하면서 참 많은 상처를 받고 또 불이익을 받기도 했다.
98년 월드컵을 겪을때에는 이미 정해졌던 대학을 못갈 뻔 하기도 했다.
중국에 있던 내가 소문을 듣고 부랴부랴 들어왔더니 정말 두리의 이름이 입학예정자 명단에 없었다. 누군가 한국축구에 발을 못붙이게 해야한다고 했다더니 정말이었다.
아빠로서 가장 마음아팠던 시기였다.

반대로 나는 두리때문에 상처를 받거나 욕을 먹어본 기억이 단 한 번도 없다.
스타의 아들로 풍요롭고 보호를 받으면서 자랐지만 두리는 아버지인 내가 손가락질을 받을만한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었다. 상황이 두리를 어렵게 몰고 가도 두리는 나이보다 지혜롭게 그것들을 극복해나갔다.

지난 남아공 월드컵때 16강 경기를 마치고 두리는 전세계에 중계되는 카메라 앞에서 정말 펑펑 울었다. 지금도 우리 가족들만 두리가 왜 그토록 서럽게 울었는지 알고 있을 뿐이다. 두리에게는 참 힘든 월드컵이었고 고맙게도 팬들은 두리를 진심으로 지켜줬다. 그 때 두리도 오범석이도 그 나이 아이들이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상처를 입었다. 그러니 어린애에 불과한 오범석이가 받을 상처 역시 두리나 나에게는 쉽지 않았다. 역지사지. 두리는 오범석이를 위로하고 걱정했다. 월드컵 후에도 서로 문자를 주고받는 걸 보니 둘 다 좋은 녀석들이다.

그런데 두리가 다시 그 길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족들은 축하해야 할 일인데도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모든 것은 내 탓이다. 이런 기억들을 더듬다 보면 두리에게 빚을 지고있는 나를 확인하곤한다.
그래서 두리를 보면 늘 마음이 쏴--!하다.
나처럼 빡빡하게 살지 않아도 정직하고 반듯하게 살수 있다는 것도 두리를 보면서 배웠다.

지난해 환갑을 앞두고 여기저기서 책을 내자고 연락이 왔다.
'나의 인생의 기둥이 되어주었던 60명'을 기억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잠시 해 본적이 있다.
내 인생 최고의 친구는 누굴까?
며칠을 생각했다.
결론은 두리였다.
물론 두리의 베프는 차범근이 아닐 것이다. 하하하.

이제 두리는 겁많고 착하기만 했던 아들이 아닌 내가 의지하는 존재로 컸다. 내 인생의 축복이다.
언제든지 내 편이 되어주고 끊임없이 나를 이해해주며 항상 나의 이상과 삶을 불평없이 지지해주는 아들이다.

차두리!
나의 베프 차두리 화이팅이다!

그리고 대표팀 수당받으면 엄마 생활비도 좀 올려드려라.
10만원이 뭐냐? 아, 짜다!

[차붐TV] 어느 부자의 흔한(?) 축구 토크(영상)


Posted by 木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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