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심의에 오른 나머지 네편은 어떤 이야기?

<Glory Day>

시놉시스 지공, 한규, 용걸, 승범, 상우는 고등학생 시절 가장 친한 친구 사이였지만, 학교를 졸업한 순간부턴 각자의 환경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건달 형을 둔 지공, 부유한 검사 아버지 밑에서 무기력하게 성장한 한규, 재능없는 대학 야구선수 승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아르바이트로 힘들게 생활하며 뮤지션의 꿈을 키우는 용걸,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다 재수를 포기하고 군입대를 결심한 상우. 상우의 입대 직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던 다섯명은 사소한 실수로 유치장에 끌려간다. 유치장에서 보내는 하룻밤, 이들의 관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청춘드라마를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다. 부조리한 사회 안에서 청춘의 시기를 관통하고 있는 젊은이들을 풀어놓으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청춘드라마가 애써 이야기하지 않았던 지점, 그곳을 조금 다르게 짚어보고 싶었다.”(최정열)

<바비>

시놉시스 미국의 내과의사 스티브는 어린 딸 바비를 데리고 부산에 도착한다. 그는 부산에 사는 소녀 순영을 입양하고자 한다. 술독에 빠진 무능한 아버지와 어린 동생들 순자, 순삼, 대한과 살고 있는 순영은 갑작스런 입양 소식에 충격받는다. 순영의 작은아버지는 입양 브로커 역할을 통해 일확천금을 노리고,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던 순자는 순영 대신 자신이 입양되길 고대하며 심술을 부린다. 언어가 통하지 않지만 순영의 순수한 마음에 매혹된 바비는 급속도로 그녀와 친해지지만, 이 광경을 보는 스티브의 마음은 착잡하다. 사실 그가 순영을 입양하려는 데에는 다른 비밀이 숨겨져 있다.

“끔찍한 살인사건이나 강간사건엔 늘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들의 삶은 그렇게 어려서부터 불행으로 누적되었다가 폭발한 것이다. 난 가족 이야기에 특히 관심이 많다. 행복한 가정에서 즐거운 유년 시절을 보냈던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불행한 가족들 이야기에 늘 관심이 간다. 입양과 결합된 음지의 가족 이야기는 내가 맛보진 않았지만 가장 잘 요리할 수 있는 메뉴라고 생각한다.”(이상우)

<보내지 않은 편지>

시놉시스 다큐멘터리 감독 정상훈은 1950년대 활동했던 유학파 여성감독 김예분에 대한 정보를 우연히 접한다. 그 존재조차 몰랐던 여성감독의 충격적 데뷔작 <돌아보지 마라>는 유실되어 소문으로만 떠돌고 있다. 심지어 김예분은 두 번째 작품 <보내지 않은 편지>을 찍던 도중 돌연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자살로 판명되었지만 거기에 뭔가 감춰진 속내가 있었다. 흥미를 느낀 상훈은 김예분의 주변 인물들을 탐색하기 시작하고, 김예분의 죽음 뒤에 실체를 알 수 없는 권력의 외압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6년 전 김기영 감독님의 다큐멘터리를 준비했다가 접은 적이 있다. 지난해 즈음 그때 작업물을 다시 돌려보다가 이 내용을 좀 다른 방식으로 다뤄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1950년대에 김기영 감독님 같은 기상천외한 감독이 여성이었다면, 그녀가 상당히 급진적인 사상을 갖고 있고 급진적이고 충격적인 영화를 찍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궁금해졌다. 형식적으로는 <맨 온 와이어>와 <디스트릭트 나인>을 보면서 미스터리 스릴러와 다큐멘터리 형식이 결합되면 매우 흥미로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민간 사찰, 인터넷 검열 등의 현재 상황과 맞물리는 측면이 있으니 현재성으로 담보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양정호)

<안녕, 상호씨!>

시놉시스 영화감독 지망생 지혜는 쉽지 않은 데뷔작 준비에 지쳐 자살을 생각한다. 다양한 자살 방법을 놓고 고민하던 중 엄마의 기일을 알리는 아빠의 전화를 받는다. 할 수 없이 고향에 내려간 지혜는 정수기 대리점을 운영하는 아빠 상호의 잔소리에 지겨워하다가, 어느 순간 젊은 시절의 상호와 마주친다. 지혜와 동갑인 젊은 상호는 지혜와 함께 길을 떠나고, 그녀가 느끼는 삶의 불안이 자신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알려준다. 이 뜻하지 않은 여행을 거치며 지혜는 어느 순간 상호가 이성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기본적으로는 아빠와 딸 이야기다. 하지만 부녀관계에 대해서 깊이있게 파고들기보다는, 서로의 삶을 살아가면서 해줄 수 있는 응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아빠가 내게 해줄 수 있는 응원, 내가 아빠에게 해줄 수 있는 응원. 가족 간의 복잡미묘한 관계에 대해 뭔가 해결을 손쉽게 그리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관계라는 게 더 좋아지거나 다음 순간엔 훨씬 나빠지는 패턴이 반복되는 거니까. 구체적인 해결을 제시하기보다는 서로가 서로를 응원해주는 그런 느낌이 더 소중한 것 같다.”(경지숙)


당선작 <로맨스 조>의 이광국 감독 인터뷰

시놉시스 인기배우 우주현이 자살한 뒤, 그녀의 출연작에서 조감독으로 일했던 로맨스 조는 영화를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낙향한다. 자살을 생각하고 내려간 고향에서 그는 일본에 있는 엄마를 그리워하는 소년과 마주치고, 소년의 엄마가 자신의 첫사랑 초희였음을 알게 된다. 한편 새 시나리오를 완성하기 위해 시골에 온 유명인사 이 감독은 심심해서 부른 다방 레지로부터 로맨스 조의 평범하지 않은 로맨스의 여정과 결말에 대해 듣게 된다. 이 감독은 로맨스 조의 실화를 영화로 만들겠다고 욕심내지만, 이야기는 그의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로맨스 조>를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어느 날 카페에 앉아 작업하는데 글이 막혀 괴로워하고 있던 도중 다른 손님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다들 무슨 할 얘기가 그리 많은지 쉬지 않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우리한테는 이야기가 필요하구나. 정보든 소문이든, 지적인 부분이든 끊임없이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상황은 다를지언정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각기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요구하는 이야기를 구상하게 됐다.

-어찌 보면 단순한 스토리지만, 몇겹으로 이어지는 액자식 구성이 독특한 영화적 힘을 만들어낸다.
=M. C. 에셔의 <그리는 손> 같은 뉘앙스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서로가 서로를 그리고 있지만 밖에서 보면 두손 자체도 그림이다. 그런 식의 이야기를 짜다보니 액자식 구성으로 가게 됐다.

-장르도 하나로 정의내리기 힘들다. 여러 가지 분위기가 섞여 있다.
=쓰기 시작할 때는 코미디였다. 몇개의 액자들이 겹치면서 멜로드라마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론 코미디로 보였으면 좋겠다.

-배우가 상당히 많이 필요하다. 전체적으로 일정한 톤을 유지하는 것이 관건일 것 같다.
=연기 지도에 대해서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내가 이야기 전체를 명확하게 꿰고 있다면 자연스럽게 할 얘기들이 나올 것이다. 사실 디렉팅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대해 오랫동안 혼란스러웠다. 보통 제일 자주 나오는 말들이 ‘자연스럽게, 편하게 하세요’ 식의 뜬구름 잡는 디렉팅이다. 지금의 결론은, 형용사는 최대한 배제하고 직접적인 동사를 잘 사용하자는 것이다.

-홍상수 감독의 최근작을 4편이나 함께한 입장에서 그로부터의 영향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감독님 연출부들이 그런 고민을 많이 한다. 내 작업을 할 때 ‘홍상수 아류 아냐?’라는 말을 들으면 어떡하나, 하고. 내가 홍 감독님 작품을 4편을 연달아 작업했을 때도 주변에서 이해하기 힘들다는 시선이 많았다. 하지만 오랜 시간 그 현장에서 일하면서, 오히려 나한테 맞는 부분을 서서히 보게 됐고 좋은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좋은 영향일까.
=영화를 만들고 대하는 자세가 제일 중요했던 것 같다. 그런 태도가 내게 정말 큰 힘이 된다. 다른 현장에선 시스템에 대한 갈증이 컸다. 수많은 파트와 수많은 인력이 모여 있을 때 되게 소모적인 부분들이 자꾸 눈에 보였다. 홍 감독님 영화에는 그런 게 전혀 없다. 영화 하나만 놓고 달려갈 수 있다. 이를테면 배우 오디션 부분에서도, 난 오디션 진행할 때가 제일 힘들었다. 내가 연기를 전공한 사람도 아닌데, 저 경력 많은 배우들을 앞에 놓고 오디션을 보는 방식 자체에 죄책감이 들었달까. 그런데 홍 감독님이 배우들과 작업하는 방식을 보면서 저렇게 만나는 게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쓰는 부분에서도 그렇다. 시나리오가 따로 없이 트리트먼트를 놓고 작업하시는데, 그게 대사만 정확하게 확정되지 않았다 뿐이지 신 구분부터 시작하여 나머지 상황 설명은 정확하게 다 들어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장 변화에 잘 대처할 수 있고 영화적으로 대사만 바꾸는 게 가능해진다. 나 역시 영화 작업할 때 트리트먼트부터 아주 구체적으로 잘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입봉을 준비하는 입장에서 현재 한국영화계 상황을 어떻게 체감했나.
=시나리오를 들고 여러 군데 영화사를 다녔다. 기준 자체가 돈에 맞춰져서, 시야가 그만큼 좁아졌다는 느낌이 든다. 상업영화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 ‘이야기는 재밌는데 돈이 안돼’라고 말이 나오는 순간 아무것도 진행이 안된다. 가장 답답한 건 투자사나 제작사가 그렇게 나오다보니 시나리오 쓰는 사람들도 거기 맞춰서 자기의 생각이 없는 장르영화를 재생산하는 소모적인 시간을 보낸다는 점이다. 그래도 난 운이 좋은 편이다. 홍 감독님과 작업하면서, 큰 예산이 아니라도 어떻게든 의지가 있다면 스스로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을 배웠다. 최악의 경우 100만원이든 200만원이든 내가 재밌게 찍을 수 있는 걸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번 ‘씨네21 신인감독 발굴 프로젝트 2010’에서 지원하는 제작비 자체도 극히 적은 액수긴 한데.
=조건이 안 좋을수록 내가 더 치열하게 고민한다면 창의적인 게 더 나올 수 있다. 지금 상황에선 크게 걱정을 하지 않는다. 좋은 장비, 좋은 배우 다 쓰면 더 좋겠지만 그럼 내가 게을러질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좋은 이야기를 쓴다면, 그걸 알아봐주는 관객도 반드시 있을 거라고 믿는다.


 “<로맨스 조> 같은 경우, 신인감독이 보여줄 수 있는 발랄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또 이광국 감독이 홍상수 감독님의 조감독으로서 네편(<극장전> <해변의 여인>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하하>)을 함께 작업하며 적은 예산으로 현장을 운용할 수 있는 탄력성을 배웠다. 작가로서 자기 색깔이 분명히 있으며, 관객이 재밌게 볼 수 있는 여지가 상대적으로 더 많았다.” 


Posted by 木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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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주부가 입양한 유아를 질식시켜 숨지게 하고 보험금을 받은 엽기적인 사건이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경북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18일 아동입양기관에서 입양한 생후 28개월된 여아를 병원 침대에서 질식시켜 숨지게한 혐의(살인)로 최모(31.여)씨를 구속했다.

경찰에 따르면 최씨는 지난 1월14일 오후 3시께 경남지역의 모 대학병원에서 장염 등으로 입원해 치료받던 딸의 얼굴에 옷가지를 덮어씌워 질식에 의한 뇌사상태로 빠뜨리고 지난 3월7일 숨지게한 혐의를 받고 있다.

최씨는 2008년 4월 딸을 입양한 뒤 아이 이름으로 3건의 보험에 가입해 월 20여만원을 불입해 왔으며 사망 후 치료비 등 2천600만원의 보험금을 지급받았다.

경찰 조사 결과 최씨는 딸을 입원시키기 위해 소독하지 않은 우유병을 사용하고 끓이지 않은 물을 유아에게 먹여 장염 등이 발생하도록 해 병원에 입원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앞서 최씨는 2005년 5월께도 생후 1개월 지난 여아를 입양하고 1년2개월 뒤 딸이 대구의 모 대학병원에 장염 등으로 입원치료 중 사망하자 보험사로부터 1천500만원을 지급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최씨의 친딸은 2003년 3월께 장출혈로 입원치료를 받던 중 생후 20개월째에 사망했다.

경찰은 "30대 주부의 입양한 딸 2명이 비슷한 증세로 병원에 입원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수사에 착수했다"며 "범행 당시 병원에서 이를 목격한 다른 환자 보호자 등의 증언을 확보했고 최씨도 범행을 시인했다"고 밝혔다.

이수용 광역수사대장은 "최근 정부가 미성년자 입양시 법원허가를 받도록 민법 개정작업을 추진하는 가운데 이런 사건이 발생했다"면서 "관련 부처에 해당 사실을 알려 관련법을 신속히 개정하도록 요구하겠다"고 말했다.


obs 경찰 25시 10/24

판단력이 떨어지는 노인들 같은 사람들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것은 정말 악질이거든요?

부부가 12년동안 모은 5천만원을 사기쳐서 가져간 범인들.
(일자리 준다고 썰을 풀어서 전재산을 출금하게 만듦)
Posted by 木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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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희의 영화 이동진

영화 2010. 10. 17. 17:36

[영화읽기] 시간을 사는 영화 홍상수의 제3막이 열렸네
글 : 이동진 (이동진닷컴) | 2010.10.14

시간이라는 변인(變因)에 대한 <옥희의 영화>

<옥희의 영화>

많은 이들이 지적하고 있듯, <옥희의 영화>는 홍상수의 필모그래피에서 유독 정서가 중요한 작품이다. 그것은 이 영화가 펼쳐내는 이야기의 성격 때문이었을까. 이전과 달리 느슨하게 풀어진 듯한 구조 때문이었을까. 혹시 어느덧 쉰을 넘기게 된 홍상수 감독의 나이와 관련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각각에 대한 설명도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옥희의 영화>에 대한 평문이 쏟아지고 있지만 (내가 알고 있기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 이 부분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그것은 시간이라는 변인(變因)에 대한 것이다. 말하자면 <옥희의 영화>는 시간을 바라보는 홍상수의 첫 영화다.

홍상수 영화에 죽음이 드물었던 이유

홍상수는 그동안 공간이라는 변인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왔다. 그의 거의 모든 영화는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가는 인물이나, 옮겨갈 것을 논의하는 인물을 스케치하면서 시작된다. 이동은 곧 공간의 확장을 뜻한다(이때 그에게 공간이란 특정한 지역성을 가진 구체적 장소라기보다는 일종의 대체현실을 담아내는 서사공간에 가까웠다).

하지만 <옥희의 영화> 이전까지 시간이라는 변수의 영향은 최대한 축소되었다. 삶의 특정한 한 시기만 면도칼로 도려내듯 잘라내 다루는 방식이 인물의 시간적 반경을 최대한 압축해온 것이다. 두 가지 이야기가 서로 마주보는 대칭 구조를 특히 선호해온 그의 영화세계에서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내용이 나뉘어진 경우라고 해도, 그 사이의 시간적 간격이 없어 동시 발생적이거나(<강원도의 힘>) 이틀 뒤거나(<해변의 여인>) 길어봤자 12일 뒤(<잘 알지도 못하면서>)다(근작으로 올수록 시간적 간격은 그나마 조금씩 길어지고 있다).

홍상수의 영화에서는 프롤로그나 에필로그가 없었다. 많은 영화들이 타이틀 시퀀스가 펼쳐지는 도중이나 이전에 관객의 시선을 끌기 위한 프롤로그 에피소드로 시작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제목과 배우와 제작진의 이름 등을 담은 타이틀 자막으로만 간결하게 출발한다(서울타워를 비추면서 타이틀 시퀀스가 함께 흐르는 <극장전>만이 예외다). 중심을 이루는 이야기가 다 마무리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의 모습을 짧게 스케치하는 에필로그도 없다. 플래시백 역시 거의 없다(<하하하> 이전까지 플래시백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딱 한번 쓰였을 뿐이다). 플래시백이나 프롤로그는 주로 영화가 다루고 있는 인물이 과거에 어떠했는지에 대한 묘사라는 점에서, 그리고 후일담을 즐겨 다루는 에필로그는 주로 인물의 미래에 대한 설명이라는 점에서, 홍상수는 인물의 지나간 날과 다가올 날에 대해 관심을 거의 두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의 영화들은 주로 현재성에만 관심이 있었다(시간적 맥락이 축소되면 정서가 아니라 욕망이 중요해진다).

이 모든 형식적 특성은 홍상수라는 예술가의 목표가 표면의 포착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리저리 미끄러지는 욕망의 궤적을 통해 일상의 표면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통념과 상투를 끈질기게 응시하는 그의 영화들은 ‘반복과 차이’ 속에서 미세한 변화를 잡아내려고 한다. 그럴 때 강력한 자장을 가진 시간이라는 변인이 개입하게 되면 모든 것이 흔들려버려 미묘한 양상을 그려내는 게 어려워진다.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제외하면 그의 영화들에서 주인공이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한번도 없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죽음이야말로 시간성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는 모티브이고, 시간이라는 변인이 가장 강렬하게 영향을 끼친 흔적이기 때문이다(극에서 시간의 영향력을 최대한 축소하려는 창작자는 죽음이라는 모티브를 배제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 죽음은 제한된 시간 속에서 기괴하게 왜곡되거나 수용하기 어려운 감상주의의 얼룩을 남기거나 그때까지 묘사되었던 모든 것들을 한순간에 파괴하는 내러티브의 폭탄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까 시간의 흐름을 최대한 배제해온 그의 방법론은 물의 흐름이 인위적으로 잘 통제되고 있는, 일종의 실험실과 같은 환경을 지닌 인공호수에서 수중 생태계의 일상을 면밀하게 관찰하는 것과 유사하다.

최악의 상태에 놓인 홍상수와 그의 변화

그런데 <옥희의 영화>에 이르러 홍상수는 호수에서 벗어나 바다를 향하는 강으로 뛰어들었다(그 조짐은 극의 대부분이 플래시백에 해당되는 <하하하>에서부터 엿보였다).

사실 송 교수(문성근)에 대한 추문의 진상을 면전에서 캐묻던 진구(이선균)가 채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GV 자리에서 자신과 관련된 소문에 대해 관객 앞에서 추궁당하며 끝나는 1부 ‘주문을 외울 날’은 전형적인 홍상수 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2부 ‘키스왕’이 시작되면서 이 신작은 전작들로부터 점차 멀어져간다. 그리고 3부 ‘폭설 후’와 4부 ‘옥희의 영화’가 펼쳐지면서 놀라울 정도로 새로운 경지가 전개된다. ‘옥희의 영화’는 이제까지의 홍상수 영화들과 완전히 다른 작품인 동시에, 내가 이제껏 한번도 본 적 없었던 영화다(흥미롭게도 이 4부작에서 인물들의 동일성은 온전히 확보되지 않는다. 아내가 진구의 이름을 잘못 부르는 해프닝으로 이 작품이 시작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오! 수정>에서 이름이 잘못 불릴 때의 뉘앙스와 달리 도착된 동일성에 대한 암시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인물의 동일성이 깨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글에서 설명하고 있으므로 더이상 거론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 인물들의 동일성이 깨지는 것은 ‘부분적’이기에, 이 글에서는 일단 세 배우가 연기하는 세 주인공이 4개의 이야기 속에서 기본적으로 같은 사람이라고 전제할 것이다).

진구가 학교와 회식 자리와 GV 행사를 떠도는 1부는 하루라는 짧은 기간 동안 펼쳐진다. 크리스마스까지 (아마도) 3일간의 일을 다룬 2부도 그렇다. 3부 역시 폭설이 내렸던 다음날 하루에 국한된다. 하지만 영화 속 영화의 형식을 띠고 있는 4부는 이제까지와 많이 다르다. 12월31일과 1월1일에 발생한 두개의 이야기를 교차하고 있는데 그 두 날 사이에는 햇수로 2년, 날수로는 정확히 366일 차이가 있다(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옥희의 영화>는 4명의 스탭과 13회차 촬영으로 완성됐다. 촬영 기간이 짧아지고 촬영 여건이 간소해지면서 내러티브에서 시간의 진폭은 더 커지는 역설!).

더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에피소드들의 관계다(인물들의 깨진 동일성 때문에 시간 순서를 명확히 따지는 것은 곤란한 일이지만 대략적 파악은 가능하다). 2부와 3부는 (송 교수의 달라진 처지를 논외로 놓고 보면)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것으로 일단 추측할 수 있다. 1부는 2-3부 이후 적어도 십수년이 지난 상황에서의 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4부는 (그것이 영화 속 영화라는 것을 고려하면) 2-3부 이후의 상황에 대한 일종의 후일담 역할을 한다.

물론 이 네 에피소드의 관계는 단선적인 시간 순서로 온전히 배열되지는 않는다. 1부 이후의 상황은 1부의 주인공인 진구 입장에서의 플래시백으로 볼 수도 있다. 1부를 2부의 진구가 꾼 꿈이나 진구가 만든 영화(이를테면 ‘진구의 영화’)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4부와 2-3부의 관계는 일반적인 시간 순서의 맥락으로 파악하는 데 큰 무리가 따른다. 왜냐하면 4부는 (아무리 극중에서 경험에 바탕한 것이라고 전제되어도) 2~3부로부터 따로 떨어져서 허구의 틀을 빌린 일종의 논평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1-4부가 2-3부와 맺는 관계가 혼란스럽더라도, 거기엔 상당한 시간의 흐름이 전제되어 있는 게 사실이다. 설혹 영화 속 영화이거나 영화 속 꿈으로 읽어내도 그렇다. 그리고 에피소드들 사이의 혼란스러운 연대기적 순서와 비논리적인 관계는 시간적 맥락의 파장을 더욱 크게 키워놓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게다가 홍상수는 제작과정에서 영화 속 날짜와 실제 촬영날짜를 일치시켰다. 4부의 12월31일과 1월1일 분량은 실제로 한해의 마지막 날과 첫날에 촬영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배경인 2부의 장면 역시 크리스마스 당일에 찍었다(크리스마스 아침을 배경으로 젊은 연인의 낭만적인 키스와 앞날에 대한 싱싱한 다짐을 묘사하고 있는 홍상수의 영화를 보는 날이 오다니!).

완성된 상태에서 이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3부는 경이적이면서도 필수불가결한 부분으로 보인다. 하지만 감독은 1-2-4부를 다 찍은 상태에서도 장편영화의 러닝타임 하한선이라고 할 수 있는 80분에 못 미쳤기에 그제야 송 교수가 중심이 되는 에피소드를 추가로 떠올리고서 3부를 하루 만에 찍었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말했다. 왜 부가적으로 찍은 부분이 하필 3부의 그 내용이었을까. 그것은 혹시 시간에 대한 맥락이 상대적으로 가장 약한 대목이 3부였기 때문은 아닐까(이 영화에서 시간을 포괄하는 그물망은 1-2-4부를 다 찍은 순간 상당 부분 완성됐다).

‘주문을 외울 날’의 마지막 신에서 진구는 관객 앞에 이렇게 말한다. “오늘 하루 어떤 사람을 만나면 어떤 인상을 받고 ‘아,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구나’ 하고 나름대로 판단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사람을 내일 만나게 되면 또 다른 면을 보게 되고 또 다른 면을 판단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제 희망은 제 영화가 그렇게 살아 있는 무언가와 비슷하게 만들어지는 물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건 항상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홍상수의 목표였다. 그리고 <옥희의 영화>에서 그 목표는 가장 풍부하게 성취되었다. 영화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물건이 되려면 거기엔 시간성이 좀더 강하게 부여되어야 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시간 속을 흘러간다는 말과 다르지 않으니까.

홍상수는 인터뷰에서 <옥희의 영화>라는 영화에 착수할 때 개인적으로나 촬영 조건으로나 최악의 상태였음을 밝힌 바 있다. 그처럼 어려운 상태에서 영화를 만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했다는 게 <옥희의 영화> 촬영을 강행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최악의 상태에 놓인 홍상수가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는 상태에서 무지막지하게 촬영을 밀어붙였을 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영화에 내려앉게 된 것은 시간에 대한 감각이었다.

퇴장할지언정 고개를 떨구진 않는다

그리고 시간에 대한 감각은 필연적으로 정서를 불러들였다. 홍상수의 이전 작품들과 달리 <옥희의 영화>에 페이소스가 짙게 배어 있다면 그것은 상당 부분 이 영화가 시간의 흐름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집사람이 예전 같지 않다”라는 이 영화의 첫 내레이션 자체가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 시간의 흐름은 필연적으로 변화를 배태한다. 그리고 인간이 느끼는 정서의 상당 부분은 변화와 관련된 것이다. 실존 인물이든 극중 인물이든 시간을 두고 누군가를 오래 지켜보면 연민을 느낄 수밖에 없다.

<옥희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서는 연민이 느껴진다. 그들은 부분적으로 자기 연민이란 감정을 갖기도 한다. 특히 극중 송 교수가 두 차례 뒷모습을 보이면서 걸어가는 장면은 무척이나 쓸쓸하다. 이 영화에서 흘러가는 시간과 흘러오는 시간은 하나의 관계를 종료시키고 새로운 관계를 출발시키는 과정에서 지체와 서행으로 감정의 침전물을 남긴다. 그리고 한 사람은 누군가의 등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누군가에게 등을 내보이며 서서히 퇴장하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무망하게 주문을 외운다(그렇더라도 이 영화의 인물들에겐 1인분씩의 위엄이 있다. 퇴장할지언정 고개를 떨구진 않는다. 세월 앞에서 ‘위풍당당’할 순 없을지라도 여전히 시간 속을 터벅터벅 걷는다. 그런 그들에게 어쨌든 12월31일은 지나갔고 1월1일은 다가왔다).

<옥희의 영화>는 쓸쓸하다. 쓸쓸하다는 것은 무엇보다 변화에 대한 느낌이고 시간에 대한 감각이다. 계절의 순환이든 관계의 상실이든 쓸쓸함은 ‘더이상 ~이 아니다’라거나 ‘더이상 ~이 없다’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찾아온다. 쓸쓸함에서 중요한 것은 부재 자체가 아니라 부재를 낳은 시간이고 세월이다. 결국 쓸쓸함은 삶에서 특정한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에 격발되는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무상한 세월의 흐름 앞에 선 인간의 실존적이고 원초적인 반응이다. 물론 그 쓸쓸함이 마지막으로 가닿는 곳은 시간의 끝, 즉 죽음과 소멸이다. 홍상수의 영화는 이제 인간의 죽음을 다룰 준비가 되어 있다.

<옥희의 영화>에는 “인위적인 것을 통하지 않고는 네 진심이 안 통해. 인위를 통해서 네 진심으로 가는 거야”라는 대사가 나온다. 그동안 홍상수 영화들에서 그 ‘인위’를 담아내는 그릇은 주로 ‘구조’였다. 그리고 그 구조는 누차 설명해온 대로 ‘반복과 차이’를 드러냈다(<옥희의 영화>에서 인물의 동일성이 대체로 유지되면서도 부분적으로 파괴되고 있는 양상은 ‘반복과 차이’가 이제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에도 적용된 경우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런데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먼저 반복을 실행해야 한다. 그리고 반복되는 것들 속에 통념이 있고 상투가 있다. 이제까지 홍상수가 반복을 실행하면서 외운 주문은 공간의 변주였다. 변주된 공간들 속에서 현실 1-1은 현실 1-2와 별다른 장애 없이 비교가 가능했다.

하지만 <옥희의 영화>에서 “두 그림을 붙여놓고 보려는” 시도는 좀더 불규칙하고 복잡한 변수들로 인해 “효과가 절감”된다. 이 영화의 4부는 이제까지 홍상수가 만들어온 작품들과 흡사한 구조를 갖고 있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런데 여기엔 결정적 차이가 있다. 4부의 두 가지 이야기가 같은 공간에서 유사하게 반복되고 있는 사이에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다. 반복되면서 그 과정에서 차이를 드러내는 4부의 디테일들은 이전과 달리 시간이라는 변인이 상당 부분 영향을 미친 결과다. 양상은 훨씬 더 복잡해졌고 홍상수는 바빠졌다.

나는 <옥희의 영화>가 홍상수 영화세계의 제3장을 열어젖혔다고 조심스럽게 예측한다(1장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2장은 <극장전>에서 시작됐다). 홍상수는 이제 그의 작품을 새로 지탱하게 된 또 다른 축으로 눈을 돌렸다. 시간이라는 망망대해 속에서 그는 어떻게 노를 저어나갈 것인가.

홍상수는 1996년에 우리의 눈이 뜨이게 했고, 2005년에 우리의 눈을 비비게 했다. 아니, 지난 십수년간 흥미롭지 않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내게 이 자유롭고 진보적인 예술가는 바로 지금 가장 흥미진진하다.

글 : 이동진 (이동진닷컴)
Posted by 木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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