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사고
가해-피해 학생, 법원서 얼굴보자… 10대 학교폭력, 가해자 처벌했지만 피해자·부모 ‘트라우마’ 시달린다
정유진 기자 sogun77@kyunghyang.com

ㆍ17세 박민호군 사례

학교폭력이 사회문제로 부각되자 교육당국과 경찰은 가해학생의 처벌을 강화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그러나 폭력 가해자를 엄벌하는 게 문제의 근본 해법이 될지는 의문이다.

학교폭력의 피해자인 고교 2년생 박민호군(17)의 사례는 학교폭력이 가해자 처벌로는 부작용만 낳을 수 있다는 본보기다. 박군은 가해학생 처벌 과정에 오히려 성격이 더 폭력적으로 변하는 트라우마를 경험했다. 그는 가해자와 담임교사, 심리상담사가 모두 참여한 프로그램을 통해 가해학생의 진정한 반성과 사과를 받은 뒤에야 충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

학교로 가는 경찰들 서울 종로구 내자동 서울지방경찰청에서 4일 열린 ‘스쿨 폴리스(학교지원경찰관) 발대식’에서 이강덕 서울경찰청장(왼쪽)이 직원들과 선서를 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 처벌만으론 치유되지 않는 상처

사건의 발단은 2010년 5월로 돌아간다. 당시 고1이었던 박군은 사소한 이유로 같은 반 친구인 김수혁군(17·가명)과 다투다가 학교 탈의실에 끌려가 30분 동안 폭행을 당했다. 박군을 폭력으로 제압해온 김군은 ‘독재자’로 변했다.

이후 자신이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박군을 불러내 주먹을 날리고, 담뱃불로 지지기도 했다. 김군은 그해 2학기 인근 학교로 전학을 갔다. 박군은 ‘드디어 벗어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지만 안도감은 잠시뿐이었다. 김군은 밤마다 전화로 박군을 불러냈다. 폭력은 옆방에서 부모님이 자고 있는 김군의 집 안에서도 이뤄졌다. 김군은 부모님이 깰까봐 박군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눈에 청테이프를 붙인 후, TV나 인터넷에서 본 장면들을 박군에게 그대로 시험했다.

7개월 동안 계속된 끔찍한 폭행은 이를 알게 된 박군의 친구가 김군을 경찰에 신고하면서 외부에 알려지게 됐다.

김군에 대한 사법처리 절차가 시작됐고, 박군은 경찰에 “최대한 강력한 처벌을 원한다”고 요구했다. 박군은 주위의 도움으로 심리상담 치료를 받으며 학교 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나 박군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김군에 대한 사법처리가 시작되면서 느꼈던 안도감은 잠시뿐이었다. 김군에게 당했던 일이 계속 머릿속에 떠오르며 견딜 수 없는 수치심이 밀려왔고, 그 누구보다 두려운 존재인 김군이 나중에 보복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심도 생겼다.

주위의 모두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아무도 박군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김군의 부모는 하루가 멀다 하고 그의 집에 찾아와 무릎 꿇은 채 “돈을 줄 테니 제발 합의해 달라”는 사정뿐이었다.

게다가 박군의 아버지가 가난한 집안 형편 탓에 박군 몰래 돈을 받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후 박군의 분노는 더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았다. 부모에게 욕을 퍼붓고, 길 가다가 어깨만 부딪쳐도 지나가는 행인에게 죽을 듯이 달려들었다.

학교 선생님이 잔소리를 하면 대들다 못해 벽에 머리를 찧으며 자학을 했다.

학교에서는 박군에 대한 퇴학 처분을 논의했다. 가해자인 김군이 사법처리를 받게 됐지만 피해자인 박군의 괴로움은 더 커졌다.

■ 진심이 통해야 아픔 치유

박군의 학교폭력 사건은 검찰을 거쳐 서울가정법원에 이송됐다. 지난해 10월 판사는 양형을 내리기 전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 개념에 입각한 ‘가해자-피해자 화해 프로그램’을 권유했다.

박군은 처음엔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나 막판에 마음을 바꿨다. 화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김군에게 직접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을 보면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아 전날 미리 심리상담사의 도움을 받아 편지를 썼다.

“…니가 주먹으로 강타할 때 정말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고…, 정말 수치스럽고 죽고 싶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너네 집이고 너네 부모님이 있어서 도망갈 수도 없었어…더 화나고 스트레스를 풀 사람이 없으니 욕하고 짜증나고 선생님한테 대들고 반항하게 되고….”

김군이 떨리는 목소리로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자신이 받았던 고통과 괴로움을 털어 놓자 가해자·피해자 할 것 없이 모두 눈물 바다가 됐다. “얘야, 정말 미안하다. 너는 이렇게 힘들었는데…” 이날 박군으로부터 직접 그가 겪은 괴로움과 고통을 듣게 된 김군의 부모는 더 큰 충격에 휩싸였다.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눈물만 흘리던 김군은 “정말… 안 해야 될 일을 해서 미안하고… 내가 너무 큰 피해를 줘서… 너랑 너의 어머니께도 정말 죄송하다는 말을…”이라고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박군의 어머니도 가슴을 쳤다. “내가 밤늦게까지 식당일을 하느라… 엄마가 돼가지고는 자식이 이렇게 힘든데도 아무것도 모르고…. 미안하다, 미안하다”.

박군의 담임교사도 박군의 손을 잡고 사과의 뜻을 전했다. “너는 아직도 트라우마 속에 고통받고 있는데, 우리는 그동안 너가 학교 기물을 파괴하고 교사에게 반항하는 것만 보고는 징계 운운했었구나”.

석 달이 흐른 지금, 박군의 상태는 많이 좋아졌다. 예전처럼 분노를 제어하지 못해 마냥 날뛰던 증세는 사라졌다. 주위 사람들 모두로부터 진심 어린 사과를 받은 덕이다. 머릿속에서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괴물’처럼 남아있던 김군의 마지막 모습은 잔뜩 움츠러든 채로 눈물을 흘리며 사과하는 모습이었다.

박군은 김군을 용서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용서하기엔 너무 고통스러운 기억이다. 그러나 그는 “수혁이가 더 비뚤어지지 않는 것이 나한테도 안전한 것 같다”고 말했다.

“사건이 터지고 난 다음 가해자에 대한 처벌만 이야기했지 정작 피해자였던 난 잊혀졌어요. 수혁이가 가장 강력한 형벌을 받기 바랐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런다고 나의 고통이 사라질 것 같지는 않았어요. 형량을 높이면 학교 폭력이 없어질까요. 잘 모르겠어요.”
Posted by 木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