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영, 아이돌

영화 2011. 2. 4.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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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아이돌을 공감하는 ‘돌봄의 정서’ / 허문영

[한겨레] 얼마 전 영화를 공부하는 한 대학생과 아이돌 스타에 관해 몇 마디 말을 나누었다. 그와 친구들은 동방신기의 해체를 애통해했고, 보아의 귀환을 반겼으며, 2NE1의 신곡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들은 영화와 예술에 대한 지적 관심이 높은 사람들인데다 20대 중반의 나이이기 때문에, 나는 이 사태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내 의문에 대해 그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가 그들을 좋아하는 것에는 돌봄의 정서가 있는 것 같다.”

돌봄의 정서? 그의 설명은 이랬다. 아이돌 스타가 되기 위해 얼마나 혹독한 과정을 경유하는지, 그리고 지금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무서운 긴장과 훈련을 해야 하는지 그와 그의 친구들은 잘 알고 있다. 그 힘겨운 과정을 버텨내고 아이돌이 무대에서 화려한 퍼포먼스를 해낼 때, 열광 이전에 일종의 안도와 연민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이었다. 세대적인 동질감과 연관된 돌봄의 정서가 그들 세대에서 얼마나 보편적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 말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알겠다. 아이돌에 대한 그들의 호의는 소위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복합적인 것이다. 다만 몇 가지 생각들이 꼬리를 문다.

먼저, 그 돌봄의 정서에는 일종의 포기가 전제되어 있는 것 같다. 아이돌을 길러내는 거대 연예기획사들, 그들의 기획을 추동하는 연예산업의 작동방식, 그 연예산업을 자본의 논리로 일원화하는 배후의 시스템 전체를 일종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더 이상 회의하지 않는 것이다.

구세대가 자연스레 떠올릴 수 있는 질문, 예컨대 1980년대에 들국화, 신촌블루스, 시인과 촌장, 봄여름가을겨울, 김현철, 장필순을 배출한 동아기획의 후예가 왜 2010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가, 같은 질문이 포기된 곳에서, 개별적 생존에 대한 절박한 염려만이 메아리친다. 이 염려가 우애에 가까운 연민을 낳는 게 아닐까. 혹은 이것이 ‘슈퍼스타K’가 주는 감동의 바탕을 이루는 게 아닐까. 

개인적으로 더 깊이 생각하게 되는 것은 또다른 문제다. 그 돌봄의 정서가 작동하기 위해선 아이돌과 ‘나’의 유전적 사회적 불평등이 끔찍한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최소한의 유복함이 전제되어야 한다. 우리가 대중매체로 접하는 아이돌은 훌륭한 인격과 재능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육체적으로 ‘우월한’ 유전자의 소유자로 비친다.

문제는 그들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걸쳐 있다는 것이다. 내가 속한 세대가 그 나이였을 때, 우리의 우상은 산울림이거나 조용필이거나 들국화였다. 그 우상들은 대개 어린 우리가 우러러보기만 하면 되는 윗세대였고 성숙한 장인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대부분 육체적으로 우월하다고 볼 수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 자신과 같은 세대가 우월한 유전자와 화려한 사회적 지위의 우상으로 등극할 때, 그들을 바라보는 10대의 마음속에는 어떤 요동이 치고 있을까. 더구나 그가 평범한 유전자와 지능과 재능의 소유자라면 그의 아이돌에 대한 동경 속에는 어떤 고통이 도사리고 있을까.

그 세대의 대부분을 차지할 평범한 10대가 아이돌을 거의 매일 접하면서 겪을지 모를 마음의 동요와 통증을 나로서는 도저히 알 길이 없다. 다만 우리가 전혀 체험하지 못한 우울을 그들이 겪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할 도리밖에 없다. 나는 돌봄의 정서를 말한 그 학생과는 다르게 아이돌, 특히 어린 걸그룹을 접할 때마다 마음이 불편해지는 걸 어쩔 수 없다. 내게 그 세대에 속한 딸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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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木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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