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나의 ‘올해의 영화’는 아핏차퐁 위라세타쿨의 <엉클 분미>이다. 일부에서는 이미 본 아핏차퐁의 이전 영화를 내세우면서 그의 영화가 진부해졌다는 견해도 있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이 영화가 그의 가장 창의적인 영화는 아니다. (가장 창의적인 건 그의 데뷔작 <정오의 이상한 물체>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만들어진 그의 영화중에서 가장 성숙한 영화인 것은 사실이다. 아핏차퐁은 21세기 영화의 무대에 갑자기 나타났고, 종종 두려운 느낌이 들 정도로 영화의 현재를 존재하게 만드는 사유의 능력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종종 절단시키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는 확장시켜나간다기보다는 그 힘의 방향을 다른 쪽으로 선회시켜나가는 쪽을 택했다. 새로운 배치. 불연속의 계열. 정글은 새로운 영화-영토가 되었고, 영화는 인간성의 시간에 대해서 새로운 질문의 방법을 획득하였다. 경험한 적이 없는 영화 안의 시간의 선. 그러나 나는 항상 아핏처퐁의 영화를 볼 때마다 무언가, 어디에선가, 아이디어 단계에서 머문다는 느낌을 받았다. 혹은 그가 영화에 대해서 미숙하다는 생각을 지속적으로 하였다. <엉클 분미>에서 그는 마치 그 질문을 의식한 것처럼 서로 상이한 항의 쇼트들을 일사불란하게 펼쳐내고 다시 접은 다음 매우 두텁게 고정점을 마름질하였다. 이 영화는 아핏차퐁의 두 번째 데뷔작이라고 부를 만하다. 그는 더 멀리 나아갈 것이다.

홍상수의 열 번째 영화 <하하하>는 내 생각에 <극장전>과 함께 그의 영화중에서 가장 훌륭한 영화이다. 물론 지난해에는 <옥희의 영화>도 있었다. 동료들 중에는 이쪽을 더 지지하기도 한다. 그 견해를 대표하는 사람은 이동진이다. 나는 생각이 다르다. <옥희의 영화>가 파토스를 이용해서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지나치게 불균질 하다. 그건 의도적으로 그렇다기보다는 종종 인물들이 완전히 선 바깥으로 빠져나가버린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그 선을 다시 연결하기 위해서 영화는 지나치게 전략적이 된다. 하지만 <하하하>는 더 할 나위 없이 자유롭다. 홍상수는 처음 시작할 때 구조 안의 무의미와 맞붙어 싸웠다. 의미와의 이 무시무시한 싸움. 그는 구조 안에서 구조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총체적인 효과와 그 요소들이 만들어내는 내적인 규칙들이 사실상 인간적인 놀이의 기만임을 끌어내기 위해 구조자체를 조롱하는 쪽으로 밀고 나아갔다. 그러나 그의 냉소적 이성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갑자기 중단되었다. 그 이상한 조짐은 이미 기괴한 방식으로 여기저기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난데없는 패닝(<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과 불쑥 끼어드는 줌(<극장전>)은 그의 영화 안의 엔트로피가 되었다. 물론 구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홍상수는 빗장 풀린 구조가 되었을 때 그 안에서 벌어지는 관계들 사이의 진동들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마치 즉흥연주를 내세운 악기들 사이의 음향과 리듬을 따라가는 것처럼 음악적이 되어갔다. <하하하>는 둘이 주고받는 대화로 시작해서 마치 악기의 편성을 늘려가는 것처럼 인물들이 차례로 늘어나기 시작한다. 그는 마치 악기의 성질을 고르듯이 배우들의 용례와 역량을 알기 위해서 이리저리 건드려본다. 종잡을 수 없는 벡터들. 그 안에서 배우들은 전례 없이 자유롭게 활동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문소리는 이제까지 그녀의 모든 연기 중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유준상은 이제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인물의 발견이고, 김상경은 더 풍요로워졌다. 나는 김강우를 여기서 처음 그의 가능성을 볼 수 있었다. 이야기는 느슨해졌고, 홍상수는 그 안에서 그 어떤 일관성도 강조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그들이 만들어내는 화음에만 주의를 집중하고 있다. <하하하>는 무엇보다도 그 리듬이 아름다운 영화이다.



코엔 형제의 <시리어스 맨>은 별 기대 없이 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이미 걸작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찍은 다음이기 때문이다. 코엔 형제는 항상 놀랄만한 영화를 만들어낸 다음 거의 기대를 포기할 때까지 실망스러운 영화를 줄기차게 만들어내곤 했다. 심지어 그게 고의적으로 부리는 심술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레이디 킬러>와 <참을 수 없는 사랑>은 심지어 끔찍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기습을 하듯이 슬그머니 걸작을 내놓곤 하였다. 이를테면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이게 종종 단지 좋은 정도가 아니라 매번 그들의 ‘최고’ 걸작의 자리를 갈아치울 정도가 될 때에는 아찔한 느낌마저 불러일으키곤 하였다. 나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본 다음 거의 즉각적으로 아, 이건 굉장하다, 는 감흥에 사로잡혔다. 토미 리 존스는 마치 이 영화를 위해서 태어난 사람 같았다. 그저 간단한 음향과 단순한 편집만으로도 안톤 쉬거가 뒤쫓아 오는 장면은 거의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였다. 그 영화적 순간들은 너무 간단해서 혹시 마술을 부리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다음 <번 애프터 리딩>을 보면서 너무 실망스러워 한숨을 내쉬면서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라고 탄식을 하였다. 문제는 얼마나 이 실망이 오래 갈까, 라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시리어스 맨>을 그냥 코엔 형제의 소품 정도로만 생각했다. 내 생각은 틀렸다. 코엔 형제는 1960년대 미국의 노이로제를 괴이한 방식으로 풀어나갔다. 이 영화는 마치 자신이 1960년대에 쓰여진 대중소설처럼 위장하고 전개된다. 랩비들의 프롤로그는 아포리즘이거나, 매거핀이거나, 혹은 패러독스의 알레고리일 것이다. 1960년대라는 불안 안으로 들어간다. 쿠바사태. 케네디 암살, 베트남전, 제퍼슨 에어플레인,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의 시위, 우드스톡. 이때 코엔 형제는 어떤 것도 지칭하지 않는다. 그 대신 무언가 지금 매우 위험한 그 무언가에 어떤 저지선을 넘어서서 지나치게 다가가기 시작한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알 수 없다. 너무 흔한 일상적 대화와 평범한 사건들이 돌이킬 수 없는 위험을 불러오고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뿐이다. 무언가 회복될 수 없을 것만 같은 사건의 기다림. <시리어스 맨>은 그 기다림만으로 한편의 영화 안의 긴장을 만들어낸다. 그런 다음 우리가 마지막 순간에 마주보는 것은 미국 성조기를 날려버리고 상징의 네트워크를 찢어버릴 것처럼 닥쳐오는 거대한 토네이도의 모습이다. 실재와의 대면. 이 알 수 없는 황홀감. 이제 <시리어스 맨>을 보았으니 실망을 기다리면 되는 것일까. 천만의 말씀. 심지어 (이미 미국에서 개봉을 하고 올해 베를린영화제 개막작인) 다음 영화 <진정한 용기>는 21세기 서부영화의 걸작이(라고 한)다.

네 번째 영화. 나도 알고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셉션>에 대해서는 서로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나는 두 견해 모두를 포함해서 동의한다. 우선 반론. <인셉션>은 꿈과 현실 사이에서 블랙홀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지만 이야기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사람들의 주장과 달리 이 영화의 이야기는 너무 단순해서 문제가 생겼다. 만일 이런 정도의 수준으로 이야기의 게임을 하자는 것이었다면 나는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관람을 말리고 싶다. 이미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를 뒤트는 것은 1959년 알랭 레네가 <히로시마 내 사랑>을 만든 이후 수 없는 변주가 이루어졌다. <인셉션>은 시각적 효과라는 점에서도 효과적이지 않았다. 고작 예고편에서 본 놀라운 장면들이 정작 영화를 보니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영화를 열편에 포함시킨 것은 지난해에 본 영화중에 가장 인상적인 시퀀스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장담할 수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오로지 이 시퀀스를 펼쳐 보이기 위해서 <입셉션>을 찍은 것이다. 나머지는 모두 이 장면을 만들기 위한 알라바이일 뿐이다. 꿈속에 들어간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그 일행이 난간을 들이받고 강물로 떨어지면서 세 개의 꿈의 시퀀스가 오가는 장면은 여전히 영화에서 그 어떤 테크놀로지의 도움보다 편집이 얼마나 훌륭한 효과적인 ‘특수효과’인지를(두 개의 효과의 아이러니!) 보여주는 27분간의 곡예에 가까운 순간이었다. 이때 세 가지 씬은 서로 다른 속도를 가지고 달리고 있었으며, 자동차는 있는 힘을 다해서 할 수 있는 한 가장 천천히 추락하고 있었다. 명백히 그리피스의 <인톨러런스>를 모델로 하여 21세기 버전을 만들고자 했던 크리스토퍼 놀란의 이 실험적인 시퀀스는 그 순간 쇼트들의 집합 사이에서 한 편으로는 한없이 팽창되고 있는 나선을 따라 열리고 다른 한 쪽 끝에서는 추락의 모티브를 따라 제한된 시간 내에 하강하는 벡터를 따라 수축되는 삼각형 원뿔 통의 침점처럼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걸 아이맥스 스크린으로 볼 때 정말 현대 영화관의 하이테크의 유혹을 거절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말 그대로 극장의 유혹. 두 번째 이야기 일부 끝. 이부에 계속. 

Posted by 木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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