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원인터뷰

예술 스크랩 2010. 12. 12. 14:13
윤덕원(브로콜리 너마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보편적인 노래 만들기 
신호미 homey81@gmail.com | contributor
 
(다소 쓰잘데기 없는) 공용 프롤로그 

몇 년 전 직업상∙건강상의 이유로 홍대앞 인디 씬과 거리를 두고 있었을 때 '연대' 출신의 한 인디 밴드 멤버와 만난 일이 있다. 그때 그는 '요즘 인디씬의 서울대 강세' 현상을 말해 주었다. 그때 나는 이상하게 '내가 그 현상에 애정과 관심을 가지면 안 된다'라는 강박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서울대 출신 인디 밴드들의 선전에 관한 이런저런 담론들을 듣고 읽으면서 나의 강박은 굳어갔다. 어느 '고졸' 레이블 운영자(참고로 그는 정말 '지성적'인 사람이다)는 "어려서부터 1등 해 본 애들은 뭘 해도 1등 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아요."라고 농반진반이자 언중유골의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그 대학교의 악영향'이라는 일반론으로 환원할 수 없는 다른 서사는 없는 것일까. 그 대학교를 나온 사람이라고 해도 삶이 천차만별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대학교를 나와서 뮤지션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도 왜 상이한 생각을 하고 상이한 길을 걷는 것일까. 이런 생각에서 지난 봄부터 '서울대 출신의 인디 뮤지션들' 몇몇을 만났다. 그들의 증언들을 적절한 타이밍이 있을 때 공개하고자 한다. 아, 까놓고 말하겠는데 '팔이 안으로 굽는' 일은 최대한 피하려고 노력했다. 



(관행을 따른) 개별 프롤로그 
'평단에 대한 임팩트'라는 관점에서 볼 때 2010년 한국의 인디음악계는 9와 숫자들의 1집 앨범으로 시작해 브로콜리 너마저의 2집 앨범으로 끝나는 것 같다. 이렇게 2010년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는 밴드 브로콜리 너마저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존재처럼 보인다. 그들의 음악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지만, 그런 사람들마저도 '싫어 죽겠다'고 외면하지는 않는 것 같다. 아, 그들을 탈락시킨 <대학가요제> 심사위원들이나 최근 "졸업"을 금지시킨 KBS의 심의위원은 제외해야 할 것 같다. 어쨌거나 브로콜리 너마저의 정규 1집은 소리소문 없이 다섯 자리 숫자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네 자리 숫자의 판매량을 넘는 일도 쉽지 않은 작금의 상황에서, 이 밴드의 프론트맨 (윤)덕원은 '성공한 벤처 음악인'처럼 보인다. 서울의 '변두리'에 위치한 대학교의 노래 동아리, 예전 이름으로 '민중가요 노래패'에서 생애 처음으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는, 그러니까 10대 후반~20대 초반부터 홍대앞 클럽들을 들락거리던 청춘들과는 뭔가 다른 출신 성분을 가진 그가, 까다로운 취향을 가진 동네에 기반을 두고 조용한 성공시대를 누리고 있는 데에는 어떤 특별한 비결이 숨어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보편적인 노래들" 덕분에 자연스럽게 행운이 찾아온 것일까. 2집 앨범 녹음을 진행 중이던 지난 5월, 그를 만나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일시: 2010년 5월 19일 
장소: <상상마당> 6층 카페 
질문: 신호미 | 사진: 없음 
정리: 신호미
 


1. 축제하던 사람 덕원: 2001-2003 

[weiv]: 이 인터뷰의 취지를 먼저 설명할께요. (중략) 먼저 대학생활에서 문화 게열의 활동을 하게 된 배경이나 동기부터 이야기를 시작할까요? 
덕원: 일단 제가 문화 계열에 들어온 게 된 것은 창원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 노래 동아리 메아리에 들어가면서부터죠. 거기서 보고 배우면서 연주라는 걸 그때 처음 했어요. 그리고 동료들을 많이 만났고요. 거기에서 파생되는 많은 인맥이 있잖아요? 깜악귀(김남훈)나 고건혁이 있던 스누나우(SNU now) 같은 학교 언론이라든가, 일련의 미대쪽 디자이너들, 보드카 레인의 안승준, 그리고 지금 붕가붕가 레코드에서 디자인 작업을 하고 있는 김기조, 브로콜리 너마저의 디자이너 ㅇㅎ 등이 그 당시에 만난 사람들이고 지금까지 같이 하고 있는 사람들이죠. 

[weiv]: '축제하는 사람들(일명 '축하사')이라는 모임이 중요했다고 하던데… 누가 어떤 활동을 한 것인지 조금 구체적으로 말해줄 수 있을까요? 
덕원: 그렇죠. 그 전까지는 알음알음으로 사람들을 만났다면, 그 사람들이 모인 게 축하사였죠. 2003년 1학기 당시에는 저(윤덕원), 안승준, 그리고 다른 친구들이 더 있었는데, 그 다음에 고건혁, ㅇㅎ, 김잔디, 김기조 등이 순차적으로 활동했죠. 축하사의 활동은 공연을 비롯해 문화활동이 포괄되어 있었어요. 그 전까지는 공연을 하면 예산이 100만원 정도였고 장비만 빌리는 수준이었는데, 축제는 해 볼 수 있던 게 많았고 다양한 사람들이 와서 섞였던 게 재미있었죠. 2003년 당시 축하사를 시작할 때만 해도 도발적인 것이었고 전통적인 대학축제와는 다르게 했기 때문에 그때의 그런 반작용에 대한 기억이 많아요. 참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고민을 많이 했었고. 

[weiv]: '축하사'의 전성기를 매개로 대학문화가 바뀌었다는 이야기이군요. 그런데 그런 변화를 유도하기까지 내부적 진통 같은 것은 없었나요? 덕원이 속했던 '민중가요 동아리'인 메아리의 경우부터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덕원: 메아리가 노래 동아리이니까 아무래도 변화를 많이 느낄 수밖에 없었죠. 민중가요가 아닌 인디 밴드 곡들을 연주하기 시작하고 밴드 스타일의 창작곡을 내는 경향이 98학번들인 이자람, 이정수(이기타), 조병진, 안승현에서 먼저 단추를 뀄다면, 01학번이나 02학번인 저희 때쯤에 한번 더 변화가 일어났다고 할까요?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모든 변화에는 갖춰져야 할 요건이 필요한데, 그 시간이 짧았던 게 장기적으로는 좋지 않았다는 생각도 들어요. 제가 1학년 때와 군대 갔다 온 다음은 또 다르더군요. 아마 03학번까지는 그래도 이전의 분위기라도 느껴 본 마지막 학번들, 특별히 학생운동에 깊이 관여하지 않더라도 (시위에서) 경찰한테 쫓겨서 뛰어 본 마지막 학번같네요. 

[weiv]: 그런 변화에 대해 대학생들이 '탈정치화'되었다는 비판적 담론도 있었던 것 같네요. 
덕원: 당시 저희들 내부에서도 논쟁이 많았죠. '하느냐 마느냐'로 밤새워 이야기하고, 지금 생각하면 웃길지 모르지만 '노급의 당파성' 등의 용어도 사용했어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시대의 흐름에 맞춰 좋은 노래가 계속 나오는 것이고, 그게 어떤 형식을 통해서 나오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예전 형식을 빌어 노래를 만드는 경우가 있을 거고, 지금 우리가 부를 때 좋은 노래를 만들 수도 있는 거죠. 그게 쉽지 않은 거잖아요? 음악을 한다는 것 자체가 대학생의 삶에서 많이 줄어든 부분도 있었고, 그래서 변화를 꾀하는 게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때쯤 실용음악 동아리들도 시작되고, 동아리를 하지 않는 본격 밴드들도 많이 생기고…. 

[weiv]: 그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과거 메아리의 영향이랄까, 영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또한 덕원에게 개인적으로 영향을 준 메아리 선배가 있었다면 누구일까요? 루시드 폴도 잠시 메아리 활동을 했다고 하던데… 
덕원: 메아리가 좋았던 점은 계속 고민하고 토론했다는 점이에요. 이런 고민하고 토론하는 문화가 결국 영향을 줬다고 생각해요. 그때도 메아리는 공부 [참고로 학교 공부가 아니다] 빡세게 시키는, 공부 잘하는 집단이었죠. 선배들 가운데는 97학번 김성민이 당시 메아리에서 새로 나온 곡들을 많이 작곡했는데 그런 모습이 좋았어요. 예전의 노래 형식이나 어법이 있기는 했지만 노래를 만들고 만든 노래를 공연에 올리는 모습을 보았던 게 좋았어요. 루시드 폴은 인터뷰에서 메아리를 언급했다고 들었는데 학번 차이도 좀 나고… 학생 때 만나 뵌 적은 없어요. 

[weiv]: 그렇다면 '노급의 당파성'이 더 이상 신조가 아니었다면 당시 메아리나 덕원에게는 어떤 신조가 있었던 걸까요? 
덕원: 뚜렷하지는 않지만 이런 건 있었죠. 이를 테면 '어떤 곡을 선곡하냐'에 있어서 지금 후배들은 해외 유명 밴드 곡도 연주하는 모양인데 저희 같은 경우는 '조금 더 의미 있는 곡을 하자', '사랑노래를 하지 말고 사회비판적 노래를 해 보자' 그런 움직임이 있었어요. 

[weiv]: 서울대학교 이외의 노래패에도 비슷한 변화가 있었나요? 
덕원: 이전에는 노래패들 사이에 결속이 좋았다고 들었는데 저희 때는 교류가 그리 많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다른 학교 노래패도 비슷한 방식의 변화를 겪고 있더라구요. 밴드 형식으로 바뀌고 가창자의 수가 적어지고… 제가 보기에 중창 중심의 형식에서 밴드 형식으로 변하는 것에 홍대앞 씬의 영향이 있었던 것 같아요. 중창으로 하면 새로운 노래가 잘 나오질 않아요. 사실 브로콜리 너마저에서도 중창을 더 하고 싶은데 가창력이 부족하고 연주를 해야 되니까(웃음). 

[weiv]: (송)재경의 증언으로는 덕원이 '기획의 천재'이고, 행사의 기획을 잘해서 메아리의 전성기를 이끌었다고 하던데 본인은 동의하나요? 그리고 덕원의 음악적 취향은 어땠나요? 
덕원: 그건 그렇죠(웃음). 말도 안 되는 것이라든가, 남들이 생각해 내지 못할 것을 건드리는 것을 좋아했어요. 그런 부분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생각하는 게 자유로웠던 것 같아요. 

[weiv]: 그렇게 자유롭게 상상하면서 기획을 할 수 있었던 음악적, 문화적 배경은 무엇이었을까요? 
덕원: 사실 (송)재경 같은 경우는 전형적인 록 키드였고 홍대앞에서 오랫동안 활동했고, 고건혁 같은 경우는 록 키드이면서도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조직적이나 논리적으로 뛰어났어요. 다들 준비된 친구들이었다면, 저는 사실 밴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처음 들어본 게 대학교 1학년 때였고 그 전까지는 일렉트릭 기타를 본 적도 없었어요. 저야 뭐 10대 때는 일반적인 지방 학생이 좋아하는 음악을 좋아했어요. 이승환과 오태호 등의 발라드를 좋아했었고, 그것도 찾아들은 게 아니고 사촌 형이 그런 음악을 좋아해 테이프로 들은 것이었죠. 고등학교 때 산울림을 테이프로 들은 정도였어요. 오히려 잘 몰랐던 게 약이 된 것 같습니다. 


2. 관악청년 그린티바나나 덕원. 홍대앞에서 붕가붕가하다: 2005-2007 

[weiv]: 그 뒤로 축제라는 '행사'를 넘어 음반을 자주제작하기 시작한 것 같네요. [밴드 밴드 짠짠] 말하는 겁니다. 
덕원: 그렇죠. 그때 모여서 기획을 했던 사람들이 음악적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축하사 이후에도 활동을 이어간 거죠. 2002년에는 깜악귀가 스누나우(SNU now) 중심으로 앨범을 기획해서 제작했고, 두 번째 앨범부터 고건혁이 맡으면서 축하사 사람들이 유입되어 2003년 말이나 2004년 초에 나온 거죠. 저는 그때 군대에 있어서 참여를 못 했지만 그 다음에 2004년 말~2005년 초에 3집이 나왔고 그때 그린티바나나라는 이름으로 제가 참가했어요. 

[weiv]: [밴드 밴드 짠짠]은 어떻게 배급(유통)되었나요? 일종의 '수익'도 있었나요? 이 음반은 온라인에서 기록을 찾기 힘든 희귀음반이 되었는데…. 
덕원: 당시 대학교 생협이 붐이 일 때였죠. 거기에 학생들의 활동이 강해서 예산이나 조직을 활용할 수 있었죠. 그래서 학생회관 매점 같은 곳에서 판매할 수 있었어요. 매점이나 식당에 학생 이사들이 참여했기 때문에 재미있는 활동을 많이 할 수 있었죠. 그 외에 캠퍼스 밖에 있는 로컬 서점, 예를 들어 그날이오면 같은 곳에서도 판매할 수 있었죠. 학교에서 지원금을 받고 제작했기 때문에 수익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누군가가 '덤태기'를 쓰지 않는 수준으로는 판매되었어요. 

[weiv]: 그러면 이제 홍대앞 진출의 단계까지 온 것 같군요. 
덕원: 두 장을 통해서 '관악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봤다'는 느낌이 있었고, 그때부터 붕가붕가라는 이름을 갖추기 시작하고 '이제 홍대 쪽으로 가봐야 하는 거 아니냐. 가봐야겠구나'라고 생각한 거죠. 사실 그때 이전에는 그런 생각도 해보지 못했어요. 거기에 2002년부터 깜악귀가 눈뜨고코베인을 결성했고 홍대앞에서 나름대로 주목받은 밴드 중 하나였고, 2004년경부터는 보드카레인도 홍대앞을 중심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가 봐야겠다는 생각에 불을 붙인 경향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게 실체화된 게 관악청년포크협의회였고, 그때 송재경의 역할이 중요했죠. 그는 그 전부터 홍대앞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인맥을 가지고 있었고 그 당시로서는 상당한 수준의 능력, 즉 노래를 녹음해서 레코딩하는 능력이 있었죠. 물론 훌륭한 뮤지션이기도 했고…. 관악청년포크협의회가 홍대앞에서 공연을 몇 번 했는데 생각보다는 반응이 좋았어요. 단지 송재경이 본인의 밴드인 그림자궁전 활동을 했기 때문에 2005년 전에 공연 활동을 끝내야 했어요. 

[weiv]: 그 다음이 붕가붕가 레코드겠군요. 이런 '사업체(?)'를 구상한 배경을 말해 줄 수 있나요? 
덕원: 붕가붕가의 경우 많은 사람들의 욕망과 비전이 결집되었던 것이었는데, 2005년에 시작할 때만 해도 성격이 불명확했어요.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사업체'라는 표현은 결국 음악 출판 활동(?)을 나름 진지하게 생각했던 결과였어요. 음악 하는 사람들 중에 사실은 중산층이 많거든요. 자기는 가난할지 몰라도 집은 가난하지 않아서 잘 안 되면 집에 들어가도 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저는 집을 책임져야 하는 게 있었어요. 그래서 저를 진탕하게 놓아두는 게 잘 안 되더라구요. 음악을 하고 싶지만 그때만 해도 전업에 대한 비전은 없었어요. 직장 다니면서 자기 돈 까면서 하는 건데 저는 '음악을 돈 들이면서 할 수는 없겠다'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생계 유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작가로서 자존심도 있고…. 그래서 음악 자체뿐 아니라 음악 외적인 면에도 관심을 가지고, '지속가능한' 쪽으로 생각하게 된 거죠. 프레스비가 부담이 되면 [공CD에] 구워서 팔자는 식으로…. 

[weiv]: 하지만 막상 초기에는 힘들었을 것 같은데…. 
덕원: 힘든 정도가 아니었어요. 뭐가 나오지 않았으니까요. 그래도 접을 생각은 없었어요. 비용이 나가지 않게 할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2006년에 송재경이 나가고 붕가붕가가 흐지부지된 상태가 되었던 것은 맞아요. 같이 일하던 친구들도 군에 입대하고, 대학원 때문에 정신 못 차릴 때였죠. 하지만 저는 학교 다니면서 밴드를 할 때였고, 브로콜리 너마저의 경우 온전히 제가 다 만들었고 디자이너만 불러서 디자인한 거였으니 사실 그 당시는 저 혼자 제작이나 유통을 다 하는 상태였어요. 

[weiv]: 그런데 희망이 보이던 순간 막상 덕원은 붕가붕가를 '박차고 나간' 것처럼 보였네요. 
덕원: 당시는 인디가 500장~1000장 시장이었는데 브로콜리 너마저 EP가 1,000장이 팔린 거예요. 그래서 뭔가 잘 될 거 같으니까 '다시 붕가붕가를 하자'고 했는데, 곰사장(고건혁)이 신중한 친구예요. 그런 게 사실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제가 붕가붕가를 나갔다기보다는… 당시 붕가붕가가 현존하지 않는 상황에서 제가 여러 일을 하는 상황이었거든요. 대표가 제 이름으로 박혀 있었으니 고건혁 입장에서도 지분을 주장하기 미안한 부분도 있었을 거고. 그 뒤 2007년 여름, 장기하의 음반을 제작하고 가을에 터지면서 지금의 붕가붕가가 확립된 건데,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다시 활동할 거면 왜 그렇게 약한 모습을 보였는가'라는 생각도 들죠. (웃음) 


3. 계피 너마저! 브로콜리 넷이서!: 2008- 


[weiv]: 브로콜리 너마저의 '어제'를 이야기할 때 계피에 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만났고 또 어떻게 헤어지게 되었는지 당사자 한 명의 담담한 소회를 듣고 싶네요. 
덕원: 개인 홈페이지를 운영하면서 '같이 밴드 하자'라고 공고를 올렸거든요. 잔디와 현호는 이미 합주를 하고 있었고요. 저 같은 경우 '아무나 와라'라고 생각했는데, 딱 한 명 연락이 왔어요. 사실 1집을 만들기 전까지만 해도 제게는 노래(곡)의 힘에 대한 강한 신뢰가 있었어요. '누가 불러도, 어떻게 연주하든, 노래만 좋으면 다 된다'라는 생각이었죠. 그런 전형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고, 어느 정도는 이루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요즘엔 조금 바뀌기는 했어요. 어쨌든 그렇게 밴드 멤버가 되었죠. 그리고 무엇보다 계피의 음색이 좋잖아요? 

[weiv]: 브로콜리 너마저의 정규 1집 앨범은 루오바의 이름을 달고 나왔잖아요? 이제 많이 알려져 있지만, 계피는 밴드를 나와서 루오바에 남아 가을방학으로 활동하고 있고…. 
덕원: EP를 내고 활동하던 도중에 루오바에서 같이 일하자는 제의가 왔어요. 직접 밴드 일을 많이 해 왔지만 어느 정도 도움 없이는 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기에 같이 일하게 되었지요. 사실 [앵콜요청금지]는 제가 개인적으로 만든 건데 제작자로서의 권리를 어느 정도 포기한 셈이에요. 지금 생각에는, 제작자로서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것 같아요. 그 수입으로 함께 정규 1집을 제작하게 되었는데, 결국 그게 문제가 되더라고요. 루오바는 일 처리는 깔끔하게 하는 곳이었지만 여러 가지로 잘 맞지 않았어요. 그쪽에서는 이 밴드를 통해 뭔가 만들고 싶은 부분이 있었던 것 같고, 그게 저희 밴드의 의사와 반하는 부분이 있었죠. 

[weiv]: 계피와 루오바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밴드의 의사와 반한' 부분을 조금 더 설명해 줄 수 있을까요? 
덕원: 그쪽[루오바]에서 바란 것과 저희가 하고 싶었던 게 달랐어요. 사실 그랬기 때문에 계피가 루오바에 남게 된 부분도 있었겠죠. 거기서는 '여성 싱어송라이터'를 원하니까 슬슬 밴드가 백 밴드처럼 취급당한다고 느꼈죠. 그런 상황에서 밴드와도 마찰이나 의견 차이가 많았어요. 멤버들이 모두 원하지 않던 "앵콜요청금지" 재녹음 수록을 하기도 했고, 그들이 원하는 점에 맞추면 곡이 한정되게 만들어지거든요. 브로콜리 너마저는 더 로킹한 밴드였구요. 사실 라이브에서 계피가 부르지 않는 곡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1집 녹음할 때도 제가 부르는 곡은 많이 뺐어요. 당시에는 같이 일하는 입장에서 양보해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결과적으로는 아쉬움으로 남아요. 

[weiv]: 계피가 나간 뒤 브로콜리 너마저는 4인조가 되었고, 그게 '스튜디오 브로콜리'의 실체가 되었다는 것이군요. 그 뒤 밴드로서 브로콜리 너마저의 작업방식은 어떻게 바뀌었나요? 다른 밴드와 비교해서 어떤 점이 특이하다고 할까요? 
덕원: 사실 처음부터 스타일에 대한 욕심도 없었고 정체성도 불분명했어요. 밴드 자체가 무(無) 레퍼런스의 밴드였어요. 왜냐하면 멤버들 거의 모두에게 첫 밴드였고, 저에게도 마찬가지였거든요. 그러다 보니 특정한 스타일에 대해 생각하기보다는, 일단 노래 자체를 만드는 데 집중하는 편이에요. 다른 밴드가 어떻게 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 뒤의 편곡 과정에 있어서도 노랫말과 멜로디만을 남겨 둔 상태로 합주를 하면서 최대한 각각의 멤버가 파트별로 작업을 해요. 물론 서로 어떤 부분이 좋다, 이렇게 하면 좋겠다 이야기를 하지만 기본적으로 노래에 가장 맞는 쪽으로 작업할 수 있는 것 같아요. 1집과 2집 양쪽에 있어 저희 방식이나 태도는 사실 별 차이가 없는데요, 1집 이후에 매일매일 작업에 몰두하며 경험이 늘다 보니 2집에서는 좀더 편곡적인 면에서 원하는 소리에 대한 그림도 비교적 명확해지고 원하는 것에 근접한 결과물을 낼 수 있었어요. 

[weiv]: 그러면 이제 브로콜리 너마저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네요. 영세한 규모였겠지만 나름 마케팅이나 프로모션의 계획이 있었던 건가요? 또 그 계획을 어떻게 실행했나요? 
덕원: 그런 계획은 있었죠. 곡을 만들 때부터 어떻게 전달될까를 고민했어요. '공개되는 순간 결정된다'는 생각을 하는 면이 있어서 곡을 만들 때부터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이죠. 노래 자체를 봤을 때 어느 정도 의식하고 만들어진 부분이 있고… 하지만 인위적인 것은 없었어요. '한 번 들으면 계속 입에서 흥얼거릴 수 있는 걸 만들자'고 생각했고, 그걸 '사람들이 어떻게 듣게 만들 것인가'를 생각했어요. 콘텐츠가 사람들한테 걸리는 부분을 만들어 주는 것에 신경을 많이 썼죠. 블로그 운영을 성실히 했고, 적절한 시점에 EP를 만들어서 노래를 던졌고…. 

[weiv]: 비교는 종종 서로에게 실례가 되지만, 브로콜리 너마저의 케이스를 장기하와 얼굴들의 케이스와 비교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덕원: 장기하와 얼굴들의 케이스는, [뭔가를] 할 수 있는 프레임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를 잘 타고 넘어간 케이스라고 생각해요. 인디 씬에서 퀄리티 있는 음반이 나와서 일단 이쪽 판에서 돌고, 콘텐츠가 인터넷 공간을 통해 확장이 되고, 그 뒤 어른들도 '아, 얘는 뭐다'라고 인정하는 단계를 거쳐 프레임이 잡혀지니까 그게 다시 매체를 통해 퍼지고 재생산이 되었던 거죠. 저희는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조금조금씩 채우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렇지만 노래가 퍼지는 과정이 기존 매체에 의해 사전에 계획된 건 아닌 것 같아요. 어떤 식으로 할 것인가, 어디에 어필할 것인가라는 부분에서 그 당시 할 수 있었던 최선이 있었고, 저희는 그걸 했던 것 같아요. 


4. 진심의 아티스트 덕원 vs 벤처 비즈니스맨 덕원 

[weiv]: 음반을 '팔리는 상품' 혹은 [깜악귀의 용어를 빌면] '파는 물건'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덕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가 저로서는 궁금합니다. 
덕원: 지금은 별 것 아니지만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레코드숍에 올린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거였잖아요. 기억에 남아요. 수공업 소형음반들이 숍(매장)에 올라가는 데 2년이 걸렸어요. 그 당시 수공업 소형음반은 돈 받고 파는 게 아니라는 의견이 있었는데, 저는 그 의견에 반대해서 2년만에 올라간 거죠. 소량이라도 공식적 시장에 올라갔다는 기록 자체가 남는 게 중요했어요. 1990년대 후반, 괜찮은 음반 중에 기록이 남지 않고 잊혀진 음반이 된 게 많은데, 2000년대 중반에 [온라인의] 기본 틀은 만들어졌으니 요즘은 남죠. 음악시장에 뛰어드는 게 보통은 완성도를 갖춘 음반을 만들고 회사를 통해서 진행하자는 의견이 많았는데, 저는 '그냥 던지자'라고 주장한 거죠. 수공업 소형음반이 매장에 올라간 것은 브로콜리 너마저 뒤부터예요. 그걸 일종의 '지식의 거래소'인 인터넷상에 올렸다는 게 중요했다고 생각해요. 음반을 하나의 상품으로서 기록되는 대상으로 남긴 것이고, 저희는 온라인이 발달한 것의 이점을 누렸던 첫 번째 사례가 아닌가 해요. 그 점에서 수공업 소형음반은 이전의 데모 음반과는 다른 거죠. 처음에는 향이나 퍼플 등의 매장에 들어갔고, 큰 매장에는 한참 뒤에 들어갔죠. 사실 큰 매장은 업체가 아니면 들어가기 힘들어요. 그쪽의 매뉴얼이 있으니까. 예전에 한 번은 CJ뮤직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청년실업의 음반을 내 보려고 했는데 그때만 해도 이런 점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는 상황이었죠. 그 뒤로는 음반들이 지속적으로 팔리고 있어요. 

[weiv]: 음원시장은 어떤가요? 특별히 어떤 곡들이 음원 시장에서 반응이 좋았던가요? 그리고 음원시장의 구조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이 많은데 이에 대한 덕원의 입장이나 앞으로의 구상이 있나요? 
덕원: 업계 동향에 관심이 많아서 모니터링을 많이 하는 편인데 "앵콜요청금지" 외에 "유자차"가 사랑받는 것 같고, 초기에는 CF에 삽입된 "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가, 그 뒤에는 "보편적인 노래"도 꽤 반응이 좋았어요. 음원시장의 경우는 장기적으로 음원 사이트를 만들 계획을 하고 있어요. 브로콜리 너마저로 시작해서 다른 밴드들의 음원을 서비스해주는 사이트를 만들려고 하고 있어요. 

[weiv]: 이제는 '벤처 사업가'의 면모도 보이네요! 
덕원: 친구들 가운데 벤처기업을 하는 경우가 있어서 기본적인 정보는 있어요. 얼마 전 음원 사이트를 만들려고 '소상공인 창업지원'을 했는데 역시 그쪽은 이런 것에 관심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 하지만 무슨 '지원'을 기대하지는 않는 게, 저희는 처음부터 지원 없이 가는 쪽으로 시작했어요. 지원을 받다 보면 이상해지잖아요. 그런 것만 따라다니게 되고, 그 기준에 맞춰 놓고 진행하게 되고…. 그건 아니죠. 음원 사이트 기획도 지원받는 거 없이도 할 수 있게 세팅해 놓고 지원해 보았는데, 그쪽은 역시 인터넷 서비스나 콘텐츠를 만드는 게 아니면 잘 지원해 주지 않더군요. 

[weiv]: 덕원의 말을 듣다 보면 브로콜리 너마저는 '인위적이지 않은 기획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공연의 경우도 그런 기획력이 발휘되었던 것 같은데…. 
덕원: 저희는 행사 이외에는 자체 기획 공연을 하려고 했어요. 작년[2009년]에 했던 '만원 공연'이 1년을 자체 기획으로 한 공연이었어요. 150석 규모의 클럽에서 1만원짜리 공연으로 시작해서 연말까지 했죠. 마지막에는 5만5천원에 600백석 규모의 브이홀(V-Hall)에서 했어요. 4월부터 평균 2주에 한 번씩 해서 연말까지 열 번 남짓 했던 것 같아요. 행사 이외에는 다 기획공연이었던 셈이죠. 처음 시작한다는 느낌으로 했거든요. 사실 클럽에서 너무 많은 밴드를 무대에 세우는 기획을 저희는 좋아하지 않았어요. 이건 클럽에게도 밴드에게도 좋지 않고, 경제적으로도 좋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붕가붕가 레코드도 초기에는 '떼 공연'을 많이 했는데, 후에는 '한 팀 한 팀을 부각시켜야 한다'는 방향으로 기조를 바꾸기 시작했어요. 저희 밴드는 단독으로 많이 했는데 그러다 보면 자기를 보여줘야 하니까 공연 외적인 것도 많이 생각하게 되죠. 

[weiv]: '방송 홍보'에 특별한 전략은 있었나요? 브로콜리 너마저는 라디오에서는 나름 사랑받고 있지만, TV와는 아직 거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덕원: 먼저 할 말은, 저희는 '상복'과는 거리가 멀다는 거예요. 'MBC 대학가요제' 등 콘테스트에 나가는 족족 '캐굴욕'을 당해서(웃음) 이제는 누가 선발해 주거나 선정되는 것들에는 아예 기대를 하지 않아요. 라디오의 경우는 아무래도 선곡하는 분의 취향을 많이 타는 곳이고 그 분들 가운데 저희 음악을 좋아하는 분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직접 뵌 적은 없으니 제가 알 수는 없죠. 우연히 '공개방송 나오겠느냐?'라고 물어서 가 보면 '음악 잘 듣고 있다. 좋아한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어서 감사하게 생각하는 정도지, 사전에 직접 만났다거나 그 뒤로 알고 지내는 사람은 없어요. 

[weiv]: 그런데 브로콜리 너마저의 음반 판매량 수준[업계의 정보에 의하면 '3만장'이라고 들었습니다]이라면 이미 청중의 규모가 '홍대앞에 오는 사람들'을 넘어선 것 같네요. 홍대앞 '외부'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아, 이런 사람들이 우리 음악을 들을 것이다'라는 이른바 '타겟 청중(target audience)'도 설정했나요? 
덕원: 그렇게 하는 건… 저는 별로라고 생각해요. 타겟을 잡는다는 건 밑천이 들어가야 하는 거잖아요? '잘 모르는 사람한테 편지 보내는 느낌'으로 곡을 쓰는 게 제일 좋은 것 같아요. 혹시 만들어 놓고 그 뒤에 운영하면서 생각하는 건 모르겠지만…. 다시 말하지만 제게는 기본적으로 '안에서 가라앉히고 앉혀서 자연스럽게 들리고 또 불릴 수 있는 것'을 노래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요즘은 사운드에 대한 욕심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래도 기본은 변하지 않았어요. 

[weiv]: 아, 제가 궁금한 점을 잘못 표현한 것 같군요. '브로콜리 너마저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라는 물음이었어요. '어떤 감성과 취향에 호소하고 있을까'라는 질문. 
덕원: 진심에 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성의 있게 하면 '아, 성의 있구나'라고 생각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해도 힘들 거예요. 성의를 다해서 하면 '어, 이런 것도 했네, 재미있구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죠. 결국 성의와 진심이죠. 예를 들면 요즘 [2010년 5월 현재] 월드컵 특수로 곡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는데, 성의와 진심은 의심스럽죠. 다른 예로, 공연 때 진짜 공을 많이 들였거든요. 디자이너가 멤버처럼 같이 작업했는데 사소한 디테일에 성의를 많이 들였어요. 공연 티켓을 보내주기도 했는데, 그런 것에도 사람들이 감동했다고 생각해요. 

[weiv]: 요즘 활동하는 밴드들 가운데 스타일은 저마다 다르지만 1980년대 이전의 한국 대중음악을 새로운 창작의 소재나 레퍼런스로 삼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이걸 '복고'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미학적 인식이 변한 것 같다는 인상을 줍니다. '외국의 첨단 트렌드의 추종'이 더 이상 대세가 아니라는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덕원: [제게는] '그냥 노래가 좋다'는 느낌을 주는 노래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중요해요. 사운드는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게 많지만, 좋은 노래는 예전에 좋은 노래가 많았잖아요. 사운드보다 노래에 치중될수록 과거의 느낌을 받게 되니까 그런 평가를 받기 쉽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제가 과거로부터 영향받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에요. 뭔가 안 풀리면 듣는 노래들이 있거든요. 윤상의 2집은 CD를 구해서 들었고 오태호의 솔로 음반은 아직도 테이프로 들어요. 그리고 김광진의 노래도 많이 듣죠. 그런데 막상 그런 연약한 감성을 담은 가사는 잘 안 써지더라구요. 조금 오그라들어서(웃음). 그것보다는 이음새가 없는 느낌이랄까, 노래가 이음새 없이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느낌을 좋아해요. 그 점에서 설운도의 "다함께 차차차"도 좋아해요(웃음). 

[weiv]: 2집 앨범이 어떨지 궁금하군요. 진실한 태도로 많은 정보를 준 인터뷰 고맙습니다. 



원본 출처 http://www.weiv.co.kr/review_view.html?code=album&num=2793

Posted by 木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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