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류인생

영화 2010. 11. 17. 23:46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1001&article_id=24455

정성일 인터뷰



허문영 부산영화제 한국영화 프로그래머가 <하류인생> 촬영 중인 임권택 감독을 만나다

“깡패도 정권도 자신이 3류임을 모르고 사는 비극 담는다”


몇 나절을 촬영장에 붙어 있는다 한들, 아니 설사 전 촬영 기간 동안을 따라다닌다 해도 <하류인생>이 어떤 모양새를 갖춘 영화일지 알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콘티북은 물론이요, 시나리오조차 존재하지 않는 이 영화를 상상하는 일은 불가능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대신 이 영화의 모든 장면 장면은 오직 한 사람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존재한다. 그 ‘절대자’는 두말할 나위 없이 임권택 감독이다. 곧, <하류인생>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선 임권택 감독을 만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결국, 누구 못지않게 임 감독의 새로운 영화를 고대하고 있는 허문영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프로그래머가 조바심을 참지 못하고 부천 오픈세트을 찾아 임권택 감독을 만났다. - 편집자

“비애로운 세월을 살았던 우리 이야기”

-우선, 아주 무식하게 여쭙겠습니다. <하류인생>은 한마디로 어떤 영화입니까.

=스스로가 인생에 때 묻어가고 황폐화되어가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의 얘기죠.

-주인공인 태웅이는 어떤 인물입니까.

=처음엔 깡패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순진하고 정의감도 있고, 이랬던 친구요. 그런데 점점 인생의 때가 묻어가죠.

-지난해 감독님 댁에서 뵜을 때, ‘<취화선> 다음 영화는 부담감을 벗어던지고, 좀 편한 마음으로 장르적인 요소가 강한 영화를 만들 생각은 없으십니까’라는 질문에, 감독님께선 ‘이번엔 또 다른 시도를 생각하고 있다’, 뭐 그런 뜻의 말씀을 하신 것 같은데요.

=그런 뜻이라기보다는…. 내가 찍고 있는 이게 액션물로 알려져 있어요. <장군의 아들>의 아류일 것이다, 라고. 그렇게 지레 짐작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유의 영화가 아닐 거라고 얘기한 거죠.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는 감독님이 <축제> 때부터 형식적인 실험을 여러 차례 시도하셨고, 굉장한 성과를 거두셨기 때문에, 사실 한번쯤은 <서편제>처럼 감성이 진한 영화를 구경하고 싶다는 기대가 있었거든요.

=이번 영화는 그런 면이 대단히 강할 거예요. 50년대 말에서부터 70년대를 거치는 시대가 하도 우여곡절이 많던 시대이다보니, 주인공도 도리없이 그런 시대에 알게 모르게 영향받지 않을 수 없겠죠. 그래서 시대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장면들도 나오는 것이 사실이요. 하지만 이번에는 우리가 삶 속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재미로움을 가지껏 끌어내서 찍어볼 생각이거든요. 요즈막의 영화들이 모두 과장되고 너무 픽션스럽고 한데, 나는 내 주변에서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일부, 심지어 내가 살았던 일부까지도 이 영화 안에 끼워넣고 있어요. 그런 삶을 잘 끌어내도 재미가 얼마든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그런 재미로도 흥행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해보고 싶어요. 욕심은 그런 거예요. 가능하면 재미있는 영화. 대신 허황된 꾸밈을 철저히 배제하고 실제로 산 사람들의 얘기를 배열해가면서 그 안에서 재미를 끌어내고자 하는 거죠.

-영화의 시대 배경이 4·19 무렵부터 70년대 초로 돼 있는데, 그게 의미심장해 보이거든요. 전쟁의 참화로부터 가까스로 벗어나 새로운 시대와 더 나은 삶을 향한 희망이 굉장히 강했고, 그만큼 좌절도 많았으며, 그만큼 파란만장했던 시대이기도 합니다. 감독님 개인사를 비춰보면 굉장히 힘들었던, 그리고 많은 자괴감을 느끼며 영화를 만들었던 시대인데, 배경을 그렇게 설정한 이유는 뭡니까.

=그때 나는 자괴감을 가지고 영화를 50여편이나, 아무 생각없이 만들었어요. 좋은 작품을 찍어봐야겠다는 꿈 같은 것도 전혀 없이. 영화를 찍어내는 기계처럼 살았다고 할까. 그냥 살기 위해서 영화를 생각없이 찍어냈던 시대. 그렇게 생각없이 산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찍고 싶은 거예요.

-그 시기는 감독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하실 무렵인데, 개인적으로 자기 인생을 개척해야 하는 시기에 깊은 자괴감을 느끼셨기 때문에….

=개척한다는 마음은 전혀 없었어요. 단지 살았던 거예요. 싸구려 개런티 받으면 술 마셔 다 써버리고, 다시 돈 생기면 또 마시고 하면서 그냥 살았던 시대거든요. 단지, 주제랄 것도 없는 그런 영화를 찍으면서 현장에서 열심히 살았던 것 같아. 그거 아니면 내가 살아갈 길이 없으니까. 내가 영화감독으로 살아가면서 체험했던 영화판도 <하류인생>에서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고 있거든요. 그때 영화판이란 게 참 코미디도 아니고 뭣도 아니게 이상스럽게 돌아갔는데, 그게 사람들이 얼핏 볼 때는 되게 웃기는구나, 할 거예요. 하지만 나로서는 그것이 얼마나 비애로운 세월이었는지를 담아내고 싶은 거죠. 또 이태원 사장이나 정일성 감독, 또 주변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체험을 영화 안에 도입하고 싶은 거예요.

-이태원 사장님 말씀이 나와서 그런데, 주인공을 깡패로 설정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오래전부터 이태원 사장의 삶이 재밌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게다가 그때 군사정권도 깡패 아니요. 개인도 깡패로 살고 있지만, 힘으로 정권을 장악해서 나라를 경영하는 방식도 깡패 같았던 시대란 말이야. 자유당 정권의 부패, 민주당 정권의 무능, 그리고 그것을 구실삼아서 군이라는 깡패들이 들어와서 나라를 경영하는데도 계속 거짓말해가면서 살아가는 시대였단 말이에요. 그런데도 그런 권력과 유착하며 살 수밖에 없는 시대를 살면서 이 깡패가 올바르게 살 생각을 하겠냐고요. 그런 가운데 인간성 자체가 황폐화된다는 것을 찍어보고 싶은 거죠. 그래서 우리가 인생을 맑게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은 거예요.

-이 영화 주인공, 그러니까 최태웅의 모델이 이태원 사장님이라는 얘기를 주변에서 많이 하던데요.

=아니요. 그때 그분의 에피소드가 하도 재미있는 게 있고 해서 그 생활의 일부를 인용한 거지. 이건 이태원 사장의 생을 다룬 영화가 아니죠.

-보도자료에는 최태웅이 깡패생활을 시작해 5·16을 맞을 때의 이야기 정도까지만 나오거든요. 이후 주인공은 어떻게 살게 됩니까.

=군인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깡패소탕을 하자 거기서 더 못해먹고 영화제작자로 살아요. 그 다음에 군납업자가 돼요. 입찰 가격을 담합해서 건설공사를 따내는. 그러다가 직접 정권과 유착이 돼서 직접 그 일에 나서면서 돈을 막 벌기도 하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불알을 잡고 사는 세월이요 그게. 자기가 뭘 열심히 생각하고 무엇을 창의적으로 해낸 세월이 아니라. 그런데 이젠 계속 공사를 따내지 않으면 회사가 망하는 거예요. 그동안 쓰려고 들여놓은 장비며 인원이며 유지하려다가 더 심한 유착에 빠지고…. 그러면서 인간이 아 저기까지 황폐해져갈 수 있구나, 그런 것을 그려가는 거요.

-주인공은 이 사회의 중심이거나 이방인이 아니라, 그냥 주변에 빌붙어서 먹고사는 사람인 셈이네요.

=그렇죠. 단지 누가 허우적대냐 하면, 마누라가. 마누라가 어떻게든지 태웅이를 좀 밝은 쪽으로 삶을 유도해보려고 해요. 마누라는 체질적으로 폭력을 좋아하는 이 남편을 거기로부터 건져내면 그걸로 될 줄 알았단 말이요. 처음에 볼 때 사람이 괜찮았으니까. 그런데 뒤에 보니까 오히려 처음에 깡패생활 때보다 훨씬 나빠졌다는 거요, 인간이. 그건 몰랐었죠. 그런 얘기요. 그건 본인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정권을 운영해간 사람들에게도 책임이 있는 거요.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대로 태웅이 같은 애들이 필요한 것이요. 정권을 끌어가자면 돈도 필요하고 하기 때문에 약속위반을 밥먹듯이 해버리고…. 그런 맑은 어떤 것을 지키면서 살아야겠다는 의식조차 할 여가가 없이 시대의 혼탁한 물에 이렇게 휩쓸려 사는 인간을 그리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오죽하면 타이틀을 <탁류>라고 지으려고 생각도 했을까. 채만식의 소설 때문에 바꿨지만….

-그렇다면 영화가 불가피하게 비극적인 정조를 띨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고 짐작이 되는데요.

=그럴 수밖에 없죠. 그러나 본인들은 그 삶 자체가 비극적이라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사는 거요. 물론 그게 비극적이라는 것을 관객은 알아차리게 해야죠.

-운명적인 비애, 이런 느낌이 들 것 같습니다.

=중이 되는 식으로 탈세속을 하지 않는 다음에야, 한 개인에게는 우선 산다는 게 소중하니까 그런 데 매달려서 가다보면 그 얼마나 큰 흙탕물 속에서 살 수밖에 없냐 하는 거죠. 그런데 본인 자체는 흙탕물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모른다는 얘기죠.


“더 사실 같은 격투를 아주 힘있는, 힘있는 영상으로”

-듣다보니 이야기 구성이 참 까다로울 것 같다는 예상이 됩니다.

=이게 자칫 잘못하면 우스운 삶을 살아간 사람들의 삶을 재미로만 좇아가 찍은 영화가 될 수 있어요. 그렇게 결과지어진다면 문제가 많은 거지. 주인공들은 흙탕물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흙탕물인지 모르고, 관객은 그것을 알아차리고 얘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그런 영화가 돼야 하는데.

-양식미에 좀더 노력을 기울였던 <취화선> <춘향뎐>에 비하면 다른 어려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어쨌건 <춘향뎐>은 이미 있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삼았고, <취화선>은 많은 부분이 새롭게 창조가 됐다고 하더라도 실존 인물이라는 틀이 있으니까 그 틀 안에서 만들면 됐을 것 같은데, 이번에는 이야기가 도대체 어떻게 짜여질지, 기승전결이 어떻게 될지 짐작이 안 돼서….

=이야기야 그렇게 살았던 체험담이 있으니까 별로 어려운 게 아닌데, 깡패만 하류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을 잡아간 정권도 다 같은 부류라는 것, 그러니까 여기는 3류들이 들어와 사는 세상이구나, 이렇게 알아차리게 하는 것이 중요하죠. 기품도 우러나게 하는 그런 영화를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이렇게 힘이 드는 거죠.

-혹시 결말을 미리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아직은 나도….

-못 정하셨군요.

=그러니까… 결말은 주인공이 아주 황폐한 인간이 돼버리는 것이죠. 정신적으로. 옛날 같으면 친구에 대한 의리도 있고 이랬던 친군데, 한 사업자로 살아가면서 배신을 밥먹듯이 하면서…. 그건 정권이 가는 것과 궤를 같이해서 가는 거죠. 그따위 짓을 하는 게.

-시대배경이 60년대니까 어쩔 수 없이 이념문제를 피해갈 수 없을 것 같은데요.

=그런데 이 사람은 이념이 있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가령 어느 정도냐면, 영화 제작자가 된 다음, 흥행 때문에 야한 장면을 집어넣었는데 검열에서 걷어내지자 차라리 반공영화를 찍을 걸 잘못했다는, 그런 말을 할 정도니까.

-그렇게 거꾸로 이념문제가 드러나게끔 하는 거네요.

=가령, 어떤 사람이 통행금지에 걸려서 파출소에 들어갔는데, 경찰이 혁명공약을 외우면 치안재판에 안 넘기고 내일 아침에 보내주겠다고 하니까 땀을 내고 외우고 있는, 그런 장면을 통해 전체적인 사회의 분위기를 심어가면서 가는 거죠.

-이야기가 70년대 초에서 멈추는 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10월유신에서 영화가 끝나요. 장면으로 보면 시대배경이 작게 나오고 있지만, 실제론 강하게 들어온다고. 가령 4·19랄지, 5·16이랄지…. 제작자는 복통 터질 거예요. 이야기하고 큰 관계도 없는데, 시대의 흐름을 왜 돈을 저렇게 처발라가면서 찍는지…. (웃음) 답답하고 할 테지만, 그게 없으면 그놈의 격조가 안 살아나는 거예요.

-궁금한 것 중 하나는, 분명 액션 장르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액션 요소는 많을 것 같은데요. 비중이 어느 정도 되는지요.

=초기에 주인공이 깡패생활할 때가 액션물이라 할 수 있죠. 뒤에는 액션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요. 단지 영화제작을 하든 군납사업을 하든 간에, 깡패 출신다운 기질이 매번 드러난다는 거죠.

-섣부른 짐작인지 모르겠는데, 어제 중부경찰서 앞에서 4·19 장면을 촬영하는 걸 보면서, 컷이 자주 나뉘는 다이내믹한 액션이 아니라 구도를 안정적으로 잡고 약간 느리게 진행되는 액션이 아닐까 하는 짐작을 했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그러나 뭐에 신경을 많이 쓰냐 하면은… 홍콩영화나 요즘의 액션물들이 너무 허황된 액션을 보여주잖아요. 그래서 여기선 어떻게 사실감을 주는 액션을 박력있게 찍어낼 것인지 하는 데 힘을 모으고 있어요.

-혹시 <장군의 아들> 때는 못했는데 이번에는 이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하시는 요소들이 있다면.

=더 사실 같은 격투인데, 그것을 아주 힘있는, 힘있는 영상으로 한번 해보려고 하는 거죠.

-사실 요즘 액션영화와 비교할 때 <장군의 아들>은 서정적인 아름다운 느낌이 들 정도로 아주 부드럽고 아름다운 액션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땐 낭만이라는 게 있었죠. 그런데 여기서는 액션이 아름다울 수는 없고. 단지 이번에는 사실감이라는 것 때문에 더 박진감 있을 거라는 생각은 있어요.

-이번에 오디션으로 조연들을 116명이나 뽑으셨다는데, <장군의 아들> 때 생각이 나셨겠습니다.

= 아, 옛날하고는 또 달라진 게 있더라고. <장군의 아들> 때는 연기학원에도 안 가본 놈이 전부 몰려온 거예요. 진짜 깡패도 오고. 그래서 한 3분의 1쯤 찍다가 내가 속으로 ‘야 이거, 큰일났네, 이런 개새끼들하고 내가…. 무슨 꼴을 당하려고 내가 얘들하고 이렇게 헤매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 (웃음) 그때는 연기고 지랄이고 그냥 덩치만 좋으면 썼는데, 무슨 배짱이었냐면, 액션영화니까 주인공부터 미세한 연기를 통제해서 액션 일변도로 갈 생각을 했단 말이에요. 그래도 새끼들이 하도 못해갖고…. (웃음) 그런데 이번에는 극단 학전에서 제대로 훈련된 배우들도 무진장 오고, 또 그런 것 아니더라도 무슨 경험있는 사람들이 많더라구. 시대가 그렇게 달라졌더라니까.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할아버지요. 여기서는 연기를 시켜도 모두 좀 어느 정도 돼 있으니까 안심스럽지.

“일상이 흥행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좀 애매한 질문이 될지도 모르겠는데, 많은 사람들이 감독님은 좀더 전통 드라마에 가까운 영화를 찍는다고 생각하지만, 제 생각에 감독님은 또 어떤 새로운 차원을 염두에 두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전통 드라마라면 기승전결도 있고, 뭔가 복선도 있고, 뭐 이렇게 해가지고 농밀하게 그 스토리를 만들잖아요. 그런데 내게는 그런 극적인 게 전혀 없어요. 툭, 어느 세월을 찍고, 또 툭, 어느 세월을 찍고 하는데, 그 ‘툭’ 속에서 전부 비약하고 있는 거죠. 세월만큼. 예전의 어떤 관계가 끝까지 극적으로 유지된다든가 그런 건 없어요. 그냥 편편이 끊어서 무슨 짓을 하고 살았다, 그것만 찍는 거요. 단지 큰 맥이 있다면, 어떤 시대를 살아가면서 저놈이 저렇게 변해가고 있구나, 하는 것을 짚어내는 거죠.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지난번<취화선>을 놓고 인터뷰할 때도 제가 그런 느낌을 말씀드린 것 같은데, 병풍화의 느낌 말이죠. 그러니까 각 신들이 독자성을 갖고 아름다운데, 그것들이 한데 모여 풍기는 전체적인 느낌이 중요한. 그러니까 이야기가 이어지는 게 아니라, 사건이 가는 게 아니라 각각의 요소들이 쌓인 전체적인 덩어리로 보이게 하는….

=그래서 자칫하면 지엽적인 게 재미없어 보일 수도 있기 때문에, 거기에 굉장히 신경을 모으고 있어요. 또 자칫하면 너무 드라이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신경을 쓰고 있어요. 가령, 주인공이 김추자의 <님은 먼 곳에>를 좋아해서 늘 이 음악을 듣는 거라든가. 신중현씨가 갖는 조금 몽환적이기도 한 그런 것을 받쳐냄으로써 드라이한 느낌을 부드럽게 해가는 거죠.

-신중현씨에게 음악을 맡기셨는데, 감독님 젊은 시절에 신중현씨 음악을 좋아하신 편이었습니까.

=아주 좋아했다기보다는…. 어쨌건 김추자 노래는 내가 하도 좋아했으니까.

-신중현씨의 그때 곡도 쓰시겠지만, 새로 주문도 하셨죠.

=그렇죠. 테마는 신중현씨가 작곡하겠죠.

-음악을 맡아달라고 부탁했을 때 신중현씨가 좋아하시던가요.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이도 나이들어서 활발한 활동을 못하고 있는데, 그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어찌 욕심이 없겠어요.

-감독님의 최근 10여편 정도는 완결된 시나리오를 갖고 크랭크인하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상세한 이야기만을 갖고 수정하고 새로 써나가고 하는 방식을 취하셨는데, 이렇게 얘기를 듣고 있으니 이번엔 그 작업이 좀더 힘들 것 같다는 느낌이 드네요.

=그런 느낌이에요. 이번에는 뭐인가 극적인 구성도 뭣도 아무것도 없잖아요. 때문에 편편이 당시 삶의 안에서 뭐인가 얘기를 끌어내서 그것을 충실히 찍고,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주고, 이렇게 되는 영화이기 때문에 굉장히 힘이 들어요. 그런데 저거는 돼 있어요. 시놉시스는 다 돼 있다니까요. 제작비도 어느 정도 들 것이라는 것이 큰 윤곽으로는 다 드러나고 있어요. 단지 삶을 어떻게, 그러니까 일상을 어떻게 드라마틱하게 찍을 것인가 하는 부분이, 현장에 와서까지 고민이…. 그렇다고 큰 틀이 달라지는 것은 없어요. 지엽적인 에피소드나 대사들이 달라지는 거지.

-오픈세트를 만든 주병도 미술감독은, 감독님이 화사하면서 슬픈 느낌의 톤을 주문하셨다고 하는데, 감독님 말씀을 들으니까 그 느낌이 어디서 나오는지 짐작이 갑니다. 그런데 촬영에 대해서는 이번에 다르게 생각해두신 원칙이나 방식 같은 게 있나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개판으로 살지만, 앵글 자체는 뭔가 비애스런 느낌으로 잡아내보자 하는데, 이게 도시가 되니까 힘들어. 전체적인 느낌, 등장인물들이 살아가는 모습에서 비애가 우러나도록 찍어야죠.

-도시를 배경으로 하니, <춘향전>이나 <취화선> 때처럼 정서를 한번에 보여주는 롱숏을 보여주는 게 어렵겠습니다.

=그러니까, 롱숏은 이미 틀린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가깝게 사람을 중심으로 잡으면서 어떻게 그런 맛을 배어나오게 할지 나도 고민이요.

-<취화선>에선 유장한 롱테이크가 굉장히 강렬했었는데, 생각해보면 <취화선>은 편집의 영화였다는 생각도 듭니다. 컷 수도 굉장히 많고. 그런데 감독님 얘기 듣고 있으면 그런 면에선 <하류인생>이 컷 수가 적고, 더 느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느리지는 않을 거에요. 커트나 신간의 비약이 더 심해지는 것은 있겠죠.

-이런 상상을 해보는데, 감독님께서 지금 생각하고 있는 영화의 모습이나 느낌과 완성된 영화와 많이 달라질 수도 있을까요.

=지금까지 그런 일은 없었던 것 같아. 전체적으로는 이런 빛깔이어야 하고, 또 크게는 이야기의 틀이 이렇고, 그런 것을 벗어난 일은 한번도 없었던 것 같아. 벗어나면요, 무슨 문제가 생기나 하면, 이야기가 달라져버려요. 시작하고 끝이. 그러면 내가 하고자 했던 어떤 주제나 이런 것들이 다 무너져가는데…. 그러니까 이 시퀀스에선 에피소드 뭐뭐가 들어가 있다, 이런 것은 나와 있다니까. 그런데 그 디테일이 짚이지 않는 거죠. 스탭들도 그래서 환장하는 거죠. 그래도 어떡해,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 현장에 와서까지 계속 모색하면서 해결되는 일들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 그래서 미치려고 하는 거예요.

-감독님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셔서 그 작업을 하셔야겠네요.

=일찍 일어났다고 특별히 되는 게 아니라니까요. 몸은 24시간을 돌아다녀도 속에서는 이렇게 암중모색하고 있는 거라구.

-사람들이 <하류인생>에 대해서 기대하는 바가 사람들마다 제각각이더라구요.

=<장군의 아들> 같은 영화가 될 줄 아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렇게 보는 사람부터 <취화선> 못지않게 품격있는 영화가 될 거라고 보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 여기서 그런 격조가 빠지면 진짜 삼류영화가 돼버려요.

-감독님 말씀을 들어보면, 그런 상반된 두 가지 기대를 동시에 끌어안고 가시려는 것 같은데 그걸 어떻게….

=그러니까…. 그게 될는지는 모르겠는데, 그것을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아주 절박한 생각을 갖고 있거든요. 만약에 그게 됐을 경우는 나는 어쨌거나 또 한 꺼풀 벗고 나가는 거예요. 이번에는 하여튼 영화가 우리 일상을 잘 들여다보면 삶을 이렇게 재미있게 끌어낼 수도 있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한번 입증해내고도 싶고, 그런 일상이 흥행도 좀 될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욕심이 너무 많은 놈인데, 그런 것을 해보이고 싶은 거야. 그런데 괜히 욕심만 잔뜩 부리다가 실제 영화는 우습지 않은, 그런 결과를 만날지 걱정이에요, 걱정.

-몇편째 계속 시작할 때 그런 말씀을 하시는데요. (웃음)

=매번 그런 것도 사실인데, 그것은 아주 솔직한 술회였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 어지간하면 자신있다고 해야지. 그런데 그 말을 할 수가 없다니까.

-담배를 요즘 들어 더 많이 피우신다고 하던데.

=무지 많이 피우죠. 하루 세갑.

-아침에 일어나면 가슴이 막히고 그러시죠.

=아 그럼요. 남들은 감독이란 자가 의자에 앉아 있고 그러니까 ‘저놈이 편할 것이다’ 하는데, 사실 편하기는 뭐가….

-지금까지 찍은 분량 중에는 가장 어려운 신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여기(세트장)서 하는 ‘다찌마와리’가 어렵다고. 몇번 얻어맞아도 다시 일어나고 하는 초인적인 사람들이 영화 안에 나오곤 하는데, 난 그런 것을 피하려고 하니까. 이 친구들이 열심히 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상당히 실감나는 다찌마와리를 얻어낸 것 같아.

-오랜만에 액션장면을 찍으니까 재미있지 않으세요.

=재미는…. 늙어가지고…. 젊었을 때나 하는 짓인데, 요런 것을 많이 느끼죠. (웃음)

-촬영은 언제쯤 끝나겠습니까.

=2월 정도…. 길어지면 3월 초에 끝나겠죠.

-그렇다면 다시 칸영화제와 마주칠 수밖에 없겠네요.

=아니, 영화 꼴이 돼야 될 텐데. 그쪽에서는 벌써 재촉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리 기대하는 감독이라도 영화 꼴을 봐야지….

-어쨌든 건강 조심하십시오. 저희는 영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나는 자신이 없어… 자신이. 이렇게 하고는 있지만…. (웃음)



하류인생


1957년에서 시작해 1972년에 끝나는 임권택 감독의 <하류인생>에는 그 추한 시간을 견뎌낸 인간의 아름다움이 없다. 물론 비극적 숭고함도 없다. 그것이 부족하다고 말해선 안된다. 이 영화는 그것과 멀어지는 과정을 드러내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1957년 주먹대장 고등학생으로 출발한 주인공 태웅(조승우)은 주먹과 협잡으로 청춘을 산다. 그의 직업은 깡패, 채무해결사, 영화 제작자, 건축업자로 바뀌지만 살면서 조금씩 타락한다. 그리고 타락한 모습으로 영화는 느닷없이 끝난다. 그 타락은 매우 점진적이고 적어도 한국사회에선 범상한 편이어서, 타락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게다가 주변 인물들은 “그래도 태웅은 의리가 있다”고 주문처럼 말해준다.

태웅은 그러나 한번도 자신의 생을 반성하지 않는다. 불의에 저항하는 장인과 처남을 두고 있으나 그들의 근심을 응시하지 않는다. 경찰의 실탄에 시위대가 죽어도 “저거 총소리 아냐”라는 말만 던지고 곧바로 생존 게임에 몰두한다. 역사적 격류는 오직 그의 생존본능과 충돌한다. 굴곡을 겪지만 태웅의 삶은 차츰 윤택해지고, 숭고한 감정의 순간은 끝내 등장하지 않는다. <하류인생>은 그래서 얼핏 임권택 영화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역사적 사건의 급류 속에서 익사하지 않은 것은 태웅과 그 가족의 물질적 안정과 ‘그래도 의리’다. ‘그래도 의리’는 동물적 생존 경쟁에 승리한 남자들이 뒤집어쓰는 인간의 가면일 뿐이다.

얼핏 임권택 영화가 아닌 것처럼‥
어떤 전작들보다 메마르다

점차 분명해지는 건 이 영화는 어떤 종류의 인간 탐구가 아니라는 점이다. <하류인생>의 주인공은 태웅이 아니라, 1957년부터 1972년까지의 시대 자체다. 주인공의 심리적 변화가 아니라 개인사에 개입하는 역사적 사건들이 극의 긴장과 시퀀스들 간의 연결고리를 만들어낸다. 여기서 역사적 시간은 축적되는 시간이 아니라, 짐승의 시간처럼 오로지 생존과 노쇠에 소비되는 시간이다. 에피소드들은 축적되면서 서사를 구성하지 않고, 시간 순으로 나열되면서 소모된다. <하류인생>의 역사적 사건들은 등장인물들을 비인칭화하고 동일화한다. 태웅은 주변인물을 닮아가고 주변인물은 태웅을 닮아간다. 그러면서 숭고함과 더욱 멀어진다.

<하류인생>은 임권택 감독 개인과 주변 인물들에게 기억된 개인사의 조합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들의 개별성을 비인칭화한 역사적 시간에 관한 영화다. 그것이 이 시대를 “그저 변방에서 소리소문 없이 이리저리 휩쓸려 살다가 내가 그만 죽고 말지”라는 심정으로 살아간 감독이 변명도 위안도 없이 자신의 어떤 시대를 응시하는 방식이다. 그 시간은 흔들어 깨울 수 없는 죽어버린 시간이다.

가장 놀라운 장면은 느닷없는 엔딩 뒤에 뜨는 자막이다. “태웅은 이후에도 몇 년을 더 그 일에 종사하다가 1975년에 전업했다. 그의 인생이 맑아지는 조짐이 보였다.” 엔딩으로부터 3년이 지난 1975년이 다중의 기억에 각인된 역사적 연도가 아닌 한 그 3년이란 시간은 그냥 텅 빈 시간이다. 그 시간이 지나고도 맑아진 게 아니라, 그럴 조짐이 보였을 뿐이다. 인간적 서사가 불가능했던 <하류인생>의 소모된 역사적 시간과 태웅이 맑아짐으로써 소생 가능한 인간의 시간 사이엔 3년이란 심연이 있다. 이 이상한 자막은 <하류인생>의 이야기가 그 내부에선 인간적 서사로의 출구가 없다는 사실을 되짚어 암시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자막 이전에 본 것은 어떤 이야기나 인물이 아니라, 서사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죽어버린 어떤 시간대의 형상인 것이다.

유일한 예외적 존재가 태웅의 아내 혜옥(김민선)이다. 다른 패거리에 쫓겨가는 태웅을 지켜보는 근심어린 시선으로, 첫 출산 때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화면을 채우는 혜옥은 또한 태웅과 탁한 질서에 대한 가장 예리한 논평가다. 권력의 개들로부터 임신한 배를 구타당해 피 흘리면서도 끝내 태웅을 품는 마지막 장면은 타락한 남성적 질서가, 실패한 인간적 서사가 모성 혹은 여성성으로부터 잉태될 것임을 암시한다. 자막과 함께 떠오르는 가족사진에는 그 피흘림 뒤에 태어난 딸이, 태웅이 아들이기를 바란 자리에 서서, 환하게 웃고 있다. 어떤 전작들보다 전위적이고 메마르고 신랄한 <하류인생>은 임권택의 새로운 연작들의 첫장처럼 보인다.

허문영/영화평론가 

Posted by 木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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