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 정성일

영화 2010. 4. 11.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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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정성일


무엇보다 <예언자>를 보다가 종종 길을 잃는 기분이 드는 것은 두개의 다른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을 때다.처음에는 내가 영화를 놓쳤다고 생각했는데 중간 중간에 자막이 떠오른 다음 자크 오디아르가 우리를 조롱하듯이 따돌린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는 <예언자>의 이야기를 정교하게 구조적으로 맞추지 않았다. 말리크 엘 제베나를 시종일관 따라가기는 하지만그는 관심을 이리저리 돌린다. 이때 그러한 곡선이나 인물의 편중, 이따금 상승하는 힘의 순간을 내버려두거나 무참하게 추락하여처박힐 때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등장인물들은 영화적으로 이루어졌다기보다 시나리오 자체를 느슨하게 내버려두었기 때문이다. 이유는간단하다. <예언자>에서 자크 오디아르는 고전적 의미에서 연출자에 머물고 싶어 한다. 나는 이 이상한 이야기의 방식때문에 끝까지 자막을 보았다. (자막에 따르면) 이 영화의 원래 아이디어는 압델 라우프 다프리의 것이며, 그런 다음 시나리오를압델 라우프와 니콜라 푀파이리가 썼다. 자크 오디아르는 그 시나리오를 토마 빌드갱과 다시 각색했다. 말하자면 각색 작업에 원작시나리오작가들을 참여시키지 않았다. 물론 나는 원작 시나리오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두개의 시나리오가 한 영화에서 공존하고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물과 상황은 번번이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으며, 자크 오디아르는 그것을 하나의 스타일로 만들었다.불균질, 불연속, 사건들 안의 우물거림, 종종 거기 보이지 않는 텍스트들이 있다는 인상, 침묵에 가까운 수다들. 나는<예언자>가 새로운 영화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새로운 방법이라는 데는 동의한다.


이 영화가 말리크 엘 제베나에 대한 탐구처럼 보이는 것은 자크 오디아르가 진지하게 이 인물의 변화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그 카메라의 스타일에서 오는 착시효과이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인물과 카메라 사이의 부등가교환이 있다. 인물은 주어야 할 것이없는데 카메라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것을 착취하기 시작한다. 이때 점증하는 인물의 소외가 신기하게도 말리크 엘 제베나의 고립을강조한다. 자기의 몸으로 실천하는 연기. 상처가 보증하는 고통. 그때 주어진 몸보다 더 많은 것을 희생하는 배우는 인물을 위한재료처럼 잡아먹히기 시작한다. 자크 오디아르는 카메라 앞에 던져진 육신을 온통 남의 이야기를 채우는 데 ‘써먹기’ 시작한다.사실상 내내 고통받고 있는 말리크 엘 제베나의 내면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은 그에게 보아야 할 내면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텅 빈기호가 되어버린 인물. 뼈와 고기에 가까운 육신. 채워넣어야 할 책장. 그의 스승들. 이때 카메라의 관찰은 어쩌면 인물의 탐구와겹칠지 모른다. 그러나 관찰과 탐구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인물이 아니라 상황이며, 그 상황에 던져진인물의 행동이며, 그 행동의 동선이 이 영화의 이야기이다. 자크 오디아르는 영화를 진행하면서 차례로 그의 내면을 채워나가기시작한다.


물론 이 영화는 시련을 통해서 성장하는 영웅의 이야기이다. 주인공에게 부여하는 어려운 과제, 차례로 난관을 넘어가는 고비들.마치 계단과도 같은 신분의 상승. 불행과 그 불행에 대한 반응. 신비한 도움. 마술적 해결. 새로운 동료들. 증여자들과원조자들. 모티브로서의 적들. 그리고 왕좌즉위. 이것은 자크 오디아르에게 새로운 줄거리가 아니다. 그는 줄기차게 이상한 상황에놓인 영웅을 다루어왔다. 그러나 그것은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영웅 서사이다. 그것은 상승이 아니라 추락이다. 말리크 엘 제베나는권력을 움켜쥘수록 점점 더 교활해지고 있으며, 돈을 모을수록 점점 더 탐욕스러워지며, 자기의 정체성을 찾아가기 위해서 배신을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마침내 그것을 얻었을 때 사실상 그는 거의 괴물에 가까워진다. 말하자면 말리크 엘 제베나는 (인간의 얼굴을한) 동물에서 시작해서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 된 다음 감옥에서 나간다. 그것이 감옥의 교육이며, 범죄의 학교로부터의배움이다. 이때 자크 오디아르가 <예언자>를 만들면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프랑스영화의 세리 누아르가 아니라할리우드 갱스터영화의 고전주의(속의 비극적인 영웅 주인공들)에로의 복귀이다.


자크 오디아르가 가장 성공적으로 해낸 것은 서로 전혀 다른 국면의 코드들과 기호로 이루어진 이 모든 모순과 갈등의 층위들 사이에놓인 다양성 사이의 적대와 불가능성을 하나로 상징화하는 데 스스로 실패한 상태로 남겨놓아야 한다는 시도이다.


<예언자>는 손으로 들고 찍은 카메라로 시작하였다. 물론 이 마지막 장면도 들고 찍었다. 그러나 마치 세워놓은 것처럼그 자리에 멈춰 선 카메라. 이때 다큐멘터리처럼 시작한 이 영화는 전형적인 장르영화로 끝난다. 카메라도 마치 장르의 약속에순종한다는 것처럼 얌전하게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다.


다만 나는 이 마지막 장면에서 기묘한 색분해를 본다. 검은색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흰색으로 이루어진 화면. 하얀색 기둥 사이에 인상적인 붉은 색. 자밀라의 청바지. 하얀색과 붉은색과 파란색. 평등과 박애와 자유. 프랑스의 국기.

나는 말리크 엘 제베나가 텅 빈 기호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환기하고 싶다. 그런 다음 자크 오디아르는 그 기호 안을 서로다른 암호와 징후들, 명백한 신호, 문서와도 같은 계열, 증명사진과도 같은 담론들, 서로 다른 수준의 영화적 약속들을뒤죽박죽으로 뒤섞어놓았다. 그 안에 고유한 세계란 없다. 전도된 세계화. 말리크 엘 제베나는 누구인가? 여전히 알 수 없다. 그불투명성. 그 대신 프랑스라는 나라가 그 안에 함축되어 있다. 프랑스 시민. 이제 막 스물다섯살이 된 남자. 한눈으로 보아도아랍계 이민. 혼자 있을 때조차 언제나 이미 거기에 있는 신호. 프랑스의 운명을 말하는 그저 또 하나의 예언자의 예언. 그예언들이 모여서 21세기 프랑스가 될 것이다. 이미 우리의 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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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어스 맨-


Posted by 木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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