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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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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2
좋지 아니한가, 싸이보그, 오아시스, 길소뜸, 오차즈케의 맛, 괴물, 다세포 소녀,

원칙이 하나 있다. 내가 군대에서 맹세한 건데,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하루에 한 페이지 이상은 반드시 읽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하고의 약속이다. 두 번째 약속은 아무리 짧은 문장이라도 하루에 한 가지 이상 글을 쓴다는 것이다. 때로는 단상일 수도 있고 때로는 긴 글일 수도 있다. 세 번째는 아무리 바빠도 일주일에 세편이상 영화를 본다는 것이다. 집에서 DVD를 보든 시네마테크에 가든. 그것이 내가 스물두 살 이후 지키고 있는 나와의 약속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시네필이어서 영화만 계속 보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다 보면 사람이 바보가 된다.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면 말이다. 반면 글을 안 쓰고 책만 계속 읽는 사람은 머리가 잡다해지는 것 같다. 나는 영화를 보는 것과 책을 읽는 것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글을 쓴다는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중재하는 것, 내가 표류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현재의 사고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을 때, 그 배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한다. 내가 명석하다면 그 답을 혼자 생각했겠지만 그 정도 지혜는 가지고 있지 못하니 자꾸 다른 사람 견해를 구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동시대의 철학자와 미학자, 소설가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접속을 하는 거다. 정윤철 감독도 고전영화만 보지는 않을 것이다. 동시대를 사고하기 위해 현대영화도 보고 동시대 철학책도 읽지 않나. 그렇게 하는 까닭은 이 시대에 살아가기 위한 좌표를 얻기 위함이다. 칸트와 헤겔과 스피노자는 위대하다. 그러나 그들을 읽으면서 2007년 남한에 살고 있는 사람이 좌표를 얻기란 쉽지 않다.

아도르노를 인용하고 싶다. 자본주의는 지식을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지식을 간단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점점 사고를 마비시키고 논리 자체를 무시한다. 결정적으로 말하자면 철학은 점점 광고 카피가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아도르노는 내 글을 읽는 것은 사유하는 시간이라고 했다.

 나는 내 글을 읽고 생각하는 시간을 만들어내고 싶다. 당신이 인터넷 별점을 이야기했지만, 나는 별점을 굉장히 경멸한다. 그 별점은 영화가 아니라 그 자신에게 고스란히 돌아온다. 어떤 영화에 별 두개를 매기는 순간, 그가 영화를 보는 수준도 별 두개가 된다는 뜻이다. 지금 영화는 너무 쉽게 소비되고 있는데, 나는 영화를 잠시 멈추어 세우고, 영화를 본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럴 때에만 비로소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의미와 해석의 공간, 창조의 시간에 대한 성찰, 세상에 대한 반성 등을 획득할 수 있다.

정윤철: 그런 면에서 이야기를 이어보자면 어떤 영화를 보아야하는가라는 문제에 도달하게 된다. 예전에 당신이 <TTL>에 썼던 글을 읽었다. 주인 같은 노예가 있다, 자신이 주인이라고 착각한 그 노예는 언제까지나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이런 논의로 내용을 이어나가며 진짜 영화와 가짜 영화를 언급했다. 좀 더 설명을 해줄 수 있는가.


이렇게 대답을 하겠다. 대중으로서 영화를 보는 단계를 지나 내가 자의식을 가지고 영화를 보게 되면, 영화를 보는 여러 가지 태도가 생겨난다. 예를 들면 스피노자적인 태도와 플라톤적인 태도가 있다. 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니체적인 영화보기가 가능하지 않나, 하는 것이었다. 니체가 세상을 대하듯 말이다. 영화라는 것은 세상을, 잠재적인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영화라는 것은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액추얼한 세계로 놓고, 가능한 세계를 찍는다. 이 가능한 세계에 대해 내 자의식으로 어떤 질문을 던질 것인가. 내가 이 화두를 던진 이유는 많은 비평가와 진지한 이들이 영화에 대해 질문을 던질 때 데카르트적으로 사고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영화를 볼 때 니체적인 영화보기를 통해서 자기가 영화를 보는 행위에 의문을 던져보고, 그 영화에 붙들린 노예의식이라는 것으로부터 뛰쳐나오고, 거기에 대해 비판하고 주체를 되찾는 것도 가능하지 않나 싶다. 그럴 때 비로소 니체가 말하는 진짜와 가짜가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 가짜는 부정적인 의미의 가짜는 아니고, 가능성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영화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숏과 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숏과 신은 결국은 다 떨어져나가는 단위들이라는 거다. 그러므로 숏을 신으로 연결하는 논리가 필요한데, 이 논리가 이야기다. 영화비평이 이야기를 물어본다면, 그 질문은 정확하게 이야기를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이 영화의 논리가 무엇인지 묻는 거다. 숏이 어떤 방식으로 붙어있는가, 붙어있는 이야기를 연출자가 어떻게 쪼개고 있는가, 이 이야기는 왜 쪼개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가, 두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장면을 투숏으로 찍었는가 혹은 숏 리버스 숏으로 찍었는가, 하는 것들을 묻는 거다.


정성일: 전혀 다른 문제다.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영화가 다른 예술에 비해 세상에 너무 가까이 다가와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베토벤의 현악사중주를 분석하면서 창작 과정을 분석할 수도 있겠지만, 악보를 분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현악사중주에서 도와 미 사이에 이데올로기는 없다. 레와 솔 사이에 어떤 이데올로기적인 차이가 있는지 묻는다면 답은 끝내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좋지 아니한가>의 가족은 등장하는 바로 그 순간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왜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중산층인가라고. 혹은 <가족의 탄생>을 보면 왜 김태용 감독은 가난한, 거의 부서져가는 가족을 다루는가를 묻게 된다. 말하자면 영화는 이미지 자체만으로도 너무 세상 안으로 들어와 있다. 어떤 영화가 한 여자를 찍었다. 그 여자가 명품인 프라다나 에르메스 가방을 들었는가 짝퉁을 들었는가는 이미 메시지를 주고 있다. 에르메스는 이미지라고 아무리 주장하고 싶어도 그 가방은 에르메스라는 기호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함의를 영화에 끌어들일 수밖에 없다. 그런 영화가 활동을 시작할 때 우리가 심미적으로만 질문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레와 솔을 물어보듯, 도와 미를 물어보듯, 미학적인 방향으로 완전히 철수할 때, 이 영화는 굉장히 빈곤해지고 앙상해진다. 그 영화를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거의 닿을 듯이 가 있는 세상을 향해 던지고 있는 수많은 질문과 기호와 모순과 현실이다. 부글부글 폭발하듯이 끓고 있는 이것들을 차가운 비커에 담는 것이 가능하겠나. 그런 점에서 우리가 한 편의 영화를 끌어안기 위해 세상의 지식을 함께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왜? 세상을 찍고 있으니까. 나는 정신분석학이건, 사회학이나 경제학이나 정치학이건, 분과별로 보기보다는 세상의 지식으로 보고 싶다. 지식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니까. 그러므로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선 세상의 지식이 필요하다.

그것은 세상에서 내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영화는 그자체로 하나의 가능세계라고 생각한다. 그 가능한 세계라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 살고 있는 현행적 세계에 닿아 있다.

그러므로 영화를 통해 우리는 현행적 세계를 반성적으로 성찰하게 된다. 질문을 던지고, 우리에겐 무엇이 문제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니까 현행적 세계에 살고 있는 비평가들이 가능세계를 만든 영화를 보고 세상의 의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영화로만 봐달라고 한다면 가능세계는 현행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와 불가능 세계가 된다. 우리가 할리웃 영화를 보며 후진 영화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런 거다.

차이 밍량이 서울에 왔을 때 누군가 질문했다.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의 차이는 무엇인지. 차이 밍량은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나쁜 영화는 지구의 종말을 걱정하는 영화고 좋은 영화는 나의 내일을 걱정하는 영화다. 나는 거기에 진리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정윤철: 영화가 재미있고 분석하고 싶어지는 이유는 영화만이 갖고 있는 상호텍스트성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만, 그 이야기에 세상이 담겨 있다. 정치와 경제, 문화, 이데올로기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게 읽혀지지 않는 영화를 보면 어떤가,

정성일: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는 아무런 정치적 메시지도 담고 있지 않다. 거대담론도 없고, 평범한 이야기일 뿐이다, 딸을 시집보내는 게 전부인데도 그 영화는 진행이 너무 기괴해서 영화를 보는 내내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예를 들면 얼마 전에 <오차즈케의 맛>을 보면서 망연자실했다. 그 영화는 오즈의 다른 영화들처럼 진행되다가 마지막에 영화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타이틀이 올라올 줄 알았다. 남편은 여행을 떠나러 공항에 갔고 아내는 문제가 해결이 됐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오즈의 영화에 언제나 나오는 방식으로 텅 빈 방들이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밤중에 귀신처럼 남편이 돌아온 거다. 이 사람이 미쳤나, 여기서 더 이상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 생각하는데, 남편이 비행기가 고장이 나서 떠나지 못했다고 말하는 거다. 언제나처럼 무뚝뚝하게. 그러다가 밥을 좀 먹자고 그런다. 그 집은 언제나 식모가 밥을 했는데 한밤중이니까 집에 간 거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아내가 남편을 위해 밥을 한다. 오차즈케를. 오차즈케는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다. 남편은 자수성가를 했지만, 아내는 부유한 사람이어서 오차즈케를 촌스럽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반찬이 오차즈케 뿐이었다. 부부가 저녁 식탁에 앉았는데, 이건 절대 나누지 못할 거야, 나누는 순간 이야기가 진행이 안 되니까,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즈는 그 장면을 나누었다. 그 순간 오즈는 왜 그 장면을 쪼갰는가. 그는 감독으로서 결단하듯 내리친 거였다. 쪼개는 순간 이 구도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참을 생각하다 집에 가는 길에 문득 그 결단의 위대함이 느껴졌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면 그 장면은 고정된 카메라로 롱테이크를 찍는 것이 맞았다. 그렇게 찍어서 두 사람의 감정을 자르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오즈가 그걸 자르고 진행한 것은, 투샷으로 찍어서 시간이 진행되는 걸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 거다. 관객은 그 장면을 이미 투샷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다음 장면에서 남편은 친구를 만나 여행갔다온 이야기를 한다. 전날 밤 남편이 돌아온 것이 아내의 꿈이었는지, 남편이 진짜 집에서 밥을 먹고 여행을 떠난 건지,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이순간은 영화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 중의 하나다. 숏을 쪼개는가 마는가, 진행을 하는가 마는가, 마음을 나눌 것인가 이을 것인가의 결단. 오즈는 나에게 이 배움을 줬다. 영화는 세상이지만 쇼트는 그자체로 우주다. 그래서 쇼트는 항상 영화보다 크다는 생각을 한다. 왜? 영화는 세상을 쫓지만 쇼트는 잡는 순간 완결된 우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쇼트를 쪼개는 건 우주를 자를 것인가 말 것인가를 질문하는 거다. 그것은 브레송에게도 르노아르에게도 히치콕에게도 당연히 묻게 되는 질문이다.

그것이 아무리 미학적인 것이더라도. 나는 미학적인 결정보다 상위에 있는 결정은 윤리라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윤리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하다. 그것은 도덕과는 다르다. 나는 윤리적 판단을 내려야 한다면 미학은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미학은 별로 대단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미학에 매달릴수록 영화는 빈곤해지고 퇴폐적이 될 뿐만 아니라 몰락한다. 미학의 절정에 도달한 순간 모든 예술은 타락을 경험했지 않았나.

정윤철: 발터 벤야민이 한 말이 생각난다. 정치적인 것을 미학적으로 다루는 것은 파시즘이고 미학적인 것을 정치적으로 다루는 것은 자본주의라고.

정성일: 그 문장을 김우창 번역으로 스무 살에 읽었다. 이후 모든 판단에서 하나의 좌표가 되었던 말 중의 하나다.

창조를 다룰 때는 미학과 정치, 혹은 삶과 사회, 혹은 과거와 미래 말하자면 지나간 시간과 도래해야하는 시간, 그 둘 사이의 중재의 문제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술가의 임무 중의 하나는 창조적 중재에 있지 않을까. 오직 예술가들만이 창조적 중재에 나선다. 정치가들은 협상을 하고, 장사꾼들은 판매할 뿐이다.

정윤철: 나는 영화가 100년밖에 되지 않은 예술이므로 다른 예술과 비교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중에서도 미술과 비교해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처음 인상파가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왜 이따위 그림을 그렸느냐고 욕을 했다. 그런데 인상파가 자리를 잡게 된 이유는 그전 그림은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데 비해, 그러니까 예수의 승천이나 왕의 대관식이나 그리스 신화 등을 그렸던데 비해, 인상파는 그릴 필요가 없다고 여겨졌던 것들을 그렸기 때문이었다. 해바라기나 해지는 인상이나 나무들을. 인상파 회화들은 캐릭터 자체가 가지고 있는 생명의 에너지와 아름다움을 느낌과 인상으로 받았고 감정을 그리기 시작한 거다. 나는 거기서 모던 회화가 시작됐고, 세잔이 나오고 입체파로 넘어오고, 미술이 인간의 내면으로까지 들어갔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어떤 이야기를 담으려고 시작됐던 영화는 그 다음부터는 뭘 그릴 것인가를 생각해야만 한다. 이야기는 약하더라도 캐릭터와 사람을 다룰 때, 그것이 모던한 영화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위 말하는 플롯 위주의 영화가 아닌 캐릭터 위주의 영화, 더 나아가 인간의 내면으로까지 뛰어드는 영화가 모던한 영화라는 생각이다. 인간의 내면으로 뛰어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인간의 내면에는 시공간의 개념이 없고, 기억이라는 것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없지 않은가. 그런 것들을 이미지로 다루는 영화가 모던한 영화가 아닐까.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같은 영화를 보면 사람의 마음속의 기억과 감정들을 다루고 있는데, 그것이 모던 영화의 시작을 대표한다고 본다. 이야기 자체는 약하지만 인간의 감정이 드러나고 캐릭터가 드러나는 영화들, 그러니까 홍상수나 로베르 브레송처럼, 대충 찍은 것 같아도 인간의 캐릭터가 매우 또렷이 보이는 영화들 말이다. 어떤 거대한 이야기가 아닌, 인간의 기억과 시간을 다루는 영화들, 인간 그 자체에 대해 다루는 영화들이 모던한 영화가 아닐까.

정성일: 회화의 결론 중의 하나가 인상주의에서 나왔다. 그래서 대상을 그리는 대신에 대상과 그림 사이에 있는 공기를 가지고 오고 싶어 한거다. 공기를 그릴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다. 공기에 떨어지는 빛의 스펙트럼을 그리는 것뿐이다. 문제는 거기서 한걸음 나가는 순간 형상이 부서진다는 것이다. 그다음에 등장하는 인물은, 그러니까 세잔 다음으로 도착하는 인물은, 피카소와 뒤샹과 베이컨이다. 그렇게 형상이 부서지기 시작하다보면 그다음부터 세상은 정확하게 몬드리안의 그림이 된다. 선과 면만 남는 거다. 영화는 시간이라는 것을 다루어 왔는데, 시간이라는 뇌의 스크린을 다루는 영화들은, 끝났다는 느낌이 든다. 그것이 끝나갈 때, 뇌의 스크린이 환상의 구조라고 말할 때, 세상은 뭐가 되겠느냐는 것이다. 그때 세상은 표면이 된다. 완전한 표면만 보인다. 나는 영화가 음악에 비해 유치한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음악이 인간의 정신을 최대한도로 끌어올리는 예술이라면 한없이 내려온 밑바닥에는 영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어떻게 해서든지 세상을 다루고자,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찍었다. 사건이란 사실상 이야기고, 이야기가 되어지지 않는다면, 의미가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화의 역사란 사실상 어떻게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매치 컷과 인비저블 커팅과 더블액션을 비롯한 수많은 방법들도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기술이었다. 그런데 영화는 어느 순간 그것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영화는 시간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액션을 포기했고, 그것은 사건을 포기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시간으로 넘어갔지만, 영화가 시간을 포기할 때 그리하여 영화가 세상의 표면만 찍을 때, 그것은 힘을 잃어버렸다. 음악도 회화도 문학도 마찬가지다. 즉 이야기가 없는 영화들을 가지고 관객을 효과적으로 설득한다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키아로스타미의 <테이크 5>는 50분 동안 다섯 개 쇼트로만 이루어져있다. 첫번째 쇼트는 길을 보여주고, 두 번째는 들판을 보여주고, 마지막 쇼트는 바다에 파도가 들어오는 장면을 보여준다. 세상의 표면을 보여주면서 세상을 다루는 것이다. 거기엔 시간도 없고 오직 세상의 표면이라는 것만 있다. 키아로스타미는 그것이 영화가 갈 마지막 길이라고 믿는 거다. 몬테이로가 찍은 <백설공주>는 대사는 들리지만 계속 검은 화면만 보인다. 그리고 가끔 하늘을 한번 보여준다. 그러니까 세상은 두 가지라는 거다. 하늘과 암흑으로 가득한 세상. 그 영화가 미학적으로 멀리 나간 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가야만 하는지 질문할 필요는 있다. 문제는 만드는 사람도 비평도 그것이 극영화라고 믿는다는 사실이다. 예전에는 실험영화와 극영화가 있었지만, 나는 오늘날 남은 실험영화는 하나뿐인 것 같다. 현대의 실험영화는 광고다. 나머지는 다 그냥 영화라는 생각을 하는 거다.

정성일: 내가 보는 현대적인 영화는 피로를 찍은 영화다. 말하자면 보들레르가 말한 근대를 살아가는 피로, 근대의 속도로 살아가는 피로 말이다. 나는 영화가 그것을 다룰 때 모던한 것을 다룬다고 생각한다. 고다르와 레네와 허우 샤오시엔과 린치를 볼 때, 모던한 것을 살아가는 피로가 보인다. 피로의 감정, 피로의 인상, 피로의 감각이.

정성일: 그것은 영화가 주는 인상, 감각의 피로함이지, 조폭으로 사는 것의 피로함은 아니다(웃음). 거기에 현대영화의 핵심이 있지 않나 싶다. 왕가위의 영화를 보면 피로하지 않은가. 지아 장커의 <소무> <임소요> <세계>에서도 중국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속도로 살아가는 것의 피로함이 보인다. 심지어 그 무게가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다.

정성일: 정확하게는 윤리적이고 미학적이고 정치적인 질문을 견딜 수 있는 결말을 좋아한다.

정윤철: 무식한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정치와 윤리와 미학에 순위를 매긴다면.

정성일: 윤리가 가장 먼저다. 정치적이고 미학적인 것은 영화에 따라 위치가 뒤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

코미디를 만들 때는 풍자의 관대함과 풍자의 날카로움이 있다.

거기에 정치적인 의도가 없다고 해도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효과마저 비정치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말하자면 이펙트를 따지자는 거다. 의도가 무엇인지는 의미가 없다. 의도를 묻는 것은 예술을 창백하게 만들 수 있다. 의도는 자유라고 생각하지만, 그 의도가 가져오는 이펙트에 대해선 물어야한다고 믿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보수적이라고 그의 영화까지 보수적이라고 하지 않지 않는가.

정윤철: 당신은 <키노>에 구로사와 아키라의 <스바키 산주로>에 나온 대사를 인용한 적이 있다. 바보 자식들, 이제부터 너희들의 시대인 거야, 너희들이 어른이라구. 그렇다면 평론을 하는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는가, 이제부터 너희들의 시대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가.

정성일: 영화평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테오 앙겔로풀로스가 부산영화제 마스터클래스에 와서 했던 말이다. 그는 프랑스 영화학교인 이덱에 다니다가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 이수하지 않으면 학교를 떠나야하는 필수과목이 있었다. 쇼트 나누기였는데, 앙겔로풀로스는 고전적인 편집방식이 너무 싫어서 선생이 요구하는 방식과 다르게 콘티를 짰다. 그러자 선생이 말했다. 앙겔로풀로스, 당신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고 있다, 당신의 천재성은 그리스에서나 발휘하고 지금은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하든지 학교를 나가라. 앙겔로풀로스는 밤새도록 고민하며 물었다고 한다. 나는 영화를 원하는가 그리고 영화는 나를 원하는가. 나도 묻고 싶다. 내가 글쓰기를 원하는가 그리고 글쓰기도 나를 원하는가. 어떤 영화는 글쓰기를 요구하지만 어떤 영화는 감흥이 없다. 완성도를 떠나 아무런 화학작용이 없는데도 글을 쓰는 건 자신과 영화 모두를 망가뜨리는 거고 쥐어짜는 거다.

윤종빈 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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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木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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