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은의 죽음에 잇따르는 문화예술계, 영화계 관련 논쟁
나는 최고은의 선생이었다.
이 첫 문장을 쓰기가 힘이 들었다. 지금도 그렇다. 고은이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지난 설이었다. 고은이와 함께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이 내게 이메일로 부음을 알려왔다. 그들은 비통해하고 있었다. 누구도 내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이메일에서 나는 애써 감춘 비난의 뉘앙스를 읽었다. ‘고은이가 그렇게 될 때까지 선생님은 뭘 하셨나요?’ 또한 자책의 마음을 동시에 읽었다. 함께 수업을 듣고 영화를 만들고 밥을 먹었던 그들로서는 그런 비참한 죽음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내 컴퓨터에는 고은이가 쓴 글들이 들어있다. 부음을 들은 날 밤에 나는 그녀가 과제로 낸 글들을 찾아 다시 읽었다. 맥락이 달라져서일까. 모든 게 달라보였다. 글 속에서 고은이는 어느 가난한, 가스요금도 못 내는 시나리오 작가가 맞고로 떼돈을 버는 이야기를 유머러스하게 풀어놓고 있기도 하고, 가슴이 물리적으로 너무 아파 방바닥을 기어다니는 사람의 이야기를 쓰고 있기도 했다. 죽은 제자의 글을 읽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다 읽었다. 그리고 추모행사를 준비한다는 친구들에게 보내주었다. 마음들을 잘 추스르라고 말했다.
고은이는 두 학기 동안 내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수업을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밝고 붙임성이 있는, 그러나 어딘가 어두운 그늘이 있는 친구였다. 다른 학교를 졸업하고 들어왔던 터라 이미 이십대 후반이었다. 당시 나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의 교수였는데, 전공이 서사창작인지라 영상원 학생들도 많이 들었다. 한예종에는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온다. 영상원도 마찬가지다. 영상원의 입시에는 글쓰기도 포함되어 있다. 영상으로 학생을 뽑기는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글을 통해 학생의 재능을 가늠하자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의 인기가 높고 지원자들이 몰려들면서 예기치 않은 결과가 나타났다. 그것은 영상원에 글을 잘 쓰는 학생들이 본의 아니게 늘어난 것이다.
고은이도 그런 학생 중의 하나였다.
꿈은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것이었지만 문학도 좋아했다. 글도 뚝딱뚝딱 잘 썼다. 유머가 있었고 비애가 있었고 통찰이 있었다. 다른 학생들의 글도 만만치 않게 좋았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이렇게 글을 잘 쓰는데 왜 영화들을 하려고 하니? 따뜻한 방에서 별로 돈 안 들이고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그때 슬며시 웃던 것이 기억난다. 영화라는 잘나가는 장르를 질투하는 소설가의 시샘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마 고은이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 한 명은 내 말을 들었다. 그녀는 영화를 포기하고(자기 말로는 영화에 원래 큰 관심이 있지도 않았다고 한다) 연극원으로 과를 옮겼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 반 년 후에 한 문예지의 신인상을 통해 등단했다.
그녀가 김사과다.
고은이는 남았다. 그리고 단편을 만들었다. 영상원 영화과에서는 누구나 단편을 찍어야한다. 고은이도 찍었다. 그리고 영화제에 가서 상도 받았다. 그게 <격정소나타>다.
그 다음 해인가. 평소 알고 지내던 영화 제작자가 시나리오를 고칠 작가를 추천해달라고 했다. 고은이를 소개시켜줬다. 그러나 계약은 성사되지 않았다. 제작자는 고은이가 제시한 액수가 너무 크다고 말했다.
“그 삼분의 일만 줘도 하겠다는 애들이 널렸어요.” 라고 제작자는 말했다. 지금 내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고은이가 제시한 금액은 한 재능있는 작가의 시간을 하염없이 저당잡을만한 큰 돈이 아니었다는 것이다(내가 얼마인지 말하면 아마 다들 놀랄 것이다. 그리고 실은 그 절반밖에 못 받고 대부분의 일이 끝난다는 것을 알면 더 놀랄 것이다). 내가 고은이는 그만한 재능이 있으니 믿고 맡겨보라고 하자 제작자는 이렇게 말했다.
“김작가님이 영화판을 모르셔서 그래요.”
맞다. 나는 영화판을 모른다. 어떻게 지금껏 잘 돌아가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머리로는 납득이 돼도 마음으로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전혀 인연이 없던 판은 아니어서 ‘전혀 모른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내가 서 있는 바닥 아래에 갤리선의 노잡이들이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다들 알다시피 영화계는 화려한만큼 그늘도 깊다. 영화계에서 일하는 작가들의 가장 큰 고통은 만족감의 부재다. 소설은 자기의 의지가 굳기만 하다면 끝은 낼 수 있다. 그것을 주변에 돌려 읽힐 수도 있고 잘 제본해서 책꽂이에 꽂아놓을 수도 있고 자비로 출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나리오는 그 자체로는 완성품이 아니다. 운이 좋은 몇 편의 시나리오만이 수많은 단계를 거쳐 비로소 영화가 된다. 많게는 수십 차례를, 몇 년 동안 고친 시나리오들이 영화화 무산과 함께 허공으로 날아간다. 게다가 그 바닥은 여성에게는 더욱 가혹하다. 남성 시나리오 작가는 감독을 겸업하는 대안도 생각해볼 수 있지만 여성 작가들은 그 대안을 섣불리 선택하지 못한다.
고은이가 가고 한참이 지나서야 신문에 기사가 떴다. 난리가 났다. 온 세상이 말을 쏟아냈다. 나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참았다. 그렇게 가장 힘든 시간은 지나갔다. 부끄러웠다. 내가 고은이의 선생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사건은 우리 모두의 추문이다. 김현은 오래 전에 썼다. “문학은 그 억압과 억압에 의해 야기된 불행을 대상으로 삼아그것을 드러내어 추문으로 만든다.”고. 고은이 사건은 문학이 그것을 드러내기도 전에 먼저 추문이 되었다. 지금 나는 그 추문을 ‘대상으로 삼'지 못하고, 그것을 앞질러 가지 못하고 여전히 그 추문과 함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다소 엉뚱한 사건 때문이다. 지난 1월 1일 신춘문예 발표일을 맞아 내가 블로그에 올린 글이 있었다. 그 글에 평론가 소조님이 반박의 글을 보내왔고 그에 따라 나도 또 글을 쓰고 이러면서 글타래가 이어졌다. 주제는 작가지망생들이 어떻게 스스로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예술가로 살아갈 것이냐에 대한 것이었다. 설이 지날 무렵, 소조님의 글이 올라왔지만 그때 나는 이미 고은이의 일로 깊은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공교로운 일이었다. 예술가 지망생이 이 엄혹한 예술계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지키고 재능을 꽃피울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던 와중에, 고은이가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나는 고은이가 쓴 글을 내가 진행하는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에서 낭독할까도 생각해보았다. 그녀가 무능해서, 글을 잘 못 써서 이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나는 과제 폴더를 열어 그녀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보았다. 다 훌륭한 것은 아니었지만 몇 편은 이름을 가리고 내놓는다면 기성작가가 썼다고 해도 믿을 글이었다. 그래, 팟캐스트의 제목은 <무명작가 최고은>이라고 하자. 그러나 나는 그 팟캐스트를 녹음하지 못했다. 그랬다. 못했다. 할 수가 없었다. 소리내어 읽을 수가 없었다. 마이크를 치웠다.
시간이 흘러갔다. 그리고 한겨레신문의 기사가 떴다. 그날도 어디에든 뭔가 한 마디 쓰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소조님이 트위터로 올린 글이 갑자기 화제가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트위터는 140자라는 한계가 있다. 이어 써도 읽는 사람은 잘 이어 읽지 않는다. 오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그 이후의 소조님의 대응에는 좀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떤 주제는 140자로도 오해없이 전달이 가능하다. 채근담 류의 공자님 말씀, 자기계발서 카피 같은 글들이 그렇다. 그런데 어떤 주제는 독자를 설득하는데 최소 2000자의 공간이 필요하다. 또 어떤 민감한 주제는 책 한 권이 필요하다. 예컨대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같은 책의 문제의식을 140자로 전달할 수는 없다. 과학의 역사가 점진적이 아닌 계단식으로, 어떤 충격적 기점들을 거치며 폭발적으로 변화해왔다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책 한 권이 필요하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기가 설득하려는 주제가 그 미디어에 맞는지를 세심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여성작가에 대한 그의 트윗이 문제가 되었을 때, 소조님은 “맥락을 살펴달라"고 거듭 강조했지만, 맥락을 잘 살펴야할 사람은 평범한 독자라기보다는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고 그 중에서도 비평가여야 마땅하다. 비평가야말로 타인이 써놓은 글, 예컨대 소설 같은 복잡한 글을 숨겨진 컨텍스트까지도 섬세하게 살피며 읽어야하는 직업이 아닌가.
독자에게는 숨겨진 맥락을 살필 것을 주문하면서 소조님 자신은 더 큰 맥락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날은 아침에 한겨레신문 기사를 필두로 온 포털에 글들이 깔리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큰 비통과 슬픔에 빠져 있었다. 모두들 이 추문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고 더 일찍 그 비운의 젊은 예술가를 위해 무언가를 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그녀가 감독한 단편영화와 인터뷰 영상들을 찾아보며 한 재능이 어떻게 사라져갔는가를 죄스럽게 훔쳐보았던 것이다. 나는 그날 소조님이 잃은 것은 신망이라기보다는 기대였다고 생각한다. 연예저널들의 자극적인 헤드라인에 낚여 들이닥친 이들은 차치하자. 그들이 전부는 아니다. 그들을 빼고도 그날 많은 이들은 소조님께 실망했던 것이고 그 실망은 이 아웃사이더 비평가가 혹시 공감의 능력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성질의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소조님은 거기에 더해 “내가 공격당한 배경에는 최고은씨의 죽음이 있는 것같은데,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참 아이러니컬한 상황이다. 왜냐하면 따지고 보면 나만큼문화계(문학계)의 불공정함을 문제삼은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지만 이것 역시 독자들에게 ‘소조님의 인생'이라는 긴 맥락까지 살펴달라는 과한 주문일 뿐이다. 자신이 약자이거나 아웃사이더이기 때문에 그 어떤 말도 용납된다는 발상은 다소 위험하다. 다층적인 사회에서는 경우에 따라 누구든 상대적으로 약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식의 반응은 자기반성이나 내성을 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다. 평론가가 내성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논리가 무너진다. 이 부분에 대해서 잠시 후에 말하기로 하자.
어쨌거나 소조님이 문제의 트윗을 방어하면서 이 모든 일은 ‘김영하와의 논쟁'과 관련이 있다고 거듭 말하는 바람에 논쟁의 성격도 이상해져 버렸다. 그리고 생각지도 않던 독자들마저 이 논쟁의 귀추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 논쟁을 이어가자면 나는 고은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는데, 정말이지 그러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마침내 이렇게 책상 앞에 앉아있다. 그리고 내게 보낸 소조님의 글을 다시 읽어보고 고은이 사건이 있기 전에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적는다. 아무래도 지금 적고 지나가지 않으면 영영 못 쓸 것 같아서이다. 이제 소조님이 쓴 글을 보자.
이 글은 이상하다. 처음 볼 때부터 어리둥절했다. 다시 읽어도 그렇다. 소조님의 글은 크게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잘 나가다가 갑자기 마지막인 4장에 이르러 돌연 엉뚱한 곳으로 초월해버린다. 예를 들어 다음 문단을 보자.
“김영하님은 “세계를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신을 바꿔야한다"고 주장하는데, 자신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가장 힘든 일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나는 나의 노력에 의해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계가 바뀌는 만큼만 바뀔 뿐입니다. 사실 이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세계와 씨름을 해온 이유이기도 합니다.”
겹따옴표를 쳐놨기 때문에 저 문장은 마치 내가 직접 쓴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가 않다. 원래의 내 글은 “예술가 개인은 시장의 규모도, 진입장벽의 높이도, 정치 제도도 바꾸지 못한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당분간 오직 우리 자신뿐이다.” 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분간'이라는 부사이며 이 글이 작가지망생들, 즉,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는 예술가 지망생들에게는 보내는 글임을 감안할 때, ‘당분간'이라는 부사는 더욱 중요해진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세계를 일단 변화시키고 보라'는 식의 충고는 무책임하다고 나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가장 힘들다'는 그 다음 문장도 납득하기 어렵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140자로 설득할 수 있는 주제가 있고 한 권의 책이 필요한 주제가 있는데 저 문장이야말로 한 권의 책이 필요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한 사람이 담배를 끊는 것이 전 국민이 담배를 끊게 하는 것보다 쉽다. 나 한 사람이 책을 많이 읽는 것은 새해 결심만으로 충분할 수 있지만 전 국민이 책을 많이 읽게 만들려면 엄청난 예산과 캠페인, 교육제도의 개혁이 필요하다. 이런 상식을 설득력 있게 뒤집으려면, 토마스 쿤처럼 한 권의 책을 써야한다. 그런데 소조님은 갑자기 ‘왜냐하면'으로 앞 문장을 기정사실화하면서 ‘왜냐하면 나는 나의 노력에 의해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계가 바뀌는 만큼만 바뀔 뿐입니다'라고 써나간다. 그가 ‘인간은 환경과 교육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는 빈서판이라는 식의 환경결정론'을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믿는 게 아니라면 이 문장은 접수하기가 어렵다. 우선 나부터가 세계가 바뀌는 만큼만 바뀌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이 무슨 단순한 결정론이란 말인가.
그런데 소조님이 이렇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장의 연쇄로 결론격인 4장을 시작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그 이후에도 논리라기보다는 선언에 가까운 글들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문장들을 통해 소조님은 ‘나는 그냥 선언을 해버리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만 바꾸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결국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합니다.” 라는 문장이 또한 그렇다. 소조님의 문체는 잠언과도 같은 선언을 던진 후에, 바로 ‘왜냐하면'이나 ‘그렇다면'으로 그 앞 문장을 기정사실화한다. 아니나다를까, ‘그렇다면 이런 ‘제자리걸음'이야말로 문학(예술)의 가장 큰 적이 아닐까요?”라는 문장이 이어진다.
나로서는 거의 모든 문장에 고개를 가로젓게 만드는 이 4장 부분을 읽고 있노라면 반론을 할 의지를 잃고 만다. 개인을 바꾸는 것이 세계를 바꾸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명제 하나만 가지고도 우리는 지난한 철학적 토론을 벌여야한다. “모든 예술가는 혁명가”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예술사 전반을 검토해야한다. 이런 글들로 이루어진 성급한 ‘선언문'을 가지고는 대화가 불가능하다.
내가 기대했던 것은 이런 글이 아니었다. 내 세번째 글을 읽어보면 작가인 내가 소위 ‘문학어'를 버리고 비평가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독자들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작가로서 익숙하고 안온한 ‘문학어'의 세계에서 걸어 나와 스티븐 래빗이나 라즐로 바라바시의 연구 결과를 인용하며 학자의 언어로 말한 것은 평론가인 소조님에게 나름의 예의를 차린 것이다. 그런데 소조님은 갑자기 시의 언어, 선언의 언어로 퇴각해버렸다. 나는 학자나 평론가가 엄정한 언어를 쓰지 않으면 신뢰를 못한다. 작가에게 기대하는 것이 놀라움이라면 평론가에게 기대하는 것은 독자를 차분히 설득하는 섬세한 논리적 설득력이다. 작가가 평론을 쓰든, 평론가가 소설을 쓰든 마찬가지다.
지난 글에서 나는 현실의 높고 잔인한 벽에 직면한 예술가 지망생들에게 그 벽에 가서 정면으로 부딪치지 말고 예술가를 하나의 대안적 정체성으로 생각하라고, 예술을 삶의 일부로 즐기면서 운을 기다리라고 말하고, 왜 그럴 수밖에 없는가를 학자의 언어로 논증과 팩트를 들어 말했다. 그러나 소조님이 보내온 이 게으른 글을 보니 뺨을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논증도 없고 제대로된 반박도 없는, 감정적 수사로 가득한 선동에 가까운 글이 소조님의 진심이라면 대화는 불가능하다. 선언을 하고 싶다면 나를 걸치지 않고 바로 하면 된다. 소조님이 늘 얘기하는 ‘새로운 (문학) 제도’를 창안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잘 만들면 작가들이 모일 것이다. 4.19 세대들이 그렇게 했듯이. 그러나 섣부른 선언 이전에 뜻을 함께 하는 작가와 비평가를 먼저 규합했다. 그것을 잊으면 곤란하다.
문학은 개인적인 예술이다. 아직도 전 세계의 소설가들은 혼자 쓴다. 늙어죽을 때까지도 혼자 쓴다. 영화와 TV 드라마, 애니메이션까지 서사창작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협업이 이루어지지만 소설만은 예외다. 작가를 꿈꾸는 이들은 이것이 뭘 의미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봐야한다. 문단이라는 제도가 엄연히 존재하지만 그 제도는 보기보다 간단하지가 않다. 프로야구처럼 커미셔너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고전음악계처럼 대학에서 일정한 훈련을 거친 사람들만 모여있는 것도 아니다. 장정일처럼 중졸에 소년원 출신인 작가도 있는가하면 원래는 극작과에서 희곡을 쓰다가 어느 재단에서 하는 대학생 공모에 소설을 보내면서 작가가 된 김애란 같은 이도 있다. 진입하는 경로도 다양하고 인적 구성도 단일하지 않고 지도부도 없다. 몇 개의 출판사가 잘 나가는 작가들을 독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그 작가들이 거기 전속인 것도 아니다. 카르텔을 형성해 새로운 작가들의 진입을 막고 있지도 않다. 문창과 출신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다수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소조님의 지난 10년간의 문단 공격이 별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면 그것은 문단이 강고하게 단결해 소조라는 이를 왕따시킨 탓이라기보다는 아픈 지점을 정확하게 타격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소조님이 이번에 쓴 글과 같은 글을 계속 쓴다면 문단은 별로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곳은 언어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개인들의 느슨한 리좀적 연대로, 허술한 언어에는 잘 움직이지 않는다. 비약이 잘 허용되지 않는 비평가들의 세계는 더욱 그렇다. 문학사와 문학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던 4.19 세대 비평가들의 글을 보라. 그들의 기획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한 가지는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다. 백낙청, 김병익, 김현, 김우창 등의 글에는 섬세하고 치밀한 논리와 사유가 있다.
그리고 소조님은 세계를 바꿈으로서 비로소 자기를 바꾸는 데 성공한 작가들에 대해 친절하게 예를 좀 들어주었으면 좋겠다. 적어도 소조님의 글 3장에 등장하는 플로베르는 그런 작가가 아닐 것이다. 혹시라도 내가 그에 대해 몰랐던 면이 있다면 알려주시기 바란다. 플로베르를 제외하고라도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소조님이 예로 든 그런 영웅적인 작가들의 면면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내가 아는 작가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자기 내면과 싸우다 “결과적으로 혹은 어쩌다보니” 세상을 바꾼 사람들 뿐이다. 그들이 바꾸었다는 세상도 현실의 세계라기보다는 문학적 지형이라는 일종의 가상세계였다. 그것이 쿤데라가 말하는 ‘개개의 작품은 세상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 시대의 작품들에 대응한다'는 테제일 것이다.
문학의 흥미로운 점은 그것을 둘러싼 바로 그런 무수한 아이러니들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도박빚을 갚기 위해 쓴 소설이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품이 되기도 하고, 단지 한 여자를 미혹하기 위해 쓴 연시가 대대로 애송되기도 한다. 도둑놈, 건달, 망명객, 마약중독자, 바람둥이, 정신병자, 살인자가 걸작을 쓰는가하면 가장 좋은 대학을 나온 최고의 인재가 범작만 쓰다 인생을 종치기도 한다. 톨스토이는 러시아를 개혁하겠다는 꿈을 품고 소설을 썼고 그 결과 <안나 카레니나>의 상당 부분은 작가의 정치적 견해와 계몽적 사상으로 점철돼 있지만, 오늘날 모든 독자와 비평가가 사랑하는 것은 톨스토이가 힘을 주었던 그 장광설이 아니라 “그 여자는 너무 지긋지긋하다"고 작가 자신마저 진절머리를 냈던 안나 카레니나의 혼란스런 행동과 심경을 묘사한 부분이다. 다시 말해, 문학은 의도와 결과가 모든 분야에서 어긋나는 장이다. 선의를 투입한다고 좋은 결과가 나오지도 않고 엄청난 노력을 쏟아붓는다고 대작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술에 취해 휘갈겼다고 다 쓰레기가 되는 것도 아니다. 작가가 겨냥한 지점과 전혀 다른 지점에서 절창이 나오기도 하며, 작가가 실패작이라고 버린 소설을 후대에서는 걸작이라고 칭송하기도 한다. 또한 한 세대가 입이 마르게 고평했던 소설이 작가가 죽자마자 쓰레기 취급을 받기도 한다. 이런 예는 무수히 많다.
그러므로 지금 작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이토록 이상한 일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원칙도 없이 일어나는 문학이라는 행성에 대해 겸허한 마음으로 알아나가야한다. 한국문학계만 그런 것도 아니다. 전 세계 문학계가 이렇게 느슨한 개인들이 종횡으로 얽히면서 서로 경쟁하고 존중하며 살아간다. 즉, 문학계라는 곳은 소조님이 몇 줄로 간단하게 ‘세계를 바꾸면 된다'고 말한다고 바뀌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나는 문학계에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있되, 매우 복잡한 방식으로 해결해가는 곳이라는 뜻이다.
미학에는 아직 해명하지 못한 질문들이 무수히 많다. 예를 들어, 도대체 어떤 작품이 궁극적으로 정전이 되는가, 라든가, 어떤 작가가 좋은 작가이고 어떤 작가가 나쁜 작가인가, 젊은 날에 좋은 작품을 쓰던 작가가 늙어서는 그렇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반대로 젊은 날에는 별볼일 없던 작가가 늙어서 갑자기 걸작을 쓰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들이 좋은 작품이라고 말하는 기준은 왜 자꾸 바뀌는가, 그런데도 몇 천 년 동안 정전으로 내려오는 <오딧세이> 같은 작품은 도대체 그 안에 어떤 요소가 있기에 그러한가, 그런 걸작들을 쓰려는 작가가 준비해야하는 것은 무엇인가, 연애와 알코올은 작품의 창작에 도움을 주는가 아니면 방해하는가, 인간들은 도대체 왜 그토록 먹고 살기 어려운 예술에 몸을 던지는가, 광기는 예술의 본질인가 아니면 한때의 유행인가, 남성/여성 호르몬의 분비와 창작의 양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작가의 도덕적 선의가 작품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가, 전세계에는 단 하나의 ‘문학'이 있는가 아니면 나라마다 다른 일종의 ‘리그'가 있는가. 이밖에도 무수한 미학적 질문들이 해명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작가가 되고자 하는 이는, 그리고 현재 작품을 써나가고 있는 현업 작가들은 이 모든 질문들과 결국은 맨몸으로 대결하게 된다. 그러니 간단하게 뭔가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화려한 말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예술가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모든 이들은 ‘나는 과연 작품을 써낼 수 있는가'부터 시작해 ‘어떤 작품이 과연 좋은 작품인가' 같은 질문에 다다를 것이고, 그 과정에서 간단없이 엄숙한 삶의 시련을 겪어야한다. 생계와 결혼, 육아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가 널려있다. 이 문제들을 간과한다면,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예술가도 인간이고 결국은 죽는다는 것. 그것은 예술가를 성숙하게도 하고 좌절하게도 하고 조급하게도 하고 모든 것을 문득 긍정하게도 만든다. 어떤 역할을 하든 죽음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그러므로 예술가들은 그 어떤 손쉬운 해결책에도 현혹되지 말고 냉철하게 현실을 살펴야한다. 때로는 자신을 격려하고 자기 내면의 어린이/괴물을 발견해 그것으로 예술활동의 자양분으로 삼으면서도 현실감각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육신은 연약하고 쉽게 병든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얘기 하나만 할까 한다. 나보다 어려운 작가들이 부지기수인데 아무래도 엄살 같아서 그동안 잘 하지 않았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등단을 하자마자 나는 결심을 하나 했다.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심을 지켰다. 아이를 양육할 돈으로 더 오래 작가 노릇을 하기 위해서였다. 나처럼은 아니겠지만 내 동료작가들 역시 어떤 식으로든 뭔가를 희생해 지금 여기에 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쨌든 문학이 나를 받아주는 한, 나는 그저 쓸 것이다. 그리하여 가늘고 길게 살아남을 것이다. 다행히 운이 좋아 지금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문학적 유행은 자주 바뀐다. 내 소설을 읽던 독자들은 언젠가 다른 작가의 책을 읽게 될 것이고 내 소설은 잊을 것이다. 아니, 아예 아무도 소설책이라는 것을 사지 않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나는 그때의 생존을 늘 고민한다. 살아있어야 쓸 수 있으니까. 소조님은 이런 발언을 작가들의 낭만주의적 허세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작가라는 존재를 잘 모르는 거다. 잘 모르는 대상은 공격할 수도 없고 하물며 바꿀 수는 더욱 없다.
할 말은 많지만 그만 써야겠다.몸과 마음이 힘들다. 다만 수많은 고은이들의 건투를 빈다. 영악하게 살아남아 예술이 허락한 기쁨과 고통을 누리시라. 세상이 곧 바뀐다는 풍문에 속지 마시라. 타인의 인정이라는 가혹하고 희귀한 복권에 제 운명을 맡기지 말고 자기 소명을 찾으시라. 그리고 부디 살아들 남으시라. 부디.
덧붙여 : 또다른 고은이가 나오지 않도록 제도의 개선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안다. 나도 한 마디 보태고 싶지만 오늘은 힘들어 여기서 그만 접는다. 그러나 한 마디만 할까 한다. 그 어떤 대책이 되든 첫 발걸음은 영화계 혹은 예술계가 어떤 곳인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다. 그제 내가 참석한 행사의 한 청중이 한때 영화계에 몸담았던 내 동료작가에게 물었다. “그렇게 성공하기 힘든 영화판에 그렇게 많은 지원자가 몰려드는 이유가 뭔가요?” 그도 나도, 적절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예컨대 우리는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부터 준비해야한다. 간단한 것은 하나도 없다.
두번째로 덧붙여: 이 글을 기사로 쓰지 말았으면 좋겠다. 당신이 누구든.
세번째로 덧붙여: 상상력이 풍부한 이들이 몇 있는 것 같다. 고작 소조와의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이 글을 썼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니 놀랍다. 독해력이 부족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가련하다. 어쩌다 그렇게들 망가졌을까. 그리고 내가 그를 이겨서 뭘 하겠는가.
http://pinksub81.egloos.com/3573780
김영하가 오늘 이런 글을 올렸다. 그리고 이 글은 트위터에서 끊임없이 RT가 되었다. 트위터 검색창에 김영하 트위터 아이디를 한 번 찍어보면 알 것이다. 그렇게해서 얻어 걸리는 글들은 수동 RT이고, 그것보다 더 엄청나게 많은 수의 자동 리트윗들로 김영하의 그 글은 끊임없이 타임라인을 뱅뱅 돌았다. 감동적이고, 가슴 찡하고, 가슴을 먹먹하게 하고, 꼭 읽어봐야할 글이라는 말들과 함께. 왠만한 작가들 트위터 타임라인에 가면 열에 아홉은 RT가 되어 있고, 어떤 작가/작가 지망생들은 이런 글 써주셔서 감사하다며 큰 절을 했으며, 몇 명의 고인의 학교 선후배들도 김영하에게 고마워했다. 충격받았다. 그 글을 읽으면서도 충격받았고, 그 글에 대한 반응들을 보면서 또 한 번 크게 충격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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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김영하의 고인에 대한 비통함과 슬픔이 거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강도에 대한 서술에는 의심할지언정, 그 마음 자체는 진심일 것이다. 충격받았을테고 비통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글은 감동받고 감사해야할 글이 아니었다. 저 RT 앞에 붙은 수식어 중 그나마 맞는 말이 하나 있다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글"이라는 거 하나밖에 없다. 그래, 정말 글을 읽는데 가슴이 먹먹하더라. 난 이 글을 "어느 영민했던 제자의 죽음에 부쳐" 누군가를 비난하는 글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더 과격하게 쓰자면 이 글은 제자의 죽음을 어느 정도 팔아, 지 하고 싶은 말 하는 글이다. 남는 것은 김영하의 "전략적 의도"가 어느 정도 적극적으로 들어갔는지에 대한 차이의 문제다. 그 글을 읽으면서 사람마다 건져올리는 전략적이고 수상한 증거들은 다 다를테고 결국 그걸 확실히 아는 사람은 김영하밖에 없겠지. 하지만 백번 양보해서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제자의 죽음을 어떤 담론 위에 그런식으로 얹어서는 안되었다. 개념없고 고인에 대한 예의또한 없는 짓이다. 게다가 당신은 스승이잖아?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김영하를 얄팍하다고 늘 폄하해왔지만, 동시에 그가 똑똑하고 영악하다고도 생각해왔기에 그가 몰랐을리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지금 저런 방식의 글을 씀으로해서 얻게 되는 것들, "제자를 잃은 슬픈 스승"이라는 포지셔닝을 그 특유의 세련되고 잘 먹히는 말들로 잘 포장할 때 이미 그것만으로 많은 이들의 가슴 속의 무언가를 건드릴 수 있다는 것들. 지금까지 글써온 짬밥이 몇 년인데. 사실 스테레오타이핑된 포지션이란 의외로 힘이 세다. 저 위에 링크한 글에서 당고님도 말했지만, 조영일이 남자였기때문에 "마초" "여성비하적 사고가 베이스에 깔린 사람"의 혐의를 뒤집어 쓰기 쉬운 것처럼, 당고님이 미혼 여성이기 때문에 "뭣도 모르고 싸가지없게 떠드는 비혼 영페미"의 낙인이 찍히기 쉬운 것처럼. 아니 사실 저 모든 것과 비교해보더라도 "아끼던 제자를 잃은 스승"이 처음부터 먹고 들어갈 정서적 울림은 굉장히 크다, 그것도 이런 추모의 기간에.
처음부터 의도한건 아니라고 치자. 하지만 그렇다고해도 저렇게 쓰여진 글이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 몰랐을 거라고도 생각되지 않는다. 그런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거라는거, 그런것을 김영하가 몰랐을거라고? 나같은 애도 아는데? 그리고 그런 혐의는 그가 평소 두려워하는 도덕적 비난과 맞닿아 있기에 똑똑한 김영하는 알면서도 그런 억울한 길을 선택해서 가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전략적으로 플랜A, B이러면서 전략을 짜놓고 적극적으로 이용한 건 아니지만(그랬을 수도 있다 물론) 적어도 그는 결과적으로 이용했고, 그리고 그걸 본인도 잘 알고 있다. 설마 정말 그렇게 이용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보는가? 정말 그게 순도 100프로의 슬픔에서 나올 수 있는 형식의 글이었다고 생각하는가?
난 논쟁에 대한 그의 개인적 욕심이 고인에 대한 슬픔을 이겼다고 생각한다. 그러지 않았다면 그렇게 두 가지 맥락을 이어붙힌 잔인하고 비겁한 글을 쓸 수가 없다. 그걸로 김영하는 어떤 도덕적 우위를 선점해놓고 시작했다. 게다가 조영일은 이미 간간히 '고인에게 잔인했다'는 비난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민감한 분위기 속에서 절대 건드릴 수 없는, 아니 건드리기 힘든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스승에 대한 이런 나의 의심과 분노를 누군가에게 표현하면서 일말의 꺼리낌을 자꾸 느끼게 된다) 제자에 대한 슬픔을 꺼내들어 상대방의 입을 처막아 버리다니 비열하고 졸렬하다는 말로도 난 이 사람에 대한 분노를 표현할 길이 없다. 저건 논쟁의 상대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하긴 고인에 대한 예의도 이미 저버린 사람이 무슨 상대에 대한 페어플레이까지 챙기겠는가. 사람들에게 잘 먹히는 언어들 찾아서 자기 글 분칠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그 와중에 문단/예술계 쪽에서 힘들게 꿈먹고 사는 사람들의 예술적 동지애도 슬쩍 건드려주는 것도 잊지 않느라 더 바빴을 것이다. 게다가 그 글 올리는 타이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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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김영하에 대한 분노도 분노지만, 난 김영하에게 따뜻한 글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작가/작가 지망생/편집자 등등 그 업계 중심이나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의 반응이 너무 슬프고 참담하다. 처음부터 이 논쟁을 주욱 따라왔을 업계 사람들, 그리고 적어도 (글을 쓰거나 예술쪽 일을 하지 않는) 나같은 사람에 비해서 날카롭고 예리할 사람들 중 꽤 많은 사람들이 김영하의 그 글에 힘을 내고, 감사함을 느끼고, 감동받는게 너무 약올랐다. 그 안에는 내 친구도 있고, 내가 평소 좋아하던 작가/작가 지망생/편집자 등등도 있고, 고인의 선배이기도 한 내 학교 선배도 있었다. 그 사람들의 그 속없음이 난 어쩐지 화가 나고 슬퍼서 울고 싶었다. 내키지않을 글 힘들여서 써주셔서 너무 감사하단다. 며칠간 너무 지쳐있는데 김영하의 글에 묻어 잠시 쉬겠단다. 뭐가 감사해요? 그 글에 왜 묻어가요? 배울게 많은 글이라면서요. 뭘요? 그 바닥에서 비열하게라도 살아남는 법? 아.. 뭐가 이렇게 쉽나요..
전에 황정민이 그런 말을 했었다. 배우로서 '어떤 상황에 빠지면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되는지, 호흡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기억하면 연기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 친구의 장례식에 가서 울면서도 그 순간 "내가 어떻게 울었지"를 잘 새겨두려고 한다고, 직업이 그래서 어쩔 수가 없다고. 그래 그건 삶의 희로애락을 표현하고 옮겨야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영원한 딜레마다. (굳이 그런 직업을 가지지 않은 우리들도 언제나 누군가의 슬픔과 불행 속에서 어떤 동력을 얻기도 하고, 그것을 밟고 딛고 살아간다) 그 또한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죽음을 이용하려면 당신이 말한 "문학어"로 작품에나 녹여내라. "비평가의 언어"로, 선량한 "고은이들" 불러내서 팔지말고. 당신 입에서 "고은이들"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 자체가 역겨워 미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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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어설픈 말 하나 또 보태게 되어서 마음 편히 쉬지도 못하고 있을 것 같은 고인에게 너무 미안하고 죄스럽다. 사실 미안하기도 했고, 이 모든 상황을 보다보니 무기력이 달라붙어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미안해서, 말 보태는게 죄스러워서, 김영하의 저 글이 이 모든 상황의 종결처럼 되어 감동이나 주며 돌아다니는 것을 가만히 지켜만 보는 것은 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사실 그런게 어딨어. 일개 나같은 사람이 이렇게 분해한다고해서 달라질 것도 없고 이미 그는 이겼다. 그는 그 글로 논쟁에서 우위도 점했고, 잘나가는 중견 작가로서의 자존심도 지켜냈고, 아울러 동정과 연민도 받았고, 존경도 받았고, 이슈도 되었다. 다 가져갔다. 여기에 대해 당고님께 분노의 덧글을 달았더니 답글로 이런 말을 하셨다 "결국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챙길 거 다 챙겨서 가더라고요. 그런 사람들이 살아남나 봐요." 정말 그런가보다. 하지만 그냥 아무말도 안하고 보는 것이 너무 분했다. "난 네가 뭘 팔았고 뭘 다 가져갔는지 다 알고 있다"고 소리라도 지르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계속 일이 손에 안 잡힌다. 김영하의 글에 힘을 내고, 감동하고, 감탄하는 사람들을 보는게 너무 괴롭다. 유린의 현장을 보는 것 같다. 그리고.. 김영하한테 내 안의 무언가를 살해당한 기분이다
예술가의 궁핍은 오래된 추문이다. 너무 오래돼서 미화되기도 하고 너무 오래돼서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이다. 중세에는 예술가라는 개념 자체가 희미했다. 그들은 일종의 기술자라고 할 수 있었다. 이 기술자들은 길드를 만들어 스스로를 보호했다. 티치아노나 미켈란젤로도 길드 소속이었다. 길드는 일종의 노조처럼 기능하면서 소속원들의 이익을 지켜준다. 그러나 강력한 진입장벽을 만드는 것 역시 사실이다. 만약 한 도시에 건축가 길드가 있다면 그들은 다른 도시 건축가의 진입을 막고 방해한다. 그리고 같은 도시에서 건축가가 되기를 희망하는 이들은 길드 소속인 건축가 밑에서 오랜 도제 시절을 거쳐야한다. 이 제도의 흔적은 의료계나 사진계등에서 지금도 볼 수 있다. 미국에는 이런 작가 길드들이 존재한다. Authors Guild 가 대표적이다. 가입비는 1년에 90달러로 비교적 저렴하다. 예술가들에게는 문이 좁은 건강보험도 이 길드를 통해 가입할 수 있다. 이 길드는 소속 작가들에게 홍보용 홈페이지를 만들어주고 법률 지원을 해준다. 법률 지원은 미국 같은 사회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출판계를 잘 모르는 작가들이 계약 과정에서 피해를 입지 않도록 돕고 만약 피해를 당했다면 소속 변호사들이 이를 상담해준다. 그밖에도 수시로 컨퍼런스를 열어 작가들의 현안을 토론하고 교육을 한다. 이 길드는 몇 년 전 구글과의 저작권 소송에서 엄청난 보상금을 받아내서 더욱 유명해졌다. 그런데 길드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조건이 필요하다. 복잡하지만 간단히 요약하자면 그들이 인정하는 수준의 출판사에서 한 권 이상의 책을 내야한다. 자비 출판을 했다거나 집에 장편소설 원고가 수십 편이 있다해도 그는 그 길드의 구성원이 될 수 없다. 또 한 가지 이 길드에서 주목할 점은, 회비가 회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90달러에서 시작하지만 만약 어떤 회원 작가가 엄청난 베스트셀러를 내게 된다면 그의 회비는 치솟는다. 그는 상당히 많은 액수의 회비를 내야하고 그것으로 조직이 굴러간다. 회원들 사이의 소득 재분배의 기능도 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작가들을 위한 조합도 존재한다. Writer's Guild of America다. WGA 는 주로 영화/TV드라마 작가들을 구성원으로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정회원은 상당히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해야하고 회비도 2,500달러 수준으로 적지 않다. 이 역시 법률지원과 그밖의 여러가지 회원들을 위한 일들을 한다. 파업도 벌인다. 작가들을 대표해 헐리우드 제작자들과 협상을 벌이고 결렬되면 파업에 들어간다. 몇 년 전의 유명한 파업은 헐리우드를 거의 마비시키다시피 했다. 그런데 혹시 최고은이 미국의 작가였다면 이 길드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잘은 모르지만 아마 힘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다섯 편의 시나리오를 썼지만 한 편도 영화로 만들어지지 못했다. 바로 이 부분이 길드의 맹점이다. 배타적이고 폐쇄적으로 운영되고 지망생들에게는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적 해법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프랑스의 정책의 방향은 '공정성및 기회평등'이다. 모든 예술가가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여러 방면에서 지원한다. 직접 지원은 예술가의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보조금과 생활이 어려운 작가들을 돕는 보조금으로 크게 나뉜다. 그러나 후자의 지원금을 누구에게, 얼마나 줄 것인가에 대해 프랑스 정치 지형의 변화에 따라 달라진다. 사회주의 정권이 집권하면 늘어나고 보수파가 집권하면 줄어든다. 몇 년 전, 프랑스의 거리에는 어린이들의 친구인 피에로들이 뛰쳐나와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지급되는 보조금이 줄어드는 것에 항의했다. 피에로도 엄연한 배우라는 게 프랑스인들의 인식이다. 프랑스뿐 아니라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이 부분에서 갈등을 겪는다. 세금을 내는 어떤 시민들은 예술가들에게 보조금이 너무 많이 지급되는 것을 아까워하기 때문에 입법 과정에서 논란이 벌어진다. 그것은 피할 수 없다. 게다가 어디까지를 예술가로 보아야하는가는 정치적 문제 이전에 미학적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보조금을 받을 예술가를 지정하는 위원회가 있다면 그 위원들에 의해 일종의 정치가 시작된다. 예술적 편향이 알게 모르게 강요되기도 한다. 혹자는 유럽에서의 영화예술의 쇠퇴를 국가의 영화 지원에서 찾기도 한다. 내가 프랑스에서 만난 한 시나리오 작가는 보조금을 받기 위해 시나리오를 제출했지만 여러 번 거절당했다. 보다못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네 영화는 안 될 거야." "왜?" "반전이 있잖아. 심사위원들은 반전을 싫어해." 요즘의 프랑스 영화를 보면 그 말이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예술가를 직접 지원하는 것보다 더욱 바람직한 것은 사회 전체의 복지를 향상시키는 것이다. 최저생계선을 확보함으로써 예술가가 자기 나름대로 '오래 버틸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위원회'를 기웃거리지도 않고 가족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나름의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영화나 미술처럼 돈이나 시간, 인력, 장소가 많이 드는 예술은 결국 국가나 지자체의 지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문학은 비교적 그로부터 자유롭다. 그러나 사회 전체의 복지를 향상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최근의 무상급식 문제만 봐도 알 수 있다. 어린 아이들에게 밥을 주자는 정도도 첩첩산중의 정치적 쟁투를 거쳐야하는데, 국민 전체 혹은 예술가 집단 전체의 복지를 향상시키자는 제안이 얼마나 험한 정치적 난관을 돌파해야할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나 길은 결국 이쪽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대안들도 있을 것이다. 영화계라면 부율의 조정이나 임금지급 관행의 개선, 표준계약서의 법제화. 그러나 업계마다 상황이 다르므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우리가 어떤 길로 갈 수 있을까. 영화인들이라면 우선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문인들은? 이미 존재하는 문인단체들은 진입장벽이 낮은 대신 미국의 길드들이 수행하는 수준높은 회원보호를 제공하지 않는다. 우파인 예총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나는 회원도 아니고 관심도 없어서 잘 모르겠고 좌파인 작가회의는 회원의 권익보다는 주로 정치적 문제와 씨름해왔다. 설령 그들이 예술가의 처우에 관심을 집중한다해도 '지망생'들의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을까. 우리의 갈 길은 과연 어느 쪽인가? http://sooosleepy.wordpress.com/2011/02/13/%EB%AC%B4%EC%97%87%EC%9D%84-%ED%95%A0-%EA%B2%83%EC%9D%B8%EA%B0%80/
김사과 (존칭은 생략합니다) 1 잠에서 깨어나 습관대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가 그녀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접했다. 여전히 반쯤은 잠에 취해 침대에 누워 있던 나를 사로잡은 것은 슬픔도 분노도 절망의 감정도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싸늘하고 단순한 명제에 가까웠다. 네가 하는 일이 너를 죽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은 삼류영화에 등장할것 같은 낭만적이며 비현실적인 문장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런 낭만적이며 비현실적인 명제가 돌연 현실 그자체가 되는 상황에 맞닥뜨렸다. 아니 차라리 영화같다고 치부하며 외면하던 현실이 방문을 부수고 들이닥친 것에 가까웠다. 나는 그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차라리 웃을까 했다. 그럴수밖에 없었던 것이 객관화를 하기 불가능할만큼 그녀가 가깝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녀와 나는 둘 다 여자였고, 부유하지 않았고, 글을 쓰는 창작자였다. 같은 학교를 다녔고 같은 수업을 들었다. 방에서 나온 나는 어머니에게 소식을 전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말했다. ‘너도 이집에서 나가면 똑같이 될지도 몰라.’ 약간의 과장이 섞여 있었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사실이었다. 정말이지 우리는 너무 가까이 있었다. 2 십대 중반에서 이십대 초반 극단적으로 돈이 없었다. 사소한 감기에 걸려도 아픈게 문제가 아니라 진료비가 문제였고 생리가 다가오면 생리통이 걱정이 아니라 생리대를 살 돈이 걱정이었다. 돈을 벌고 싶어도 열여섯살 고등학교 중퇴생이 할 수 있는 일은 뻔했다. 뻔한 모든 일을 닥치는대로 했다. 시간당 천삼백원을 받고 식당 사장에게 성희롱을 당하며 일한적도 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아니 더 악화되었다. 왕복 네시간이 걸리는 통학시간과 많은 과제와 빡빡한 수업내용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지하철 차비를 치르면 점심을 굶어야 하고 점심을 먹으면 지하철에 무단승차해야 하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모든게 돈이었다. 연애는 커녕 친구를 만나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국립학교라 학비가 쌌고 학비를 대주고 밥을 주는 부모가 있었고 잠을 잘 방이 있었고 글을 쓸 컴퓨터가 있었다. 그런 최소한의 물적 기반이 없었다면 나는 에이포 열몇장씩 하는 긴 글을 무작정 써댈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니 그런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 나아지게 된 것은 소설가로 데뷔를 하고 난 뒤였다. 난 무엇보다도 내가 돈을 벌게 된 것에 그러니까 내가 앞으로 굶어죽지 않을 가능성이 커진 사실에 기뻐했다. 소설가 타이틀을 얻었다는 사실보다 상금을 탔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더 중요했다. 육체노동으로 돈을 버는 것에 비하면 글을 쓰는 것은 쉬웠으니까. 확실히 숯불갈비집에서 열두시간동안 서빙을 하거나 화장품 공장에서 하루 아홉시간씩 화장품 뚜껑을 끼우는 것에 비하면 하루에 원고지 백장을 쓰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내가 쓰고 싶은 걸 쓰는 거니까. 그리고 모두가 회피하는 단순노동과는 달리 소설이 잘팔리면 선망의 눈길을 받거나 유력일간지와 인터뷰를 하거나 사회명사가 될 가능성도 있었다. 3 이런 삶의 궤적은 내가 예술학교와 예술계의 지배적인 분위기에 위화감을 갖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나는 끝내 예술이 위대하다거나 고귀하다는 명제를 지지할 수가 없었다. 경제적 궁핍을 경험해본 나에게 그 명제는 너무 순진하게 느껴졌다. 아주 초기부터 창작에 필요한 물적기반을 확고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나는 남들에 비하면 정말이지 운이 좋은 케이스여서 글을 쓰고 돈을 떼먹힌적도 없고 몇번의 지원금도 받을 수 있었고 비교적 ‘젊은’ ‘여자’라는 사실이 나의 궁핍함에 대한 사회적 비난의 강도를 약화시켜주었다. (물론 그것이 결국 나에게 더 커다란 제약으로 다가온다는 걸 안다)그래서 졸업하고 이년간 아슬아슬하게 전업작가의 길을걷고 있다. 하지만 내가 벌어들이는 돈은 내가 제대로 된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있다. 일년에 몇차례씩 말그대로 잔고가 0원으로 떨어지는 일이 벌어지고 앞으로 결혼을 하거나 애를 낳아 키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부모의 신세를 지고 있는 점이 스스로를 위축시킨다. 한가하게 이러고 있을때가 아니라 뭘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운이 좋은 경우다. 그래서인가 가난의 지긋지긋함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은 타협할 생각이 없다. 그런데 이 말은 예술에 내 삶을 바치겠다는, 예술을 향한 낭만적인 도피로 오해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나는 위에 말한 것처럼 줄곧 정반대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현실이, 물적조건이 예술보다 힘이 세고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예술학교 시절 내내 세련된 취향을 가진 동료 예술가지망생들에게 맞서 우스꽝스럽게 보일 정도로 지나치게 대중문화를 옹호했고 현대예술의 부르주아적인 성격에 원색적 비난을 퍼부었다. 삶과 문학 사이에서 회의하다가 결국 문학을 떠나버리는 극단적 선택을 한 문학가들을 옹호했다. 난 도무지 예술을 긍정할수가 없었다. 그것은 내가 글따위 세상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걸 팔아먹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죄책감으로 이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글이 아니라 좀 더 가치 있는 일, 예술이 아니라 평범한 노동을 해서 살아가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한편 바로 그렇기 때문에, 평범한 노동이 얼마나 고된지 스스로 경험을 해봤기 때문에, 더욱 나는 그런 일을 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한편으로는 한여름 숨막히는 돈까스집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던 때로 돌아갈까 공포에 휩싸이며 거기에서 멀어지려고 애를 쓰고, 또 한편으로는 돈까스집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는 것을 제외한 모든 노동을 한가하고 배부른 일이라면서 비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내 나는 극단적인 두 입장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이것 아니면 저것을 택하라고 스스로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했다. 이런 내 태도가 예술을 삶보다 위에 놓는 예술지상주의자들의 태도에 맞서 삶을 예술보다 위에 놓으며 예술을 폄하하는 일종의 반예술주의적 태도라는 걸, 결국 두 태도가 동전의 양면에 다름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은 지난 여름의 일이었다. 나는 친구에게 위에 적은 나의 고민을 두서없이 털어놓고 있었다. 친구는 화가였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을 하고 있었다. 가만히 내 말을 듣고 있던 친구가 말했다. 그런데 나는 그림을 그리는 것과 일을 하는 것이 같다고 생각해. 그 말을 듣고 나는 망치로 한대를 얻어맏은 느낌이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유치한 관념에 사로잡혀있었던가 깨닫고 부끄러웠다. 그렇다. 나는 은연중에 예술과 노동을 분리한 다음 우열을 정하여 편가르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글을 쓰는 것은 설거지를 하는 것에 비해 더 낫거나 더 못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낫다 저것이 낫다하는 건 결국 사람들에 의해,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나는 바보같이 사회가 나에게 강요하는 편견에 사로잡혀 갈팡질팡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깨닫게 되고 나서 나는 비로소 내가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버릴 수가 있었다. 그리고 삶에 절망하여 예술로 도피하는 태도와, 예술에 절망하여 예술을 떠나버리는 태도 모두가 똑같이 극도로 낭만적인 태도라는 것을 비로소 이해할 수가 있었다. 문제는 나 혼자 그것을 깨닫는 것으로는 부족했다는 것이다. 짧은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다시 나를 부끄럽고 도망치고 절망하게 만드는 현실에 부딪혔다. 중년의 여성청소부는 화장실에 숨어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고, 식당 점원은 커튼에 가려진 부엌입구에 선 채로 꾸역꾸역 어묵을 먹고 있었다. 퉁명스러운 유럽 공항의 상점점원들과 달리 한국의 공항의 점원들은 지나치게 친절했다. 주인이 감시하는 씨씨티비가 달린 편의점에서 일해본적이 있는 나는 언제나 점원들의 친절함이 불편했다. 나는 의문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누가 당당하게 탁자에 앉아 어묵탕을 먹는 나와 주방에 숨어 어묵을 먹는 저 사람을 같다고 보겠는가? 누가 이런 광경에서 우열을 읽어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우리 모두는 우리들의 의도와는 달리 끊임없이 분류되고 위치지어지고 있었다. 어떤 것은 천하고 어떤 것은 고귀하다. 어떤 것은 가치있는 일이고 어떤 것은 무가치한 일이다. 계속해서 우열을 가르는 사회구조가 존재하는 한 나 자신이 좀 더 선해지는 것과는 관계없이 차별적인 게임은 계속될 것이고 거기에 속해있는 나는 때와 장소에 따라 약자와 강자의 위치를 바꿔가며 누군가를 착취하거나 착취당하며 부끄러워하거나 절망할수밖에 없을거라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4 인터넷에서 진행된 조영일과 김영하의 논쟁을 관심을 갖고 지켜 보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비평가와 예술가의 논쟁이 아니라 언젠가부터 계속되어온, 그리고 앞으로도 끝나지 않을, 예술을 둘러싼 두가지 양립불가능한 입장간의 서로의 존재자체를 건 대립에 가까운 것이었다. 조영일의 입장은 예술을 사회적으로/역사적으로 형성되는 것으로 바라보는 것에 가깝고 김영하의 입장은 좀 더 예술의 순수성을 옹호하는 입장이다. 어떤 입장을 취하건 사실 그건 각자의 문제이고 비난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위에서 썼듯이 예술을 둘러싼 두 입장이 양립불가능하다는 것이고 따라서 논쟁은 필연적이다. 그리고 나의 입장은 조영일에 더 가깝다. 그 이유는 첫째로 위에 적었듯이 예술을 과잉되게 옹호하는 것은 과잉되게 폄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실을 왜곡되게 바라보는 태도인데 나는 예술가라면 더욱더 현실을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저렇게 예술의 순수성을 옹호하는 태도 자체가 하나의 입장에 불과한데 그것이 강력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어 이 시대의 예술과 예술가에게 오직 자신의 입장을 따르기를 강요하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문화예술영역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 사조를 예술을 오직 예술의 자리에 머물기를 강요하는, 예술을 끝없이 낭만화하는 현대의 예술적 경향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예술의 가치를 극단적으로 옹호하는 입장의 기원은 독일의 낭만주의 운동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 독일의 상황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교육받은 일군의 젊은이들이 출현했지만 여러가지 여건으로 인해 현실사회에 진출할 통로가 차단되어 되어버린 당시 독일의 상황이 젊은이들을 절망하여 예술(문학)으로 도피하게 만들었다. 다른 모든 가능성이 차단되어 버렸으므로 그들은 더욱 더 예술을 향해 도피했고 예술을 낭만화하며 예술의 순수성을 옹호했다. 나는 같은 상황을 민주화 이후 환멸과 냉소가 지배적인 정서가 되어버린 한국의 구십년대 문학에서, 혹은 점점 더 귀여운 키치가 되거나 텅 비고 세련되어지기만 하는 당대 미술의 경향에서 발견한다. 예술이 오직 예술 자신만을 반복해서 호명하는 것은 그 예술이 속한 사회의 상황이 그만큼 막다른 곳에 닿았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현실에서 가능성을 잃고 절망한 예술은 현실 저 너머로 눈을 돌린다. 사회적 자살자가 되어버린 예술가들은 현실과의 끈을 잃어버린다. 그들은 그들만의 아름답고 순수한, 따라서 더없이 자폐적이고 자멸적인 왕국으로 떠난다. 어쩌면 그것은 몹시 아름다울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자멸과 절망을 향해 가는 지극히 아름다운 운동에 다름 아닌 무언가는 내가 예술에서 기대하고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예술에 관한 순수주의적 입장은 예술에 대한 여러 입장 중 하나에 불과하다. 위대한 예술이 탄생하는 수많은 배경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많은 예술 작품들 중에 그 입장에 의해 탄생된 작품은 일부에 불과하다. 바흐는 왕과 교회를 위해서 작곡했다. 발자크와 도스토예프스키는 빚을 갚기 위해 썼다. 많은 위대한 화가들은 귀족과 부르주아의 청탁을 받고 그림을 그렸다. 소비에트 연합에서는 명백히 선동적 목적으로 위대한 영화가 만들어졌고, 반대로 미국에서는 명백히 상업적 목적으로 위대한 영화가 탄생했다. 물론 내가 예술가의 내밀한 예술혼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나는 위대한 예술이란 예술가의 내밀한 예술혼과 예술가가 처한 현실상황 사이의 긴장에서 촉발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정확히 초월적 욕망과 세속적 욕망의 경계에 위치한다. 예술이란 미학과 정치, 아름다움과 윤리,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과 시대를 초월한 위대한 예술을 만들어내고 싶은 욕망 사이의 투쟁의 장에 다름아니다. 이 양립불가능한 모순적인 욕망과 상황간의 투쟁을, 적대를, 긴장을 소거해버린 예술이 도착하게 되는 곳은 아마추어들의 소박한 자기위안이나 무미건조한 관제예술 혹은 더 없이 세련된 문화상품의 세계이다. 위에 적은 예들이 단지 그렇고 그런 국가나 자본의 꼭두각시 혹은 왕이나 교회의 선전물의 세계에서 위대한 예술의 세계로 도약한 것은 바로 예술가가 가진 현실적 제약조건과 본인의 예술적 야망 사이에서의 치열한 고민과 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예술은 다른 모든 것에 대한 미적인 것의 무한한 승리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미적인 것과 다른 것들 사이의 처절한 투쟁의 실패의 기록에 가깝다. 그리고 예술은 그 실패를 발판삼아 자신의 가능성의 범위를 확장해나간다. 그것이 우리가 예술의 역사에서 발견하게 되는 유일한 진실이다. 5 그러니 무엇을 할 것인가. 내가 하는 것이 나를 죽일수도 있다는 절망적인 현실에 맞닥뜨린 우리 예술가들이 택해야 하는 길은 무엇인가. 예술로의 더 급진적인 도피,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쩔수 없이 종종 발생할 안타까운 희생에 대한 아름다운 애도인가? 더없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비명같이 탄생하게 될 예술의 가능성만이 남아있나? 우리에게 남은 길은 오직 그것뿐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또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예술을 둘러싼 오직 하나의 입장에 굴복하는 것이다. 여전히 다른 선택지들이 남아 있다. 그 중 하나는 삶과 예술 모두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이미 지난 세기,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예술가에게 필요한 것은 타오르는 예술혼 이전에 그 예술혼을 지속적으로 불태울 돈과 자기만의 방이라고 말한 적 있다. (물론 그것은 여성 예술가를 향해 쓴 것이지만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흔히 우울하고 예민한 여성예술가의 대명사로 불리는 그녀지만 이렇게 창작작업의 물적 기반에 대해서 냉철하게 인식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예술가는 별난 종족이 아니다. 다른 모든 인간들처럼 먹고 살 돈이 필요하다. 이런 필요에 대한 요구가 예술을 천박하게 만들지 않는다. 버지니아 울프는 노골적으로 액수까지 제시하며(500파운드) 글을 쓰려면 돈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속물이었지만 동시에 위대한 소설가였다. 이 예를 우리에게 적용하면 이렇다. 국민소득이 이만불에 달한다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다가는 굶어죽을지도 모르는 이런 엉망진창인 이 사회에 대해 혹은 문화예술계의 말도 안되는 관행에 맞서 목소리를 높이고 투쟁한다고 해서 예술가들의 순수한 창작욕이 타락되거나 고갈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새로운 예술의 발판이 될 수도 있다. 지독한 절망만이 예술의 탄생요건은 아니다. 예술혼에 불타는 미친 예술가는 예술가에 대한 하나의 이미지일 뿐이다. 다른 예술은 가능하다. 패배가 아니라 승리에 대한, 환멸이 아니라 가능성에 대한 예술은 가능하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수많은 실패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실패는 각자 골방에 갇혀 순수하고 자폐적으로 창작욕을 불태우는 식으로는 불가능하다. 지금 우리 예술가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 강한, 절대 패배하지 않는 자의식이 아니라, 오히려 자의식 전체를 뒤흔드는 투쟁이다. 그 투쟁은 예술 안과 예술 밖에서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다. 왜 우리는 예술과 삶 둘 중에 하나만 택해야 하는가? 이건 삶에 예술을 저당잡히라는, 장사꾼이 되어 예술을 팔아먹으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예술을 위해 삶을 희생하고, 혹은 살아남기 위해 예술혼을 팔아먹어야 하는 끔찍한 현실과 맞서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삶과 예술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 왜 예술가는 지금 당장 나서면 안되는가? 왜 예술가는 오직 예술가여야 하는가? 우리들이 예술가이기 전에 인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예술가는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게 다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이런 소박한 진실에서, 그리고 이런 소박한 진실을 왜곡하는 것들과의 투쟁 속에서 위대한 예술이 탄생할 수 있음을 믿자. 내가 하는 것이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고 그것의 실현에 나서야 한다. 그것은 개인들 각자의 이미 패배가 정해진 외로운 싸움이 아니라 개인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연대를 통해 가능할 것이다. 그것을 해내는 것 그것만이 죽은 그녀에게 살아있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