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바로 창녀이고 바보이기 때문에…
언급을 미뤄온 반복되는 외상적 사건에 대해 말할 차례인 것 같다. 나는 다른 평자들이 이 영화의 정념과 불안과 광기를 말하면서 그것이 억압되거나 분출되어 사건화하는 사회적 장소를 말하지 않거나 너무 적게 말해온 것이 의아스럽다. 그것이 너무 뻔하게 드러나 있어서 말하는 것이 멋쩍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사회적 장소보다 개별적 증상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영화에선 말해졌으나 비평에선 많이 말해지지 않은 것을 말함으로써 이 글을 맺고 싶다.
<마더>는 서사의 패턴에서 <플란다스의 개>와 유사하다. 죄는 계속 떠넘겨지고, 떠넘김의 와중에 갖가지 소동이 벌어진 뒤, 범인은 결국 드러나지 않고 떠넘겨진 죄는 무고한 희생자를 찾은 뒤 이야기는 종결된다. <마더>의 떠넘김은 훨씬 내력이 깊다. 엄마가 아들에게 농약을 먹였을 때 시작된다. 아들은 죄가 없지만 ‘가난이라는 죄’를 지은 엄마가 자신뿐만 아니라 무고한 아들까지 징벌하려 한다. 이것이 최초의 떠넘김이다. 물론 이것은 현실에서 발생하는 이야기다. 엄마의 선택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 행위를 비난할 낯짝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그리고 이후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물론 <마더>는 하층민의 비참한 생활상을 고발하는 영화가 아니다.
엄마의 원죄에서 비롯된 외상적 사건 이후에 게임1의 사건이 시작된다. 그 사건은 외상적 사건의 변주다. 도준은 아정을 살해했다. 그들을 그 어두운 골목길에 불러모은 건 쌀을 받고 몸을 팔아야 했던 아정의 죄다. 찢어지게 가난한 할머니의 손녀라면, 그가 엄마에게 징벌당했던 것처럼 그녀도 징벌당할 수 있다. 살인의 직접적인 계기는 정한석의 말대로 인정 투쟁이지만, 동시에 상호 오인이다. 아정은 “나랑 함 할래? 너 남자가 싫어?”라는 도준의 말을 “창녀 주제에…”로 들었다. 도준은 “야이, 바보 새끼야”라는 아정의 말을 자신의 지적 수준을 묘사하는 말로 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오인한 이유는 그들이 바로 창녀이고 바보이기 때문이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오인은 다시 자기 오인 위에서 작동한다.
무서운 일은 외상적 사건 이후에 이제 보이지 않는 손의 지령 없이도 ‘나’는 외상적 사건을 잊기 위해 혹은 자기 오인의 지속을 위해 끊임없이 죄를 떠넘기며 또 다른 외상적 사건을 실행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범인을 쫓던 엄마쪽도 마찬가지다. 그 골목길의 폐가에 있던 고물상 노인은 도준의 살인을 목격했다는 이유로 엄마에게 살해당했지만, 그를 그 자리에 오게 만든 건 쌀로 여자를 살 수밖에 없는 그의 죄다. 이 대목이 매우 끔찍한 것은, 이 노인이 우연히 비를 맞고 있는 엄마와 길에서 조우하는 이전 장면의 아름다움 때문이다. 비에 젖은 엄마가 고물 우산을 말없이 집어들고 2천원을 들이밀 때, 노인 역시 말 없이 1천원 한장만을 뽑고 가던 길을 간다. 시네마스코프의 넉넉한 화면에 비로소 안정되게 두 사람이 좌우에 담긴 이 투 쇼트의 은밀한 정감과 유대를 나는 이 삭막한 영화의 유일한 위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야기 전개상 없어도 좋았을 이 장면이야말로 모든 위안을 깡그리 삭제하려는 봉준호의 냉혹한 선택이라는 것은 노인 살해 이후에 알게 된다.
봉준호 전작보다 더 근본적인 정치영화
표적/범인 찾기는 포기되고, 찾기의 주체는 오히려 범인을 은폐하고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르며 스스로 또 다른 범인이 되어버린다. 연대는커녕 같은 원죄를 나누어 가진 사람끼리, 그 원죄가 촉발한 외상적 사건의 증상을 떠넘기기 위한 살육전이 <마더>의 ‘이후’의 사건들이다. 그 사건들은 정확히 시체가 꼭대기에 걸려있어도 모두 침묵하는 하층민의 사회적 장소 안에서 회전한다. 이것이 도준의 대사 “다들 내가 죽였다 그러고, 그러다 보니 죄가 몇 바퀴 돌아서 나한테 오고…”가 정확히 뜻하는 바다. 놀랍게도 저능아 도준만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지옥 같은 전가(轉嫁)의 살육전의 구조를 심드렁한 말투로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이 곳은 한국사회 전체나 공동체 일반의 환유가 아니며, 현남이나 강두 같은 실패한 소영웅도 모조리 사라져버린, 외상적 사건만이 끝없이 자기복제되는 그들만의 폐쇄 공간이다. 가난이라는 원죄 이후로 가난의 집단 내부에서만 외상적 사건이 영겁 회귀하는, 법과 제도는 오로지 그것의 외부로의 범람만을 차단하는 그래서 모든 죄가 그들 안에서만 회전하는 아수라의 폐쇄 공간.
마침내 필연적으로 최종적 희생자로 선택된 최하층민 종팔이, “엄마 없어?”라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인간의 얼굴로 돌아온 엄마의 질문에, “울지 마라”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에게 슬퍼할 자격을 묻는 냉엄한 질문으로 꽂힌다. <마더>의 엄마는 그 질문에 눈을 감는다. 그것이 이 영화의 마지막이다. <플란다스의 개>의 마지막 장면에서 현남은 우리를 바라보며 거울 빛을 반사한다. <살인의 추억>의 마지막 장면에서 두만은 우리를 놀란 눈으로 응시한다. <괴물>의 마지막 장면에서 강두는 우리의 눈을 대신해 괴물이 침묵하는 한강을 응시한다. <마더>의 첫 장면에서 흐트러진 막춤을 추던 엄마는 전작들의 마지막 장면을 잇는 듯 괴이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선 눈을 감고 모든 응시를 중단한다. 그리고 효도 관광버스 안에서 다시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이동진이 봉준호와의 인터뷰에서 적절하게 묘사한대로 이 장면은 ‘흔들리는 카메라 앵글과 때마침 지고 있는 석양의 강렬하게 붉은 빛 때문에 더 이상 인물들은 따로 구분되지 않고 한 덩어리로 보’인다. 엄마의 몸이 불규칙하게 흔들리며 우리의 응시를 교란하더니, 그의 형상이 실루엣으로 변해가며 버스 안의 다른 이들과 뭉쳐져 한 덩어리의 어둠이 되는 것이다. 봉준호는 평범한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타자의 이름인 ‘엄마’를 등장시킨 뒤, 그를 우리가 바라볼 수 없는 따라서 이해도 연민도 불가능한 어둠 저편으로 몰고 가버린다. 그 어둠의 형상은 전가의 살육전이 영원히 그 내부에서만 교환될 그들의 공동체이다. 그 공동체는 이제 해가 지면 우리의 시선 앞에서 실루엣으로도 남지 않고 어둠과 완전한 일체가 되어버릴 것이다. 엄마의 지워진 얼굴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살인의 추억>과 <괴물>이 국내적 국제적 억압 구조라는 이면의 질서가 스릴러의 게임에 접속된 이야기라면, <마더>는 돈과 계급의 이동 불가능성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하층민의 사회적 장소 안에 (자기)오인된 살인 게임의 자동장치를 영구히 내면화한 이야기다. 그러므로 군부 독재에의 기억이 실린 <살인의 추억>이나 주한 미군의 추악한 비행(非行)으로 시작되는 <괴물>보다 규탄도 분노도 안타까움도 슬픔도 없는 오직 불안과 히스테리만이 범람하는 <마더>가 더 근본적인 정치 영화라고 생각한다.
봉준호는 대중적 스릴러의 서사를 믿을 수 없는 층위까지 밀고 간다. 대중영화가 현실의 고통을 재현할 때, 그것을 유희하는지 아니면 앓고 있는지의 질문을 피해갈 수 없다. 봉준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살인의 추억>은 우리가 연루된 어떤 실패를 자연화함으로써 그 실패의 통증에 일종의 운명적 비극의 정조 혹은 체념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한 것은 아닐까? <괴물>은 저 미욱한 주인공에게 작지만 위대한 윤리적 선택을 배당함으로써 어떤 위안을 베푸는 건 아닐까? 그 질문 앞에서 봉준호는 <마더>의 서사를 앓음 쪽으로 힘껏 밀고 간다. 스릴러의 구조를 무력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모든 종류의 윤리적 선택은 물론 어떤 위안도 불능화하는 지점까지 밀고 간다. 이것은 대중영화로선 위험한 선택이지만 그 스스로 명명한 농촌 스릴러 혹은 제3세계 스릴러의 당당한 심화라 불러 마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