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

木石 2009. 2. 26. 13:26
1.
레볼루셔너리 로드 결국 그 얘기네...
사람들 간의 소통에 대한...

여기선 특히 부부 사이에 초점을 맞추어서 말이지...맨 마지막에 할아버지가 보청기 끄는 게 딱 그 얘기잖아 안 그래?

아 어제 <은하해방전선>을 한 번 더 봤더니...

2.
요즘 점심 시간에 9번에서 <엄마가 뿔났다> 앙코르를 해주고 있는데,
김혜자 (예전 같았음 아무렇지 않았을 텐데 나이 먹고 사회생활하다보니 왠지 선생님 자를 붙여야 할 것 같은 이 기분은?) 대박이다...
봉준호 (
예전 같았음 아무렇지 않았을 텐데 나이 먹고 사회생활하다보니 왠지 감독님 자를 붙여야 할 것 같은 이 기분은?)가
이번에 <마더> 준비하면서 김혜자랑 꼭 한 번 작업해 보고 싶었다고 했는데, 보다 보니 정말 알 것 같았다.
봉준호(감독님)가 좋아하는 배우들은 다 그런 느낌이 있다. 송강호(선배님), 변희봉(선생님), 박해일(씨).
정말 얼굴 그 자체만으로 한국의 자화상 같은...김혜자는 거의 그 정점에 가까운 듯 하다...

가슴 한 켠에 뭔가 잔뜩 쌓아 두고 빙산의 일각만을 얘기한다는 듯한 그 약간 머뭇머뭇하는 말투와
약간은 주눅이 들어 있지만 할 말은 다 한다는 듯한 그 목소리.

좀 아까 본 장면은 장미희(선배님) 집과 처음 상견례하는 장면이었는데, 장미희가 결혼 반대하고 그래서 잡음이 많았는데 이렇게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연극하는 게 오히려 불편하다고 하자, 말을 꺼내신다.
"......(전략) 자식 둔 부모 치고 내 자식 반대하는 데 맘 편할 부모가 어디 있겠어요...(후략)"
대사 하나 듣고 나도 모르고 울컥했다. 목소리만 들어도 그 분은 정말 한국의 어머님이셨다.

3.
아, 음...감동의 도가니인 지금의 분위기를 서서히 바꿔서...
어제는 미디액트에서 이경미 감독(님)의 강좌가 있었다.
서스펜스 영화 위주로 뭐 샷바이샷 같은 거 하는 거였는데, 그냥 주제 자체에 흥미가 좀 동해서 들으러 갔던 거였다.
준비 많이 못 해오시고, 강의 경험 많지 않으신지, 말하다가 좀 말리고 버벅대고 이런 거...참을 만 했다.
딴 데선 듣지 못할 사담, 여담 이런 거 듣는 재미만으로도 뭐 그럭저럭 괜찮았다.

근데 난데없이 맨 앞자리에 앉아서 되지도 않는 비위 맞추기, 아첨을 하는 한 수강생.
내 바로 뒤에 앉아서 되지도 않는 뻘질문, 뻘주장, 뻘논쟁 늘어놓는 한 수강생.
정말 참아주기 힘들었다.
가뜩이나 불편해 보이는 선생님만 아니었으면 진짜 좀 닥쳐 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악화될까봐 참았다(고 자기 합리화했다.)

아첨꾼의 주옥같은 대사들을 잊어버리기 전에 기록해 놓고 싶다.

이경미 감독(님)이 타르코프스키의 <거울>을 보고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며 한참 얘기한 뒤 얘기가 끝날 때쯤 잠시 침묵이 있자 위로라고 생각했는지 이렇게 얘기한다.
"저도 쉬운 영화가 좋아요. 쉽다고 가벼운 건 아니잖아요."

멍.
쏘 왓? 누가 물어봤어?

이경미 감독(님)이 히치콕 얘기를 한참 하자,
"꼭 자기 영화에 출연하시잖아요."

지영선이 부릅니다. 아 어쩌란 말이냐...

제발 3~40명이 듣는 강의를 개인 과외로 착각하지 말길 바랍니다 두 분.


4.
이번엔 진짜 <레볼루셔너리 로드>.
샘 멘데스의 놀라운 데뷔작(이라고들 하지만 그닥 좋아하진 않았다) <아메리칸 뷰티> 이후로 그의 영화는 처음 봤다.

중간에 어떤 영화들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메리칸 뷰티>와 비슷한 세계를 훨씬 더 세련되고 깊게 표현하는 데에 성공한 것 같다. (뭐 그렇게들 얘기하잖아, 평화로워 보이는 미국 중산층의 이면에 대한...아님 말구 아 소심해)

중반부까지 그럭저럭 흘러가던 영화가 (정신병자 두번째 왔다간 뒤) 둘이 대판 싸우고 난 뒤부터는 정말 놀라워지기 시작한다.
(그 정신병자는 토할 것 같이 피상적인 세계에 들어와서 혼자만 입바른 말 여과 없이 다 하는 '사회성이 결여된' 미친놈이라는
설정 좀 뻔하긴 하지만 그래도 매우 유효과(유효+효과)적이었다.)

거의 파탄에 가까울 정도의 격한 감정을 둘 다 겪고 나서 어찌 밤이 지나갔는지 어쨌든 다음날 아침.
오히려 난데없이 평화로운 아침이 기다리고 있다. 출근을 준비하는 프랭크와 아침을 준비하는 에이프릴.
전혀 봉합되지 않은 갈등을 마음 속 한 곳에 묶어둔 채 지극히 피상적으로 평화로운 이 아침은 정말 숨이 막힌다.
평화롭기 그지 없는 풍경 속으로 차를 타고 출근하려는 프랭크를 바라보는 에이프릴의 시점 샷.
이거 정말 좋다. 내 스타일이다.

그림만 보면 아무 문제도, 갈등도 없는 샷인데, 지금까지 영화를 따라온 관객으로서 숨이 막히고 막 미칠 것 같다.
거기에 앞뒤로 불안감을 감추려 애쓰는 에이프릴의 얼굴이 붙는다면 이건 넉다운.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깨끗한 거실 풍경에 에이프릴의 핏자국이 선명하게 얼룩질 때 영화가 여기서 끝나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사족이 아닐까 싶었는데 나머지 두 부부의 에필로그도 치명적이었다.

서로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은 채 살아가는 옆집 솁 부부.
그리고 그들 집에 초대된 또 다른 아주 젊고 아름답고 행복해 '보이는' 부부.
마지막으로 보청기를 서서히 끄는 할아버지.

우리 모두 그렇게 살아간다 이거지. 존내 비관적이고 서글프지만 먹힌다.


+ 내용 추가.

내가 뒷부분에 뻑 가서 거기만 초점을 맞췄더니 앞부분에 좋았던 장면들을 빼먹은 것 같아서...

하기 싫은 일 하러 직장 다니는 프랭크에 대한 묘사도 정말 빛을 발했다.
맨 처음 회사 갈 때 음악 깔리면서 약간 슬로우(?)로 계단 아래서 로우 앵글로 찍었는데 사람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정말 일제히 한 무리의 똑같이 차려입은 사람들이 똑같은 표정으로 걸어 오는데, 정말 출근길의 암담함을 잘 보여준다.
또 프랭크가 누굴 기다릴 때였는지 무슨 계단 한복판에서 퇴근하는 사람들이 뒤에서 몰려오는데 혼자서 미소 짓고 서 있는데,
이 샷 또한 죽였다.
직장 생활에 대한 묘사도 좋다. 인간관계랄지.
무엇보다 구구절절이 와닿았던 것은 회사를 그만두기로 한 뒤에 칭찬받으러 간 프랭크.
그 때 난데없이 흐뭇한 표정의 상사를 발견할 때란...그 미련...그 아쉬움...딱 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