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스턴 프라미스

木石 2008. 12. 17. 14:56
 

섹스, 폭력의 삶을 탐구하는 위대한 신체변용의 작가 크로넨버그의 걸작 <이스턴 프라미스> 2

기사입력2008-12-03 17:33 |최종수정2008-12-04 11:12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신체변용을 통한 폭력의 삶을 통해 삶의 불완전성에 주목했다. 변화가 생긴 건 <스파이더>에 이르러서다. 그로테스크한 SF적 상상력을 버리고 현실에 잠입한 폭력 성향을 탐구하는 크로넨버그는 <폭력의 역사>와 <이스턴 프라미스>를 통해 기이한 가족드라마를 선보인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작품 세계를 좀 더 자세히 살펴봐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스턴 프라미스>의 서두는 잔혹한 살인에서 시작한다. 외관상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이발소에 다소 어수룩한 청년이 도착하는데, 곧바로 그는 칼로 면도를 하던 사내의 목을 잔인하게 그어버린다. 이어 약국에 러시아인으로 보이는 한 소녀가 도움을 청하다 출산직전의 과도한 하혈로 결국 아이를 남겨두고 병원에서 세상을 떠난다. 장소가 주어지고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면서 거두절미한 살인과 죽음이 발생한다. 일종의 충격요법으로 시작해 영화는 그 잔상을 지극히 오랫동안 관객의 뇌리에 각인시킨다. 살인과 죽음이 무엇보다 우리들을 방문하고 있다.

폭력이 뒤이어 폭풍처럼 휘몰아칠 것 같다. 하지만 그건 관객의 기대일 뿐이다. 예상과 달리(혹은 앞서의 충격요법의 탓이겠지만) 크로넨버그의 영화에서 유혈낭자는 타란티노나 로드리게스의 경우처럼 유희를 즐길 만큼 거대하지도 길지도 않다. 아주 간결하면서도 깔끔하게, 하지만 격렬하고 갑작스럽게 짧은 폭력의 순간이 당돌하게 도착할 뿐이다. 그러니 오해하지 말아야할 것은 폭력이 크로넨버그의 전매특허는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의 영화 중심에는 살해당한 사람 곁에서, 혹은 죽어버린 사람 곁에서 계속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이 자리한다. 통념과는 달리 살인, 참살과 무관한 비당사자들의 일상의 삶이 더 중요한 문제다. 이들의 삶은 단지 죽음과 폭력에 노출되고 감염되어 고초를 겪는 것이 아니다. 죽음과 폭력에서 예외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으로 죽지 않고 살아남기에 더 거대한 문제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죽음 옆에서 가까스로 기생해 어떻게 삶을 살아갈 것인가가 크로넨버그가 제기하는 질문이다.

<이스턴 프라미스>에서 출생 즉시 고아로 전락한 아이를 떠맡은 여인은 죽은 자들과 어떻게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가를 고민한다. 그래서 윤리성의 문제는 폭력에 대한 비판이나 그것을 해부하는 것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폭력에 기생해 희생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기회를 얻었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크로넨버그는 이 애매한 삶의 불완전성에 주목하는 작가다.

외부의 침입

문제가 되는 것은 결국 외부로부터의 침입이라는 신체에 찾아온 기이한 방문의 모티프다. 크로넨버그는 폭력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지만 그것의 방향은 올곧게 바깥에서 내부로 향한다. 전작인 <폭력의 역사>는 그런 점에서 단지 폭력에 관한 성찰이 아니라 그것의 이력을 다룬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개인에게 가해진 폭력의 이야기가 가족, 사회, 미국, 아니 인류의 얼굴 위로 부상한다.

‘이력’ 혹은 ‘내력’이라 부르는 것은 그것이 내부에서 부상해오기 때문이다. 평범하고 조용한 남자가 폭력으로 치닫는 이야기가 아니다. 반대로 <폭력의 역사>는 폭력 속에 살아 왔던 한 남자가 20년간 평범하고 친밀한 남편으로 살아오다 갑자기 그의 몸에 기입된 은밀한 ‘내력’이 다시 그의 삶에 반복되어 부상해오는 이야기를 다룬다. 자크 투르뇌르의 <과거로부터>(1947), 혹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용서받지 못한 자>(1992)에서처럼 폭력이 과거로부터 되돌아오면서 온화한 삶의 표면을 불안하게 만들어버린다.

이런 문제설정은 크로넨버그에게는 내력이 깊은 편이다. 그의 영화는 대체로 바이러스처럼 외부로부터 신체 깊숙이 들어오는 무언가로 위기를 겪는 인간의 이야기를 그려왔다. 그의 초기작들인 <스테레오>(1969), <미래의 범죄>(1970), <데이 컴 프롬 위딘>(1975), 그리고 <브루드>(1979)와 <스캐너스>(1981)는 대부분 외부에서 들어온 기생충, 전염성 질병, 초자연적 능력으로 정체성의 위기에 처한 인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가령, 고층주택에 사는 의학박사는 인체에 유익한 기생충의 개발에 전념하는데, 그가 기대한 것은 인체와 정신에 미친 활력이었으나 실험의 결과로 되돌아오는 것은 예상치 못한 흉포성을 지닌 신체적 변형이다. 기생충이 체내에 침입해 내장의 기능을 대행하면서 인간의 몸을 빼앗아버리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런 설정은 <라비드>, <비디오드롬>, <플라이>로 이어져 더 극명해진다. <라비드>에서는 피부를 이식한 여성이 변이를 일으켜 겨드랑이 아래로 이상한 돌기가 형성돼 피를 빨아 들이는 변형이 발생한다.

그의 영화를 이끌었던 것은 이렇듯 외부의 침입이 신체 내부의 면역성을 절멸시키면서 동시에 기식하는 현상들이다. 가히 편집증이라 부를 만큼 크로넨버그는 내장에 집착한다. <비디오드롬>은 그런 경향의 격한 표현을 담고 있는데 주인공의 배에 생긴 균열에 밀고 들어가 인간의 몸을 지배하는 것이 엉뚱하게도 비디오테이프들이다. 미디어와 육체의 에로틱한 결합, 그것은 크로넨버그의 영화를 상징적으로 은유한다. 기생충, 성기를 연상시키는 돌기, 비디오테이프 등과 같은 이생물(물질)이 침입자로 인간 몸의 내부로 들어온다. 이어 이물질이 도리어 인간 몸을 외부화하면서 인간 정체성의 위기와 혼란이 발생한다.

기이한 신체변용극 덕분에 그의 영화는 손쉽게 B급 영화의 자장 안에서 공포영화, 공상과학영화라는 장르성의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이는 절반의 진실에 가깝다. 그에게 장르는 지켜야할 규범이나 이야기의 구조를 결정하는 원칙과는 무관해 보인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장르로 관객들이 기대하는 각별한 이미지를 더 과장되게 뽑아내는 것에 있다. 일종의 충격요법 말이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한 남자의 머리가 터져버리는 <스캐너스>에서처럼 그의 영화는 하나의 강렬한 이미지로 대변할 수 있는 독특성에서 시작한다.

실로 스타일이라 부를법한 것이 그의 영화에 적은 것도 그 때문이다. 지극히 간결한 형식에 강렬한 이미지의 여운을 길게 유지하면서 영상과 이야기를 엮어나간다. 이미지의 폭주가 더 중요하다. 공포, 충격, 섹스, 폭력으로 이어지는 감정들의 격렬한 체계를 구성하는 것, 이러한 어두운 정동들의 과다함은 내장을 뒤틀어 버리는 역겨움을 산출한다. 성기, 내장, 오물, 고문, 동성애 등 육체와 섹슈얼한 이미지들이 이야기를 초과하는 사태가 언제나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의 영화에서 중요했던 것은 컬트적 관객을 끌어 모으는 기괴한 이미지의 나열은 아니었다. 외부의 침입자가 인간의 몸을 도리어 외부화 하는 변용을 이뤄내면서 효과가 발생한다. 육체도 정신도 초과해버리는 균형의 파괴, 그것에서 발생하는 드라마가 축조되는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균형의 파괴는 그를 유명케 만든 <플라이>에서 극에 달하는데, 이는 샘 레이미가 <스파이더맨>(2002)에서 ‘거미-인간’을 표현하는 것과는 차이를 보인다.

과학자인 번들은 텔레포트를 통해 자신의 몸을 전송하다 파리와 인간 유전자의 이종교배로 ‘번들-파리’로 변모한다. 그는 말 그대로 거대한 파리로 변모해 무의식적으로 단것(설탕)을 퍼먹고 파리의 행태를 그대로 체현한다. ‘번들-파리’는 ‘파리’나 ‘파리-인간’이 아니라 그것의 능력 결합으로서의 ‘혼합물’인 괴물에 가깝다. 이 ‘파리-인간’은 인간, 곤충, 기계의 혼합물이자 지성, 감각, 테크놀로지의 미묘한 파워의 묶음이다(그의 이름은 문자 그대로 번들Bundle이다.) 반면,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에서 피터는 유전자 조작의 결과로 탄생한 초거미에게 손등을 물리고 변이를 경험하지만 그는 결코 ‘피터-거미’로 변모하지는 않는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피터는 여자에게 근사하게 보이려는 심산으로 차를 구입하기 위해 레슬링 경기장에 오르는데, 그 순간 아나운서는 피터를 ‘휴먼 스파이더’가 아니라 ‘스파이더맨’이라 소개한다. ‘휴먼 스파이더’라는 이름이 너무 연약해 보인다는 게 이유였지만 여기서 차이는 ‘슈퍼 스파이더(초거미)’, ‘휴먼 스파이더(피터-거미)’, ‘스파이더맨(거미인간)’에서 발생한다. 피터는 ‘파워는 그만큼의 책임을 요구한다’라는 삼촌의 말을 죽음의 교훈을 통해 얻게 되지만, 크로넨버그의 영화에서 ‘파리-인간’은 다양한 파워의 적절한 균형을 찾지 못하는 괴물로 소진되기에 이른다.

신체적 변용, 구더기로 변모하는 악몽과 같은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과다하다 싶을 만큼 화면 가득 넘쳐나게 하면서 크로넨버그는 심대한 감정의 드라마를 오물 가운데 떠오르게 한다. 공포영화, 황당무계한 공상과학영화의 틀 안에서 실로 대단한 연예영화, 가족드라마를 탄생시키는 야심을 부리는 것이다.

< 플라이>의 말미에 ‘파리-인간’으로 변모한 번들이 아이를 빼앗겨 가정을 잃어버릴 두려움으로 여인을 쳐다볼 때, 오물투성이의 변용된 몸 가운데로 떠오르는 거대한 눈과 슬픈 눈빛을 만약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아마도 크로넨버그의 진정한 팬이라 자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크로넨버그가 신체변용, 정신과 몸의 균형성의 파괴, 비실거리는 고깃덩어리 같은 비인간의 몸에서 거듭 불러오는 것은 어지간한 멜로드라마보다 더 강렬한 감정들이다.

비통한 폭력의 내력

크 로넨버그가 파격적인 영상에 몰두하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그런 경향에 경도되어 그가 현실의 표면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의 다채로운 영화를 도식화하는 것은 우를 범하는 일이겠지만, 최근작인 <스파이더>, <폭력의 역사>, <이스턴 프라미스>를 보고 있으면 크로넨버그가 이질적인 것이 하나가 되어가는, 혹은 결코 둘이 하나가 되지 못하는 비통한 현실에 주목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자동차와 인간의 몸의 경계가 소멸되는 지경에 이르는 <크래쉬>(1996),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애매한 지경에 이르는 <엑시스텐즈>(1999)를 거쳐 크로넨버그는 우리가 지각하는 표면으로서의 현실이 지닌 애매함에 주의를 기울인다. <스파이더>는 그런 점에서 크로넨버그의 새로운 도착을 알리는 상징적인 영화였다. 기차의 도착과 더불어(이는 역사적으로도 새로운 영화의 도착이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새로운 인물의 도착이 발생한다.

크로넨버그는 이 영화로 그간의 괴물적인 신체변형이나 가상현실 게임의 장면전개, 기계와 인간의 이종결합 같은 물리적 결합의 이음새를 지워버리면서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세계의 외관 아래에 잠복한 기억, 과거, 흔적들을 표면으로 부상시키는 서스펜스를 구축한다. 표면을 따라 미끄러져가는 또 하나의 현실이 그에게 흥미로운 것이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것은 다른 세계, 다른 현실성으로 그것은 환상, 상상, 망상이라 부를 법한 이상스런 것이 아니라 지극한 현실이다.

크로넨버그의 최근작에서 현실의 표면에 급부상하는 것은 무엇보다 폭력과 관련된 문제들이다. 그런데 그의 영화에서 폭력의 문제는 조금 진지한 접근을 요하는데, 가령 그는 폭력을 비판하거나 부정하지도, 그것의 윤리적 문제를 직접적으로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그의 영화는 폭력의 불가피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영화평론가인 켄트 존스에 따르면 “그는 우리들에게 폭력의 과잉을 그것의 본성적인 어리석음을 이해하도록 증거 하거나(브라이언 드 팔마의 <스카페이스>(1983)처럼), 어떻게 우리가 그러한 폭력에 둔감해하며 스펙터클한 현상을 즐기는지(가스파르 노에의 <돌이킬 수 없는>(2002), 혹은 미카엘 하네케의 <퍼니 게임>(1997)처럼)를 보여주지 않는다”고 한다. 차라리 그는 폭력이 인간의 삶에 어떻게 밀접하게 기생하고 있는가에 관심을 보인다.

가령 <폭력의 역사>에서 크로넨버그는 먹이사슬처럼 혹은 거미줄처럼 연결된 폭력의 연결고리와 그것의 위계성을 표현한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톰의 아들을 괴롭히려던 학교 불량배들은 때마침 차를 타고 오던 악당들의 힘에 압도되어 줄행랑을 친다. 그리고 악당들은 톰의 음식점을 방문해 손님들을 위협하는데 그들보다 더 강력한 톰의 완력에 압도당한다. 톰과 부인의 두 번 반복되는 섹스 또한 몸의 접촉이라는 섹스에 기생한 폭력적 양상을 표현한다. 그 첫 번째는, 톰에게서 과거가 부상하기 전에 부인이 십대의 치어리더 복장으로 다가와 다른 여인처럼 과거의 기억을 수정하려 할 때이다.

두 번째는 톰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계단에서 치르는 격렬한 섹스 장면이다. 이 두 번의 섹스장면은 반복과 차이를 보인다. 그것이 반복인 것은 둘의 섹스가 통상적인 관념으로 봤을 때 정상성에서 일탈한 격렬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며, 차이인 것은 계단에서 벌어지는 섹스에서 부인이 톰을 폭력적인 조이로 인식하면서 몸을 밀쳐내고 또 열정적으로 포옹하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온다.

문제가 되는 것은 폭력의 양상이다. 크로넨버그는 폭력의 묘사에서 과정보다는 결과를 보여주는 것에 더 치중한다. 폭력이 전개되는 과정을 짧고 강렬하게 담아내면서 그는 그것의 결과에 인간적 감정이 판단할 틈을 허용치 않는다. 그는 과장이 없는 알몸 그대로의 폭력의 결과에 대한 의학적 사실을 보여주려는 듯하다. <폭력의 역사>에서 총격전은 그것이 벌어지는 적당한 유희적 거리를 메워버리면서 근접하게 발생한다.

인간의 몸과 몸 사이에 총이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는 거리의 소멸과 편집 방식은 늘어진 고깃덩어리의 훼손된 신체에 눈을 집중케 한다. <이스턴 프라미스>에서는 칼의 사용이 더 돋보이는데, 이는 강렬하게 몸을 찢어버리는 직접적인 고통, 몸의 절단의 단면을 흔적으로 더 강렬하게 표현하는 것에 집중해 있다. 그가 밝히듯이 기묘하고 친밀하게 거의 에로틱한 지경에 이르는 근접한 몸의 충돌을 강렬화 하는 것, 이는 폭력과 섹스, 살인과 에로틱한 특성을 결합하는 것이다. <이스턴 프라미스>의 사우나 액션장면은 실로 이런 경향의 극단이라 말할 수 있다.

몸이 사실적으로 느끼는 것, 땀과 체취가 전해질 정도로 몸을 카메라에 근접하게 하면서 모든 것을 눈앞에 노출시키는 폭력의 현전성이 지나칠 정도로 명백하게 다가온다. 누구나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항상 목전에, 실제로 친밀하고 체험하지 않아도 민감하게 그 폭력의 감촉을 느끼게끔 하는 것에 그의 관심이 있다. 잔혹한 살인 장면을 불사하는 그의 과감함은 폭력과 살인을 인간의 육체에 가해진 손상으로, 인간 육체의 파괴로 그려내는 것에서 나온다.

이런 접근성의 감촉은 그가 묘사하는 폭력이 결코 쉽게 회피할 수 없는 것임을 일깨우게 한다. <폭력의 역사>에서 폭력이 묘사되는 방식을 보면, 그는 아마도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폭력을 불사한다는 그런 입장에 인간이 서 있다고도 여기는 듯하다. 그런 점에서 이런 입장에 가장 근접한 이는 미국영화에서 보자면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꼽을 수 있겠다. 물론 폭력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해야만 한다.

<이스턴 프라미스>에서 과거 KGB에서 일했다고 주장하는 숙부는 ‘망명 아니면 죽음’이라는 현실을 교훈으로 받아들여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 폭력은 언제나 인간의 삶에 상주한다. <폭력의 역사>에서의 한적한 미국 마을만이 아니라, 어두운 런던의 뒷골목에서, 혹은 이발소에서 폭력은 버젓이 발생한다. 언제나 선량한 가족이라도 그런 폭력에 쉽게 노출될 수 있다. 반대로 평범한 사람들도 또 누군가의 피에 의해, 거친 폭력에 의해 그들의 삶이 지켜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크 로넨버그는 그의 영화경력으로 인간의 몸이 정신과 맺는 균형, 혹은 그것의 파괴로 인한 효과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왔다. <이스턴 프라미스>의 한 장면에는 “러시아의 형무소에서는 문신이 없으면 그 인물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삶이 문신에 의해 신체에 기입되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몸에 새겨진 흔적을 탐구하는 것으로 크로넨버그는 폭력을 사고한다. 그런데 근래의 작품에는 무언가 다른 흔적이 또한 부상해온다. 그것은 기이하게도 아이와 관련한 것이다.

< 스파이더>에는 악몽처럼 출몰하는 유년기의 아이가 있고, <폭력의 역사>에는 악당들의 총구가 겨냥한 아이, 혹은 괴물을 꿈속에서 보았다고 말하는 아이가, 그리고 <이스턴 프라미스>에는 결국 그 모든 문제의 근원에 위치한 죽음에서 남겨진 아이가 있다. 크로넨버그의 영화가 기이하게도 대리 가족드라마로 변이하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그걸 새로운 희망, 혹은 포기할 수 없는 약속이라 불러야 할까? 글쎄, 그건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김성욱(영화평론가)


Column- 김영진의 러프 컷


<이스턴 프라미스> 생각

2008.12.10 / 김영진 편집위원

데 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신작 <이스턴 프라미스>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중반부의 사우나 격투 장면일 것이다. 비고 모텐슨이 연기하는 주인공 니콜라이가 마피아 일원으로 인정받는 문신을 몸에 새긴 직후 그는 사우나에서 보스의 아들로 자신을 오해한 적들과 벗은 맨 몸으로 싸운다. 자기 아들을 보호하려는 보스의 계략에 말린 것인데, 아무튼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채 무지막지한 짐승같은 체첸인들과 싸우는 니콜라이의 모습은 관객에게도 통증을 안겨준다.

날카로운 칼을 휘두르는 적들에게 몸을 난자당하면서 불굴의 체력으로 그들을 무찌르는 니콜라이의 모습에선 물론 당연히 어떤 액션영화의 쾌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진짜 폭력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 영화의 이 장면만큼 서늘하게 보여준 게 또 있었는가 생각나지 않는다. 오래 전 임영동 감독이 연출한 장 클로드 반담의 <맥시멈 리스크>란 영화에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있었지만 <이스턴 프라미스>에 비하면 학예회 수준인 것이다.

사람이 아무 것도 입지 않고 쉬는 사우나와 같은 공간은 가장 편안한 휴식감을 주는 공간이다. 거기서 사람들은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완전히 풀어진 자기 모습으로 돌아간다. 앨프리드 히치콕의 <사이코> 샤워 살해 장면이 그토록 오래 회자되는 장면으로 남은 것도 비슷한 이유일텐데 인간이 가장 연약하고 방심하는 순간에 벌어지는 폭력이란 것은 그토록 끔찍한 것이다. 이는 크로넨버그의 최근 두 편의 영화 주제와도 일맥상통하는 주제일 것이다.

거창하게 ‘폭력의 역사’라는 제목을 단 전작에서도 크로넨버그는 범죄집단의 킬러 이력이 있는 주인공의 현재 생활에 각인된 폭력의 흔적이 과연 지워질 수 있는 것인지를 증명했다. 장르규범에 따른 극적인 설정과 반전이 인위적이더라는 흠에도 불구하고 <폭력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제기된 질문은 과연 영화에서나 보는 것 같았던 폭력의 위협적 그물로부터 보통 사람들이 자유로울 수 있는가라는 것이었다.



이 는 데이비드 린치의 <블루 벨벳>과 같은 중기걸작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주제였는데, 겉으로 평온하고 안정된 것으로 보이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이 과연 그런 것인지, 안전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허위는 아닌 것인지 묻고 있는 것이다. <폭력의 역사>와는 다소 다른 방향에서 주인공 캐릭터를 정한 <이스턴 프라미스>는 러시아 마피아 조직의 운전사이자 해결사인 주인공 니콜라이의 내면에 잠복한 선한 의지가 과연 지탱될 수 있는 것인지를 묻는다. 이 경우에 니콜라이는 주변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지옥도를 다 목격하고 있지만 그걸 바꾼다는 것은 아예 생각하지도 않고 있다. 그 상황에서 한 가련한 러시아 소녀 창녀가 아기를 낳고 죽은 뒤 그 아이를 받아낸 조산원 산파 안나가 소녀를 착취했던 러시아 마피아 조직의 실체를 알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이스턴 프라미스>의 내용이다.

이미 지난 호 <필름 2.0> 특집에서 이 영화의 뼈와 심줄에 관한 모든 걸 밝혀주는 평론들이 실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첨언할 게 있어 이 영화를 살핀다면 나이든 감독 데이비드 크로넨버그가 살피는 인간의 조건이 너무 통렬하고 가슴 아파서 못 견디겠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그는 인간의 몸이 다른 것과 섞이는 공포 판타지 영화를 통해 세계 영화사에 등재된 감독이다. 초기작과 중기작들에서의 그가 보여준 폭력은 성적인 희열과 동전의 양면처럼 겹치는 어떤 초월적 경험을 대리제공했다.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탐구한 영화가 <크래쉬>나 <엑시스텐즈>였다. 그 영화들에서 기계와 접촉하는 인간들은 노골적으로 오르가즘에 취한 황홀경을 즐긴다. 다른 세계로의 일탈은, 비록 비극으로 끝나기는 하지만, 크로넨버그의 영화에서 곧잘 허용되었던 것이다. 그 일탈의 수준이 거의 종교적인 법열 수준으로까지 고양되는 것이 크로넨버그 상상력의 놀라운 지점이었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에 크로넨버그가 만든 영화들의 방향은 전혀 다르다. 어린 시절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해 망집의 거미줄에 갇힌 주인공의 의식을 파고든 <스파이더>나 최근의 ‘폭력 2부작’에서 크로넨버그는 다른 곳으로 탈출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을 찍는다. 이 영화들에서 폭력은 닫힌 세상의 엄혹한 조건을 증거하는 것일 뿐이고 몸서리치게 무서운 폭력의 시련을 주인공이 다 통과한다 해도 살집과 뼈가 너덜너덜하게 된 고난을 겪고 난 후에도 주인공에게 탈출은 허용되지 않는다.


< 이스턴 프라미스>에서 상식과 인정을 품고 살아가는 여주인공 안나에게 니콜라이는 전지전능한 육체적 능력을 지닌 초인처럼 보일지는 모르지만, 게다가 그는 러시아 마피아의 일인자가 됨으로써 나름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꿀 의지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그를 보여주는 카메라는 그저 불길하기만 하다. <이스턴 프라미스>와 <폭력의 역사>의 마지막 장면이 주는 불길한 전조는 세상이 이토록 지옥인 것을 알았으니 그래도 살만한가라고 묻고 있는 듯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 러니 개인적으로 크로넨버그의 이전 영화들에 비해 최근작들이 훨씬 무섭고 섬뜩한 느낌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서 비관적이 돼가는 게 흔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비관적이면서 동시에 지지 않는 기운을 품고 있는 것은 경이적인 일이다. <폭력의 역사>와 <이스턴 프라미스>에 담긴 폭력묘사의 윤리는 그런 점을 가리키고 있는 듯이 보였다. 실제로 벌어지는 현실 속의 폭력과 꽤 닮아있는 잔혹한 묘사의 여진은 자기 육체의 고통을 견디면서 피안을 보는 시선 따위는 없다. 이 영화들에서 비고 모텐슨이 연기하는 주인공은 폭력의 복판에서도 자기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 폭력이 거듭될 것임을 뼛속 깊이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체념도 할 수 없는 상태의 강인함이 이 탁월한 배우의 육체에 아로새겨져 있다. 그게 관객 입장에서 통증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폭력의 역사>와 <이스턴 프라미스> 모두 상영시간은 90분 남짓이다. 나이를 먹을 수록 간결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라고 언젠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말했다. 이단의 쾌락을 주장하며 휴머니즘에 침을 뱉던 크로넨버그라는 감독은 이제 세상을 공격하며 즐겁게 탈출하는 길의 허무주의를 빠져나와 지옥의 복판에서 강인하게 견디며 응시하는 주인공들을 보여주고 있지만 과묵한 그의 영화의 주인공들의 캐릭터와 상응하는 스타일의 힘을 보여준다.

거두절미하고 짧고 굵게 폭력적인 인간의 조건을 묘사하는 그의 영화는 안간힘을 쓰며 안전과 평안을 위장하고 있는 우리들 관계를 카메라로 난자한다. 누구도 이 상황을 벗어날 수는 없다. 지난 호 특집에서 장병원씨가 흥미롭게 제시한 대로 크로넨버그는 이 폭력의 순환을 성서적 알레고리로 슬쩍 뒤집는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보호하는 성서적 내러티브는 구원이라는 궁극의 서사를 지향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그런 것이 없다. 단지 지금 몸이 너덜너덜해진 가운데서도 아기를 구하기 위해 살짝 힘을 보탤 수 있을 뿐이다.


어 쩌면 우리는 너무 쉽게 구원과 반전을 바라는 게 아닐까. 혼란스런 세상을 살면서 요즘은 그런 생각이 더 절실해진다. 누구나 해결책이 있는 듯이 말하지만 정치가들의 쓰레기같은 말들에 온 세상이 오염돼 있다. 그 말들은 아무 전망도 제시하지 못하고 세상은 혼탁한 폭력의 순환에 갇혀 있다. 크로넨버그의 영화들에서처럼 피가 터지고 살이 갈라지며 뼈가 부숴지는 물리적인 폭력말고도 다양한 폭력들이 우리의 관계에 침투해 있다. 우리는 구원의 언어를 바라지만 그건 허망한 꿈이다.

그런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예전에도 그랬다. 우리가 그 악순환의 그물에서 빠져나올 길은 없다. <이스턴 프라미스>에서 안나가 자꾸 러시아 마피아의 속을 알려고 하자 니콜라이는 이 세계로 들어오지 말하고 한다. 그 세계에서 안전하게 머무는 것이 낫다고. 그런데 니콜라이도 결국 알게 되는 것은 그렇게 안전하게 금을 치고 머물 수 있는 상황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나는 크로넨버그의 영화들에서 그게 무서웠다. 그리고 그걸 정색하고 무섭게 보여주지만 이상하게도 평온함을 동시에 가져다 주는 그의 화술도 놀라웠다. 어른 예술가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경지는 이런 게 아닐가 생각해본다. 우리 삶의 윤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면서 또한 단순한 것이다.



듀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40&aid=0000012718

씨네21 이화정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40&aid=0000012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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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인터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40&aid=0000012618


 



유현경_일반인 남성모델-H, 30세, 경상남도 밀양 영운장, 2008년 1월 19일 PM 9:49
캔버스에 유채_116.7×91cm_2008



유현경_일반인 남성모델-H, 30세, 경상남도 밀양 영운장, 2008년 1월 19일 PM 9:47
캔버스에 유채_33×24cm×5_2008



유현경「여성 화가와 일반인 남성 모델」 ● 기존에 주로 남성 화가가 그린 여성 모델의 모습을 보면서, 관계가 바뀌어 그 자리에 남성 모델이 위치했을 때 어떤 모습일지를 연출해 보려는 것과 화가와 모델과의 관계는 어떤 양상을 띠게 될지를 실험해 보려는 의도에서 여성화가와 남성모델이라는 관계를 설정 하였다. 이성에 대한 호기심과, 남성의 이미지에 대한 막연한 상상은 작업의 시작이 되었다. ● 모델과 나는 여행을 한다. 장소와 날짜, 기간은 협의 하에 정한다. 모델과 나는 각자의 일상에서 아는 사람은 아니다.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통해 관계가 형성되며, 여정의 공간은 모델과 나의 일상이 아니기 때문에 낯선 공간이다. 나는 그 공간과 그 공간속에서 모델의 이미지를 보고자 한다. ● 작업의 진행 과정은 제약조건 없이 일반인 남성 모델을 구한다는 공고를 하고, 관심을 보인 사람을 만나 작업의도를 설명한다. 이에 동의한 사람과 시간 약속을 잡고 장소를 정한 후 여행을 떠나는 방식이다. ● 제도권에서 구해진 전문 모델이 아닌 일반인이 보여줄 수 있는 몸짓과 표정은 예측 불가능하다. 그것은 단지 모델의 모습이 아니라 화가와 모델이라는 관계 속에서 나타나므로 모델마다 다른 형태를 띠게 된다. 여행은 관계 설정을 위한 연출이다. 일반인 모델들은 각자 다른 생각과 의도를 가지고 작업에 참여한다. 나는 모델과의 각기 다른 경험과 기억을 토대로 작업을 진행한다.